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1.
“조심스레, 함께 걷는 길”
병이 시작된 순간부터
아빠와 함께 걸어온 시간들.
넘어진 날도, 걸어낸 날도,
모두 조심스럽고 애틋했던.
몸은 아팠지만, 마음은 함께였던 길.
조심스레, 함께 걷는 길
Chapter 1. 멋쟁이 아빠의 느려진 걸음
Chapter 2. 멈추지 않으려는 걸음
Chapter 3. 스쿠터 위의 아빠, 킥보드 위의 나
Chapter 4. 조금 가까워진, 우리 사이
Chapter 1.
멋쟁이 아빠의 느려진 걸음
아버지는 늘 ‘멋’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 깔끔한 셔츠,
언제나 구두에 윤이 나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멋쟁이’이라 불렀다.
그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건강했고, 자신감 있었고,
언제나 중심에 서 있던 사람.
엄마와의 사이에는 어린 마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있었지만,
그 역시 아버지의 모습 중 하나로
내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 팔을 떨기 시작했다.
다리 한쪽은 조금씩 땅에 끌렸고,
걸음걸이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우리는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 나이 들어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스쳐 넘겼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겨우 넘어오셨고,
응급 시술은 성공적이었다.
우리는 안도했다.
큰 고비를 넘겼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때부터였다.
아버지의 몸은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리 끌림은 더 뚜렷해졌고,
말수가 줄었고, 표정이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아버지는 또 한 번 쓰러지셨다.
이번엔 뇌경색이었다.
응급 치료 도중 아버지에겐 심정지가 찾아왔고
의료진은 곧바로 자동심장충격기(AED)를 사용해
아버지의 가슴에 전기 충격을 가했다.
몇 차례의 충격 끝에 멈췄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정지는,
아버지의 뇌에 산소를 빼앗아갔고
산소 부족은 아버지의 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아버지에겐 ‘파킨슨 증후군’이라는 병이
‘소뇌 위축증’과 함께 찾아왔다.
가장 빠르게 진행된다는 비정형 파킨슨 유형이었다.
진단을 받고 단 2년.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버지는 걷지 못하게 되었고,
혼자 앉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몸은 계속해서 굳어갔고,
그 경직 속에서 아버지는 점점
이전의 그가 아니게 되어갔다.
침대에 누운 채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간.
그건 아버지에게도,
그를 지켜보는 우리에게도
너무 조용하고, 잔인한 변화였다.
한때 멋쟁이였던 아버지.
남보다 한 발짝 앞서 걸었던 그가
이제는 침묵 속에서 아무 말 없이 누워 계셨다.
Chapter 2.
멈추지 않으려는 걸음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은 이후,
아버지는 빠르게 진행되는 소뇌 위축증과
핵상마비까지 겹쳐 몸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경직되어 갔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어떤 날보다 강한 의지로
매일을 살아내셨다.
걷는 것이 힘들어지고, 말하는 것이
어눌해져도 아버지는 스스로 운동하려 애쓰셨다.
걷다가 넘어지고, 넘어져 얼굴에 상처를 입고,
무릎이 까지고 피가 나도 다시 일어나려 하셨다.
어느 날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갑작스레 다리에 마비가 와
길 한복판에 쓰러지셨다.
일어날 수 없던 그 순간, 지나가던 행인이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렇게 아버지는 경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날, 아버지는 조용히 웃으셨다.
“창피하다”며 농담처럼 넘기셨지만
우리는 그 웃음 뒤에 숨은 체념과 슬픔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했다.
걷기 연습을 도왔고, 양손을 잡아드리며
아기들의 걸음마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버지의 걸음을 지지했다.
그 모든 시간은 희망을 붙들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의지로 버텨보려는 사투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몸은 그 노력만큼
응답해주지 않았다.
움직임은 더 느려지고 몸은 더 굳어갔다.
의지는 선명했지만, 현실은
잔인하게도 점점 더 아버지를 침묵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나는 기억한다.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서려 했던 그날들.
몸이 아닌 마음으로라도 걸으려 했던 아버지를.
그 모습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 힘겹게 흔들리는,
그러나 결코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처럼 남아 있다.
Chapter 3
스쿠터 위의 아빠, 킥보드 위의 나
걷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던 어느 날,
아버지는 노인 보행기 대신 노인 전동
스쿠터를 타기 시작하셨다.
처음엔 많이 속상했다.
“이제는 걷는 건 더 어려울지도 몰라요”
의사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고,
아버지의 눈빛엔 잠시 머뭇거림이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금세 결심하셨다.
“그래도 집에만 있을 순 없잖아”.
늘 밖을 좋아하셨던 분 답게 스쿠터를 타고,
바람을 맞는 일이 그나마 남은 자유 같았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쉬는 날이면 늘 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곳곳을 함께 달렸다.
문제는 스쿠터는 느린 듯했지만 은근히 빨랐고,
나는 종종 숨을 헐떡이며 뒤따라야 했다.
그래서 결국,
나는 전동 킥보드를 하나 샀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스쿠터,
나는 킥보드를 타고 동네를 함께 누비는,
어쩌면 조금 특이한 ‘산책 친구’가 되었다.
김밥 두 줄을 사서 햇살 좋은 공원에 도착하면,
그늘 아래 나란히 앉아 말없이 김밥을 나눠 먹었다.
아버지는 김밥을 꼭꼭 씹으시며 말했다.
“이렇게라도 나오니까 숨통이 트인다”.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괜히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그날의 하늘,
그날의 바람,
그리고 나란히 앉은 아빠와 나.
몸은 아팠고 마음은 지쳤지만,
그 순간만큼은 참 평화로웠다.
아버지가 병에 잠식되어 가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그렇게,
소풍처럼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내고 있었다.
Chapter 4.
조금 가까워진, 우리 사이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셨다.
무뚝뚝하고, 표현 없고,
언제나 말보단 행동으로 모든 걸 대신하시던 분.
특히 나와는 어쩐지 좀 어색했다.
언니나 남동생과는 스스럼없이
어울리시던 아버지가,
유독 나와는 선이 그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라는 건 때로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어딘가 뻘쭘한 거리감이 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아프고 나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픈 아버지 곁을 자주 머물렀고,
약해진 그 모습이 낯설고도 마음 아파서
더 많이 다가가려 했다.
그 노력 때문일까.
아버지도 점점 마음의 문을 열어 주셨다.
어느 날,
무뚝뚝하기만 하던 아버지가
엄마와의 연애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손 편지를 써서 몰래 전해주던 이야기,
우리가 어렸을 때 웃지 못했던 고생담까지.
그 낯설 만큼 다정한 기억들이 아버지의 입에서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아, 이 사람도 참 많은 감정을 꾹 눌러
담고 살았구나.” 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어느 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가 갑자기 말했다.
“맥주 한 잔 할래?”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는 나에게
아버지는 말없이 맥주를 따르고,
조심스레 내 잔을 채워 주셨다.
툭 건네진 맥주 한 잔.
말없는 그 한잔에 수많은 감정이 녹아 있었다.
가까워졌다는 안도감,
이제야 나누는 진짜 가족 같은 온기,
그리고..
오래는 못 마실 걸 아는 듯한 묵직함.
잔을 부딪히진 않았지만,
그날의 맥주는 오래도록
내 가슴 깊은 곳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