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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 솔 Oct 09. 2024

아들은 왜 이런 옷만 골라 입을까?

애가 참 특이하네...라고 생각했나요?

강렬한 제목에 이끌려 들어온 여러분, 잠시만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아들 딸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게 나의 진심인데, 그것이 전해지려면 내 입장을 아셔야 할 것 같다는 게 이 나의 짧은 식견이다. 그러니  짧게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진짜 짧은 내 이야기

나는 어려서부터 옷이 좋았다.

멋진 옷을 입고 밖에 나가는 날이면, 누군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쳐다봐주지 않아도 홀로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그때부터 옷이란 건 내 삶의 체인오일과 같은 것이다.

없어도 내 삶은 삐그덕 삐그덕 굴러가지만, 있으면 더욱 윤활히 굴러간다. 나에게 있어 옷이란 삶에 달라붙은, 취미를 넘어선 무언가이다.


그러면서도 일가친척 가족 어르신분들께 들었던 클리셰와 같은 것이 있다. 내가 어김없이 개성을 담아 옷을 입고 나갈 때면, "그런 옷은 어디서 파니?"부터 해서 "오늘은 ~~ 처럼 입었네?" 같은 말들을 듣는 게 그것이다.

아, 여기서의 ~~ 란 주로 만화캐릭터나 개그맨들이다. 비통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조소 섞인 한 마디들이 쌓여 일종의 반항심이 되고, 조금 더 개성 있게, 뚝심입게 입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귀여운 반항심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런 어른들의 일침들 하며, 나의 귀여운 반항심까지. 멀리서 보면 귀여운 추억임에 틀림없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저 엄격하게 갈라진 두 그룹은 서로가 한탄스러우리만치 답답하고 촌스럽다. 이것은 나의 감상이기도 하다. 저때는 정말 답답하고 진지하게 화나는 일도 많았는데, 나름 성인이 되어 내가 돈을 벌고 옷을 사입을 수 있는 시기가 되니 화는 자연스럽게 누 그라 들어 금세 사라졌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냐면...


난 저 속에서 살아온 사람이며, 23살 한창때인 나이에, 옷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카페나 돌아다니는 전형적인 mz세대인 대학생이다.

다만 내가 책을 좋아하고, 글에 울림을 받고, 남몰래 타인을 분석하고,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그런 음흉한 괴짜라는 점만 빼면 말이다.


그래서 난 이 절묘한 포지션을 이용해서, 30~50대의 이용자가 타 커뮤니티에 비해 굉장히 활성화된 이 공간에서, 자녀를 가진 독자 여러분들께 그들에게 향하는 징검다리를 놓아드리려고 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던가? 적을 알면 상대도 쉬워지는 법이다.(물론 자녀는 적이 아니다.)

다만 하나를 알고자 하면, 그것을 만들어낸, 혹은 그것에서 파생된 하위 개념부터 천천히 이해하여 올라가야 하는 게 정석 아니겠는가? 대체 왜 '아들 딸을 이해한다'라는 결심이 옷으로 향하게 되는 걸까? 또 그걸 왜 동년배가 아니라 나 같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듣는 게 대체 왜 좋다는 걸까?


그 물음은 이렇게 답해진다.




변화가 어려운 것은 자연스럽다

나에게 어른이 되는 과정이라는 것은 참 실패의 연속과 같은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이를 들어간다는 것은, 아직은 실패의 경험을 쌓는 단계에 있는 것 같다.

때문에 10대 때는 막연히 슈퍼맨이었던 아빠는 어느새 한 명의 인간으로 입체성을 보여주고, 그러다 보니 교육자건 경찰이건 간에 자신의 일에서 실수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그냥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세상은 자신의 데이터베이스에 없는데, 그러니 경험도 실패도 해본 적이 없는 분야인데, 어떻게 나이를 더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더 잘 알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내가 아는 어른이라는 자리는 그런 핑계로 자신의 일을 내려놓을 있는 자리가 아니다.

부모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이 모르는 분야라도, 최선을 다해 알려주고, 자녀를 바른 길로 이끌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기술은 곱에 곱을 더하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첨예히 발전하고, 아날로그 세대의 인식은 그에 따라가기 힘들다.


기술이 곧 사회를 이루는 기반이 된다. 기술이 변함은 사회의 변함, 이것은 곧 가치관의 변화를 의미한다.


가령 구석기시대엔 가족단위의 움직임은 생존율을 올리고 노동과 수렵의 효율을 극대화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므로 다산은 다양한 측면에서 유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엔 어떠한가? 생존이 보장된 지금은 그것을 넘어 개인의 자아실현과 인생을 좌지우지할 무언가를 각자가 정해 살아간다. 그러한 측면에서 출산은 유리하지도 불리하지도 않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가치관에 따른 선택의 영역으로 갔다. 때문에 다양한 제도의 영향도 있겠으나, 작금의 사회는 저출산의 방향으로 유도되고 있다. 대한민국 출산율 지표의 동향이 그것을 보여준다.


모든 그래프가 완만하진 않다. 노력도 그러하며 기술은 더더욱 그러하다. 기록이 가능한 글의 형태가 잡힌 그 어느 순간부터, 우리의 지식과 노하우는 점점 쌓여, 과학이 되고, 첨단 과학이 되고, 이르러 그 기하급수적인 발전은 인공지능의 인간 추월을 의미하는 기술적 특이점을 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기술은 더욱 빨리 발전하고, 인간의 인식은 이 것을 그에 맞춰 좇고자 노력해야 한다.

우리를 감싼 것이 달라지고, 불편하던 게 편해지고,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줄어드는 직장이 생겨나는 와중에, 우리가 이전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태블릿을 대여섯 살 적부터 보던 세대와 20~30대가 되어서야 처음 만져본 세대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을까.

그들은 펜을 잡기 시작한 순간부터 태블릿으로 공부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말이다.



이러한 장황설은 이 한마디를 위해

그래서 말하고 싶은 건데,

"당신의 자녀는 아마 독특하지도, 특이하지도, 이상하지도, 유별나지도 않을 것이다."

여러분은 태어나자마자 스마트폰이 있는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

전기차와 자율주행 자동차가 당연히 도로에 있는 거라 여겨본 적이 없다.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면, 우선 흠칫하여 기존 상식과 대조해 본다. 인간에게 있어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그렇기에 당신은 흠칫하지 않곤 자녀를 이해할 수 없다. 어쨌든 자신의 상식과 부딪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틈을 벌려놔야 한다. 위에서 말한 큰 변화의 흐름에 따라, 아이들은 크게 변하고 있기에.


아이들은 더 이상 대기업에 들어가 홀로 4인 가족의 가장이 될 수 없다.

4년제 인서울 대학을 들어가면 안정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보장할 수 없다.

결혼을 하는 시기는 30대로 밀린 지 오래다.

죽을 때까지 돈을 모아도 서울 양지바른 곳에 집을 살 수 없다.

수능은 종말을 논하고 수학학원들은 초등학생에게 의대 예비를 논한다.

그리고 그 수학학원이 망하고 들어선 것을 보니 댄스학원이다.


아이들에게 서로의 계급을 암묵적으로 형성시키는 건, 옷과 외모가 되었고, 사는 아파트가 되었다. 핸드폰을 잠깐만 열어도 멋진 여성이 눈에 밟히니 2차 성징이 빨리 오는 여자아이들은 대학생처럼 옷을 입기에 이르렀다.


당신이 살던 세상의 잔재는 아스라이 천천히 무뎌지다 이내 사라지는 시점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에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날 것이다.

그 시점이 당신에겐 지금 일지 또 모르는 일이다.


아이들은 이제 너무 이른 시기에 너무 많은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정보기술의 발전은 그 은밀한 구석의 누수를 미처 발견하지 못하기 일쑤다. 아이들은 자극과 조숙에 노출되어 있다.

이것을 저하시키고 빈도를 줄일 순 있지만 아이들을 그곳에서 완전히 격리시킬 순 없다. 작금의 사회에서 인터넷이나 sns와 같은 미디어에 대한 적응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올바른 사회 적응을 훼방 놓는, 절대로 해선 안 되는 일이다. 이제 교육을 위해선 다름과 변화를 인지하고 그것에 맞게 나의 태도를 바꿔보는 수 밖엔 없다.


그래서 난 굳이 구태여 옷을 들이밀었다.  돈도 관계도 유행도 무엇도 아닌 굳이 그 옷 말이다.

이 넘치는 정보의 바다에서, 아이들은 선입견이 생기기 쉽다. 그것은 편견 없이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굉장히 순수한 기제다.

때문에 미디어에서 소위'찐따'라고 묘사되는 축에 속하는 액세서리나 옷을 입은 사람은 금세 그런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취급은 분명히 무언가 뒤틀린 가치관이나, 불화의 씨앗을 제공할지도 모른다.

설령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 이 흐름을 알아채고 아이에게 좋은 옷을 입히려고 하더라도, 여러분이 알고 있는 정보는 평균적으로 나이키, 아디다스, 뉴발란스와 같은 브랜드, 조금 더 알아보았다면 무신사의 존재와 지오다노, 스파오 톱텐 등의 SPA브랜드쯤이 될 것이다.(물론 이것은 패션 분야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에 대한 이야기이며, 예외는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있는 옷만으로도 좋은 코디는 할 수 있다. 훌륭한 구매처들이다. 다만 여기서 개입되는 게 19XX년생 여러분들과 20XX생 자녀의 미감이라는 게 문제다.

이 둘의 미감은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추후 더 자세히 다루고 자하지만, 간략히 말하면 유행이라는 게 크게 도는 것이기 때문에, 서로의 촌스러움과 세련됨이 양극에 서있는 두 세대도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것을 알려주고 싶다.


나의 아버지는 교육자이다. 그리고 난 아버지의 교육의 장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나는 그 안에서 커가며, 세대라는 것이 더 이상 내가 알던 간극이 아니라 빽빽하리만치 짧은 간격으로 그 구분을 형성할 수도 있겠다는 것을 느꼈다.

이 빽빽한 세대가 각기 다른 유행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 역시 숨이 막히고 막막하여 그들을 이해하기를 포기했을 것 같다.

만약 대한민국 감각 있는 젊은이들의 패션 지향점이 '유행을 알고 그것에 영향을 받지만, 유행에 맹목적으로 이끌리진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다시 말해, 유행하는 옷이나 핏, 특정 아이템들은 있지만 그 자체가 아닌 그것에서 새어 나오는 특정 느낌이라는 것만 이해하면, 그 안에선 내 개성의 표출이나 아이템 선택이 훨씬 자유롭다.

한마디로 이해 가능한 영역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패션에 대한 관심과 동경이 커 짐으로 인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옷을 못 입었을 때 소외될 가능성도 있지만, 옷을 잘 입는 것만으로도 별 행동을 하지 않아도 아이들 입장에서 '주류'로 해석되어 편안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갖고 학업을 이어갈 가능성 또한 있다는 것을 놓쳐선 안 된다.

마치 깨진 유리창의 법칙처럼 말이다. 이미 깨진 유리창이 있는 곳은 몇 번 더 깨고 발로 차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만, 외관이 주류를 표방하는 인간은 괜스레 건들기가 망설여지는 법이다. 일종의 전략과도 같다. 학창 시절의 기억은 인생 전반에 걸쳐 기억될 정도로 강렬한 것이다.


때문에 나는 앞으로, 다양한 소재를 통해 자녀에게 어떤 옷을 선택하고 권유하면 좋을지를 여러분께 말해보려고 한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설득이 되셨다면,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같은 돈을 씀에 있어 다른 이들과는 비교 못하게 큰 효율을 내기 위해, 내가 앞으로 쓸 글들에도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동년배 커뮤니티에선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을, 내가 최전방에서 총탄을 맞으며 여러분께 알릴 테니.




사진출처:[Bogue Runway] Balenciaga resort2025/Balenciaga pre fall 2024/ wooyoungmi men's wea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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