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내가 글을 쓰고 싶은 이유

by 가온결


지금은 새 벽 두 시가 넘은 시각,

어떻게 시작하지, 어떻게 써 내려갈지, 머릿 속을 수 없이 돼 내이다가

첫 글쓰기를 이렇게 시작해 본다.


지금의 나는 평범한 40대

숫자 '4'를 꺼림칙하게 여기는 나름의 원칙주의자

고지식한 40대 아줌마로 살아가고 있다.


첫째를 허니문베이비로 뱃속에 품고

작은 출판사의 취재와 원고를 마지막으로 글쓰기를 끝냈던 나,

비로소 13년 만에 무언의 끄적임을 이제야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나는 두 살 터울의 남동생을 둔 K장녀로 태어났다.

남아선호사상이 극심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나의 할머니는 내가 딸로 태어나자 쓸모없는 딸을 낳았다고

나무라듯이 욕을 내뱉으셨다고 엄마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씩 남쪽 끝에서

버스를 타고 첫 손주인 나를 부지런히 보러 서울로 상경하셨다.


그 시절 통속처럼, 첫 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말을 잊을만하면 들으며 성장한 것 같다.

심지어 나의 이름은 부모님께서 직접 지은 이름도, 작명소에서 지은 이름도 아닌,

뽑기 운으로 골라잡아 지은 이름이다.

고모할머니께서 그 시절 흔하디 흔한 세 가지 이름을 지어 와서 부모님께 내밀었고,

부모님은 그중에서 '희'자로 끝나는 지금의 이름을 고르셨다.


나는 어려서 흔하디 흔한 나의 이름이 너무 싫었다.

한 반 건너 성만 다른 똑같은 이름이 수두룩 빽빽

특별한 의미가 없는 이름이 쓸모없게 여겨졌다.

게다가 태생적으로 내성적인 성격까지 더해져

조용조용히 가만 가만히가 당연한 듯 자라났다.


하지만 한자를 배우기 시작할 무렵,

친구들에 비해 쉬운 내 한자가

단순하면서도 좋은 뜻을 지녔다는 걸 알게 되면서

비로소 흔하지 않은 성과 어우러진

평범한 내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중년의 기로에 선 지금, 어디든 한 명씩은

꼭 있는 희자매들을 향해 능청스럽게

다가서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무기이기도 하다.


초면에 낯을 많이 가리는 '나'라는 사람에겐

작은 꼬투리가 주는 소속감이 마음의 평안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통해 나만의 내적친밀감이

상승한다고 할까... 무언가 대화의 단절을 이어나가기 위한

좋은 타이밍이라고 할까... 동시대속 비슷한 이름의 그녀들과

시시콜콜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살아가면서 또 다른 위안을 얻는다.


사소한 걱정이 많은 편인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으로

스스로를 참 얽매이며 살아온 것 같다. 그래서 늘 자신감도 떨어지고,

더 잘할 수 있음에 긴장하고 실수하는 일도 다반사였다는 것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지난 일에 대한 후회도 물밀듯이 밀려들었다.


내가 그때 이랬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일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용기를 내었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이든 결단을 내지 않으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중고 위인전으로 집을 쌓아놓고, 그 안에 누워 책을 즐겨보던

일곱 살 꼬맹이는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한글을 깨치고

국민학교에 입학했었다. 책을 좋아하던 성향 때문인지 자연스레

글 쓰는 것에도 관심이 많아졌고, 일기는 무조건 한 장을 넘겨써야

직성이 풀렸었다. 심지어 글을 잘 쓰고픈 욕심에 아빠께 글짓기학원을

보내달라고 졸랐던 기억도 난다.


가부장적 결정체였던 아빠는 절대 보내주지 않으셨고, 글 쓰는 사람이 되면

밥 굶어 죽는다며 어린 마음에 비수를 꽂기도 하셨다. 그 이후 나는 반발이라도 하듯이

교내 글짓기대회나 독후감 쓰기 대회에서 수상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지만 아빠는 단 한 번도 잘했다고 말로 칭찬해 주신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돼지갈비 외식으로 에둘러 표현하신 것 같다.

겉으로는 절대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속으로는 자랑스러워하셨으리라...

묵묵부답 아빠의 사랑법이었다는 걸 철이 들면서 이해하게 되었다.


누구보다 실전에 약했던 나, 처참하게 망친 수능시험 탓에 많이 속상했던 나보다

아빠께서 더 속상하다 못해 눈물을 흘리셨던 걸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실망감에 빠진 아빠께 죄송한 마음에 썼던 편지가 돌고 돌아 우리 집 서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자연스러운 이끌림처럼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라디오가 일상이던 그 시절.

휴학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라디오의 또 다른 묘미에 빠져들었다. 주변 지인들과의

일화를 사연으로 보내면 선물을 받는 일이 많아졌고, 막연하게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 간절한 꿈이 소심한 나를 변화시키고 결단 짓게 만들었다.

졸업을 하기 전에 학원선생님으로 직장 생활을 하느라 대학졸업식에도 가지 못했던

나에게는 늘 가슴 한편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었다. 바로 방송작가가 되고 싶은 열망이었다.

결국 부모님께 나의 꿈을 끊임없이 설득하였고, 스물여섯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방송아카데미에 다니며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이었다.


4년 차 방송작가로서의 치열함에 빛을 잃어가던 어느 날,

몸도 마음도 막연히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안정적인 울타리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정신없는 연년생 육아로 글 쓰는 건 물론 책 한 권도 읽을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었고,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내 마음속 공허감도 함께 커져갔다. 아직도 방송현장에서 일하는 선후배들을

만나고 오는 날이면 내 마음은 더욱 텅 빈 껍데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내 마음속 열정을 또다시 후회로 물들이지 않으려면, 단 한 줄이라도 쓰기 시작해야 함을...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를 위해서

오늘부터 온전한 글쓰기를 서서히 시작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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