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가 지불해야 할
혐오의 비용

2026년 1월 13일 서울시내버스 파업 事態

by reack

형평(衡平):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름.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우리는 흔히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과정을 ‘투쟁’이라 부르며 숭고하게 여기곤 한다. 하지만 2026년 1월, 서울 도심을 멈춰 세운 버스 파업과 그 타결 내용을 대면하며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휘두르는 권리라는 이름의 창은 과연 정당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너진 ‘형평’의 가치는 누가 복구할 것인가.


정의를 집어삼킨 경제 논리, '신의칙'이라는 이름의 배신

사태의 뿌리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12다89399)이라는 법리적 파산 상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법부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는 합의가 강행규정 위반이라 ‘무효’라고 선언하면서도, 정작 지불 의무에 대해서는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을 들먹이며 면죄부를 발행했다.

법치주의적 관점에서 이는 기괴한 논리적 도약이다. 강행규정은 법질서의 최저 기준을 수호하기 위한 강제적 장치다. 하위 원칙인 신의칙이 상위법인 강행규정의 효력을 정지시킨 것은 법의 위계 질서를 무너뜨린 하극상에 가깝다. 법이 정의가 아닌 ‘비용의 안녕’에 무릎을 꿇었을 때, 노동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고귀한 행위가 아닌, 판례의 문구 사이에서 돈을 캐내는 기술로 변질되었다.


단계적 연장이라는 기만, 그 '우아한' 알박기의 기술

이번 협상의 정점은 단연 정년 연장 합의다. 65세까지의 정년 연장을 ‘단계적’으로 시행한다는 문구를 보며 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산술적으로 따져보자. 올해 정년을 64세로 늘리면 퇴직 예정자들은 자리를 보전한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정년은 다시 65세로 늘어난다. 결국 ‘단계적’이라는 표현은 시민들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쇼윈도용 단어일 뿐, 실제로는 현직에 있는 이들이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고임금 구간을 완주하게 해주는 정교한 설계다.

실력에 대한 검증이나 안전에 대한 의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이’라는 숫자를 늘려 기득권을 고착화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기 싫으면 그만두면 그만인 시장의 논리는 시민의 일상을 볼모로 잡은 인질극 앞에 무력화되었다. 이것은 고령 노동자의 생존권 보호라는 명분 뒤에 숨어, 다음 세대의 진입로를 가로막고 시스템의 단물을 마지막까지 빨아먹겠다는 비겁한 세대적 약탈이다.


불만은 권리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선택과 책임의 문제

우리는 여기서 '불만'과 '권리'를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처우에 완벽히 만족하며 살아가지 않는다. 연봉 10억 원을 받는 의사조차 자신의 실질 임금 수준에 불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그것이 자본주의의 동력이다. 따라서 ‘단순히 지금보다 더 나은 처우를 원한다’는 개인적 욕망은 파업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직업은 개인의 선택이다. 하루 12시간의 현장 노동이 버겁고 고되다면, 그것은 시스템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 대안을 찾아야 할 영역이다. 현장직의 고단함이 싫다면 더 공부하여 사무직으로 전환하거나, 노동 강도가 낮은 직종을 찾아가는 것이 성숙한 성인의 해결 방식이다. 자신이 선택한 길의 특성을 부정하며 공공의 일상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징징대는’ 행태는 노동의 가치를 스스로 훼손하는 일이다.

그렇기에 이번 파업에 참여한 기사 개개인에 대한 대중의 차가운 시선과 혐오는 정당한 사회적 비용이다. ‘노조’라는 집단 뒤에 숨어 개인의 책임을 희석하려 하지만, 타인의 일상에 흠집을 내어 본인의 주머니를 채운 것은 결국 개개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한 대가로 얻어낸 이득에 대해 시민들이 보내는 멸시는 그들이 감당해야 할 정당한 몫이다.


책임의 외주화,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남긴 더러운 유산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누군가의 이득은 반드시 타인의 비용으로 치환된다. 준공영제라는 방패 뒤에서 세금으로 연명하는 이들이, 파업권도 없이 묵묵히 헌신하는 다른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며 이득을 취하는 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상식인가.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이번 협상이 남긴 ‘오염된 유산’이다. 기성세대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은퇴 전 마지막 실익을 위해 미래 세대의 자리를 미리 약탈했다. 그들이 누릴 65세까지의 고임금은 결국 버스 요금 인상과 지자체의 부채로 전이되어, 지금의 청년 세대가 짊어져야 할 평생의 짐이 되었다. 그들은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선배’의 자리를 보여주는 대신 ‘시스템을 갈취하는 기득권’이라는 더러운 유산을 물려주었다. 신규 채용의 문은 좁아졌고,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 신뢰는 파산했다. 이것은 승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안락을 위해 미래 세대의 진입로를 콘크리트로 메워버린 비겁한 거래다.

결국 이 모든 혐오의 비용은 지금 운전대를 잡고 파업을 주도한 세대가 아닌, 그 자리를 물려받아야 할 다음 세대가 지불하게 될 것이다. 비겁함이 실리가 되는 시스템에서 나는 그들의 승리에 축복을 보낼 수 없다. 그들이 던진 이기심의 청구서는 머지않아 우리 사회의 허리를 더 팍팍하게 만드는 지울 수 없는 흉터로 남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되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