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지킬 수 없을 때

건강검진

by 정양갱

연말이 가까워지면 더는 미룰 수 없는 숙제처럼 검진 예약을 잡는다. 올해는 4년에 한 번꼴로 하고 있는 대장내시경 검사 때문에 마음이 더 무거웠다. 속을 비우기 위해 먹는 약은 생각만 해도, 그 짜고 역한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속이 울렁거린다. (실제 내시경 약을 먹고 토하지 않은 날이 없다.) 검진 전날 밤새 화장실을 들락거리고 새벽에 다시 약을 먹다 토한 후 아침에 병원에 갔다.


병원에 가니 검진받기 위해 온 사람들이 꽤 많다. 공장 컨베이어벨트가 돌아가는 것처럼 사람들은 문진표를 작성하고 키와 몸무게를 재고, 시력, 청력 검사를 한 후 엑스레이 검사, 피검사, 내시경 검사를 순서대로 받는다. 누구누구 씨! 하고 호명하면 대답하는 목소리나 시력 검사에서 검사판의 숫자를 읽는 목소리가 왠지 활기차 보인다. 나는 피검사를 앞두고 약간 긴장됐지만, 순간 ‘검진이 뭐 별거인가’라는 생각이 들어 한숨과 함께 긴장을 떨쳐냈다.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고 채혈을 하기 위해 의자에 앉았다. 이제는 10살 아들도 울지 않고 하는 채혈이지만, 나는 채혈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다. 어느 병원에 가도 한 번에 주삿바늘을 꽂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죄송해요. 다시 한번 할게요”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한숨을 삭이며 반대쪽 팔을 걷었다. 두 번 만에 끝난 게 다행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남은 내시경 검사를 기다리며 병원 소파에 앉았는데 갑자기 눈앞이 노래졌다. 시야가 좁아지고 어지럽고 식은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상체가 흔들리고 손발에 경련이 이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힘이 빠졌다. 속이 울렁거리고 화장실에 가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벽에 기대고 앉아있다가 간호사에게 상태를 얘기했더니, 전에도 채혈한 후에 이런 적이 있었냐고 묻고,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누워있으라고 했다.


검진의 제일 큰 관문인 대장내시경 검사가 아직 남았는데 오늘 받을 수 없는 건가?

어제 약 먹으면서 토하고 그 난리를 겪었는데 다시 또 약을 먹어야 하는 건가?

남편은 회사에서 오려면 30분은 걸릴 테고, 엄마는 오늘 일이 있다고 하셨는데, 아빠에게 전화해야 하나?

그나저나 나는 정말 괜찮은 건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무서웠다.


그때 병원 입구 쪽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정윤경~”하고 내 이름을 부르며 아빠가 해맑게 웃으면서 걸어오셨다. 어지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보는데, 순간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고은이 악귀에게 납치됐을 때 구하러 온 도깨비와 저승사자(공유와 이동욱)의 모습이 생각났다. 딱 그 타이밍에 나를 향해 걸어오는 아빠의 모습은 내 인생의 드라마 같은 순간이었다. 40 평생 살면서 노력한 것 이상의 결과가 나오거나, 대박이라는 말을 할 정도의 운을 만나기는 어려웠는데, 내 인생에도 드라마 같은 순간이 있네,라는 생각을 했고 긴장이 풀렸다.


아빠 어떻게 왔어요?

어제 엄마랑 통화하는 것 듣고 와 봤지.

안 와도 괜찮은데......

너도 맨날 오잖아.

아 그런데... 사실 나 방금 피 뽑고 어지럽고 식은땀 나서... 이제 내시경 받아야 하는데 받을 수 있나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어... 아빠 안 왔으면 어쩔 뻔했나 몰라.

피 뽑고 왜 어지러워? 물어봤어?

응. 우선 그냥 움직이지 말고 있으래. 다음부터는 피 뽑을 때 꼭 미리 얘기하고 누워서 뽑으라고 하고.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 아마 혈압이 낮아서 그런 것 같아.

진짜 괜찮아졌어?

응 점점 더 괜찮아지는 것 같아.

그래.


그리고 내 이름이 호명됐다.


나 갔다 올게요~

응. 여기 있을게.


내시경 검사를 위해 검진실에 들어가서 주사를 맞고 기억이 끊겼다. 전에는 혼자 와서 검사하고 아무 일 없이 집까지 잘 갔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집에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한기가 들었는지 온수매트를 켜고 잠이 들었나 보다. 일어나서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병원 카드 결제 내역이 있고, 옷도 잘 입고 있는데, 정말 병원에서 집까지 온 게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옆에는 백설기 한 덩어리가 있었다. (어제 엄마랑 통화할 때 떡을 좋아하는 나를 위해 가져다주겠다고 했던 떡 같았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니 나는 내시경 검사를 받고 두 발로 걸어 나와서 옷을 입고 결재도 하고 집에 잘 갔다고 했다. ‘술 마시고 필름 끊길 때 이런 기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은지 다시 물으셨다. 나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답을 했겠지만, 실제로 푹 자고 일어나서 그런지 정말 괜찮은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미뤄뒀던 일을 하고 딸 하교 시간에 맞춰 픽업하고 학원에 데려다주고 저녁밥을 하다 보니 하루가 저물었다. 다시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괜찮냐고.


응 이제 정말 괜찮아요. 나 일도 하고 애들 데려오고 밥도 하고 다 하고 있어요.


임무를 마친 것처럼, 아빠는 그럼 됐다고 하더니 전화를 끊으셨다. 혼자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기양양하던 자신감이 순식간에 빛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나를 지킬 수 없을 때, 혜성처럼 등장해서 그림자처럼 옆에 계셔주시는 아빠가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하게 느껴졌는지 모르는 하루였다. 혼자였다면 얼마나 무서운 하루였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빠 덕분에 오늘 내 하루는 드라마였다.


도깨비.png

( 드라마 '도깨비'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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