아들의 승부욕

-공기대회

by 정양갱

초3 아들이 다니는 태권도 학원에서 개원 3주년을 맞아 ‘공기대회’를 마련한다고 했다. 모처럼 부모님들 얼굴도 보고 공기대회 결과에 따라서 상품도 나누는 시간을 갖기 위해 기획한 자리라고 했다. 황금 같은 금요일 저녁 시간에 얼굴도 잘 모르는 부모님들과 마주 앉아 공기를 하는 상황이 그리 달갑지는 않아서 신청을 미루고 있었는데, 대회 일주일 전쯤 아들이 물었다.


엄마! 공기대회 신청했어?

아. 아니... 공기 대회 가고 싶어?

응! 1등 상품이 5만 원(상품권)이래. 2등은 3만 원!

그런데 엄마가 공기를 초등학교 때 하고 안 해서 잘못해.

괜찮아! 연습하면 되지. 나 공기 많아.


그날 이후 우리는 저녁마다 거실에서는 공기 연습을 시작했다. 밥 먹고 나서 문득, 빨래 개다가 문득, 머리 말리고 문득문득 공기를 던지고 받았다. 아들보다는 내 실력이 나은 것 같고, 나보다는 중1 딸 실력이 나은 것 같았다. (사춘기 딸은 공기대회 같은 것에 참가할 생각은 1도 없었지만 옆에 와서 같이 공기놀이를 했고, 꽤 잘했다.) 아들의 시선은 자꾸 누나를 향했다. 그리고 마침 공기를 던지고 있는 누나에게 말했다.


누나 우리 태권도 학원에서 공기대회 하는데 1등 상품이 5만 원이야.

어 그래. (공기만 쳐다보며 던지고 받고 있다.)

누나도 와도 돼.

왜? 싫은데.

2등 해도 3만 원이야.

안 가. 내가 거기 왜 가냐. 가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하고 앉아서 공기를 하라고?

부관장님이 누나도 오라고 했어. 초등부에서 하면 된다고.

싫어.

왜?

야 거기 가서 1등을 해도 그래. 그 관장님이 또 앞으로 나오라고 해서 선물 주면서 인사하고 박수 치고 할 거 아니야. 아 진짜 싫어. 마지막에 또 “태권도 최고야!” 하면서 엄지 척도 하고 그럴걸. 생각만 해도 싫다.


그렇게 아들은 우리 집에서 공기 실력이 제일 좋은 누나를 데리고 가는 데 실패하고, 아빠는 설득조차 하지도 않고(남편은 공기를 만져보지도 않았다) 나와 둘이 공기대회에 참가했다.


드디어 대회 날. 저녁 8시에 시작하는 공기대회 시간에 맞춰서 집을 나서며 제과점에 들러 케이크를 하나 샀다. 명색이 학원 3주년 기념행사인데, 선생님들에게 고맙고 축하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아들은 대회 날 케이크를 왜 사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1분 늦게 학원에 도착한 것에 대해서 툴툴댔다. 부관장님(관장님 아내)께 케이크를 전하고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회 규칙을 소개한 후 먼저 부모님들의 토너먼트 공기대회가 시작됐다. 토너먼트 공기대회는 3개 조로 나누고 각 조별로 6명이 세 번의 경기를 치른다. 나는 첫 경기에서는 이겼고 두 번째 경기에서 졌다. 토너먼트이기 때문에 그냥 그렇게 끝난 거다.


아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눈과 입술이 일자가 됐다. 그래도 잠시 후 표정 관리를 하더니 바로 이어서 리그전 있으니까 연습을 하자고 했다. 이후 우리는 태권도장 바닥에 앉아서 공기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에 아무렇게나 앉아서 공기 연습을 하는 부모님들과 학생들의 모습을 보니, 순간 영화 ‘오징어 게임’이 생각났다. 손이 조금 풀렸는지 토너먼트전을 할 때보다 잘 되는 것 같았다.


리그전을 앞두고 학원 선생님들은 부모님과 학생들에게 종이 쿠폰을 1인당 다섯 장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리그전은 이 종이 쿠폰을 아무에게나 내밀면 대결이 시작된다고 했다. 이기면 상대방의 쿠폰을 한 장 뺏어올 수 있고 경기를 거절하면 경기를 하지도 못한 채 쿠폰을 뺏기게 된다고 했다. 종이 쿠폰을 가장 많이 모은 사람이 최종 우승. 워낙 인원이 많은 탓에 아이들은 옆방으로 건너가 리그전을 진행했고, 나는 쭈뼛쭈뼛 그나마 안면이 있는 부모님들 먼저 찾아가 대결을 신청했다. 처음 세 판은 내리 이겼다. 그런데 이후에 쿠폰을 돈다발처럼 들고 다니던 사람들이 내게 와서 대결을 청했고 두 판을 내리 졌다. 이후 한 경기를 더 치르던 중 리그전이 종료됐다.


나에게 남은 쿠폰은 총 6장. 아들이 와서 물었다. 쿠폰 몇 장 있느냐고. 리그전 1등은 쿠폰을 10장을 모은 사람에게 돌아갔다. 아들의 눈과 입은 또다시 일자가 됐다. (아들은 리그전에서 쿠폰을 한 장도 얻지 못하고 다 뺏겼다고 했는데 왜 이렇게 당당한지 모르겠다. )


그렇게 이날 행사가 끝나나 보다 했는데, 관장님은 상품을 받지 못한 부모님들을 위해서 지도진 선생님들과 가위바위보 게임을 하겠다고 했다. 먼저 사범님 한 분과 부모님들 다수가 벌이는 가위바위보 게임이 시작됐다. 가위바위보로 마지막까지 사범님을 이기는 분들에게 선물을 드리겠다고. 나는 사부님과 하는 단체전 가위바위보 첫판에서 탈락했다. 아들의 눈이 또 일자가 됐다. 네다섯 명의 부모님들이 최종까지 가서 컵라면을 상품으로 받았다. (아들이 열광하는 컵라면이다.)


이어서 부관장님과 상품을 받지 못한 부모님들의 가위바위보 게임이 시작됐다. 이번 상품은 쌀 1kg 한 봉지. 이번에도 졌다. 아들의 작은 입이 심하게 앞으로 나왔다. 마지막으로 관장님과 여전히 상품을 받지 못한 부모님들이 가위바위보 게임을 했다. 마지막에도 쌀을 받지 못했다. 남은 쌀을 더 선물로 주기 위해서인지 관장님은 갑자기 가족들 모두의 나이를 더해서 가장 많은 팀에게 상품을 주겠다고 했다. 네 명이 온 가족에게 상품이 돌아갔다. 그래도 남아있는 쌀 1kg을 처리(?) 하기 위해서인지 관장님은 다시 물으셨다. “이번에는 오늘 오신 분 중에서 가장 연장자에게 상품 드릴게요. 45세 이상인 분들은 손 들어보세요."


그때 아들이 내 왼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야! 나 만 나이 44야” 했다. 아들이 “한국 나이로 하지 누가 만 나이로 해” 하는 와중에, 관장님은 “ㅇㅇ이 어머님 쌀 받아 가세요” 했다. 그곳에 있던 45세 이상연장자가 나 혼자는 아니었지만, 나는 버티다가 맨 마지막에 상품을 받으러 걸어 나갔는데 그 길이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수많은 눈들이 나를 보며 ‘45세 이상 ㅇㅇ이 엄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들의 눈은 그제야 웃었다. 그때는 내 눈이 일자가 됐을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계속 툴툴댔다.


사람들이 나 쳐다보는 거 봤어? 오늘 엄마 45살 이상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낸 거야.

엄마는 가위바위보도 그렇게 못해!

너는 리그전에서 쿠폰 0개였다면서

아... 누나가 왔어야 하는데...


집에 와서도 아들은 아빠에게 나의 공기 실력과 가위바위보 실력, 그나마 나이 때문에 쌀 1kg을 받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나는 지지 않고 만 나이로 45세가 아니라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다가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아들에게 말했다.


야! 그래도 지난번에 도 대항 줄넘기대회 나갔을 때는 엄마가 학부모 경기에서 1등 해서 사골 받았잖아. 그걸로 너 떡국 많이 끓여줬잖아.


그제야 아들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나를 흘깃 쳐다봤다. 그날 밤 자기 전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친 시험지를 들고 올 때, 어떤 대회에 나갈 때 이런 심정일까. 그깟 공기대회가 뭐라고..... 오늘은 내가 태권도장에서 들었다 놨다 한 공기가 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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