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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하야오를 위한 변명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2023) 리뷰

by 테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제96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이어 오스카를 두 번 거머쥔 영예로운 감독이 되었다. 수상을 두고 경합한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는 아쉽게 무관에 그쳤는데, 마일스 역을 맡은 성우 셔메이크 무어가 본인의 SNS에 "Robbed"라는 표현을 써 논란을 빚었다. 개인적으로 스파이더맨을 3회차 관람했을 만큼 애정하는 터라 수상 불발이 아쉽긴 하나, 이번 시상에는 하야오를 향한 공로상의 의미도 담겨 있을 거라 본다. 무엇보다 함부로 강탈당했다는 말을 뱉을 정도로 우스운 영화가 아니다. 정 우스워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고.


하야오 감독이 은퇴를 번복하고 10년 만에 발표한 복귀작이기 때문일까, 영화에는 혹시 마지막 작품이 될지 모른다는 조급함이 역력히 배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만들지 않고 끝낼 수는 없다 생각하여 돌아왔다고 밝혔는데, 그가 전쟁세대로서 지닌 죄의식과 그에 대한 속죄, 지난 인생에 대한 변명과 성찰을 반드시 작품에 남기고 떠나야만 한다는 말로 들린다. 관객에게 불친절한 영화지만 감독의 인생을 투영한 자전적 영화임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덧 말년을 맞이한 거장은 그의 인생과 작품 세계를 돌아보고 결산하는 자서전에 그 이면과 어둠까지 숨기지 않고 담았다.


명료하고 확실한 메시지를 선호하는 관객은, 영화가 지닌 특유의 난해함에 난색을 표할 것이다. 내러티브 대신 추상적인 이미지 나열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시대적 배경을 특정하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연대기적 순서와 서사의 논리성보다는 하야오가 그동안 쌓아 올린 예술 세계의 시각적 재현에 힘을 쏟는다. 이러한 방식에 대한 기호는 각자 다르겠지만, 선택은 분명 적합했다.


하야오는 전쟁특수를 누리며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군수업이 가업인 미아쟈키 일가에서 군용기의 부품을 조립하는 광경을 보며 자랐고, 일본이 패전한 후에도 끼니마다 꼬박꼬박 쌀밥을 먹었다. 우리는 패전 이후 일본의 경제 회복이 6.25 전쟁특수 덕분이었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전쟁의 시대상을 담백하게 관조하며 개인의 양면성을 조명하는 작품의 화법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전쟁 영화지만 전투 장면이 하나도 없는 <덩케르크>처럼, 전쟁의 실체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피가 시각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오직 마히토가 자해했을 때 뿐이다. 전쟁을 배경으로 두면서도 현실을 벗어나 판타지 세계에 몰두하는 영화는 모순으로 가득한 하야오의 '인생 고백'과 같다.


그가 철이 들면서 아버지와 자주 다퉜다는 일화는 익히 알려져 있다. 이전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전쟁부역자인 아버지와 그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자란 성장 배경에 대한 부끄러움 또한 반영되었다. 이번 작품의 특별함은, 마지막을 직감한 하야오 감독이 지난 삶을 반성하며 미래 세대에게 최후의 부탁을 보냄에 있다. 반전을 외치는 그가 정작 누구보다 전쟁의 이점을 맘껏 누렸다는 것. 하야오 본인만큼 그 모순을 뼈저리게 감각하고 살아온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기성세대로서 종전 후 올바른 방향으로 나라를 이끄는 데 일조하지 못했다는 반성은 물론, 자국의 상황에 개탄하며 끊임없이 자성의 목소리를 내왔다. 지브리의 얼굴로서 정치 선전의 앞잡이가 되어 눈과 귀를 닫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전쟁특수를 톡톡히 누린 전범국의 애니메이션 감독이 외치는 반전주의는 자기기만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하는 수 없다. 그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길 터다. 그가 이번 작품에 담아낸 속죄는 타인에게 용서를 갈구하기보다, 긴 여정 끝에 비로소 자기 자신을 용서하겠다는 각오이다.


하야오가 소년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자신의 유년기를 토대로 페르소나를 만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린이는 유일하게 조건 없이 용서받을 수 있는 존재다. 성장하는 존재다. 지금도 소년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하야오는, 더 나은 인간됨의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고 믿는다. 우리는 돌로 자해하는 마히토에게서 비겁함과 이중성을 목격했다. 동급생에게 집단린치를 당했다고 솔직히 털어놓기엔 분이 풀리지 않고, 돌멩이로 맞았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그래서 마히토는 길에서 넘어졌다는 또 다른 거짓말로 일관한다. 하야오는 마히토의 모순적이고 방관적인 자세를 곧이곧대로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비겁함을 고백한다. 그는 전쟁부역자라며 아버지를 비난하면서도 그 집안에서 모자람 없이 자랐고, 애니메이터가 되어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영예를 누렸다. 소년의 이중성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는 것은 그가 가진 죄의식을 덜어내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며, 내일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굳건한 태도에 기반한다.


어떻게 살 것이냐는 질문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전하는 하야오의 고해성사이며, 앞으로 세상을 꾸려나갈 후세대가 구세대와는 다른 선택을 하길 바란다는 진실한 바람이다. 지브리 스튜디오는 패전 후 급격한 경제적 성장을 맞은 일본의 정치사회적 맥락을 묘사하면서도, 현실의 논리에서 벗어나 순수한 동심을 탐구하려 애썼다. 끔찍한 전쟁 범죄를 일으킨 나라의 국민, 그 전쟁 덕에 풍요로운 유년을 보낸 노인은 한낱 동심에 인생 전부를 바쳐왔다. 가련한 자기연민을 주제로 낭만을 부르짖는 작태가 어찌 기만으로 보이지 않겠는가. 그는 비판하려면 얼마든지 하라는 듯 자신의 모순됨까지 영화에 가감 없이 담아냈다. 맹목적인 낭만주의는 마히토의 행적에 고스란히 녹아있기도 하다. 이세계와 현실이 난립하고 앵무새가 식인하는 미친 상황에서도 마히토의 머릿속은 오로지 새어머니를 구출해 돌아간다는 일념으로 가득하다.


하야오의 작품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전쟁특수를 누린 일본인이 예술로 밥벌이한다는 사실 자체가 큰 책임이다. 그가 문화예술계의 아이콘으로서 끼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어쩌면 예술가로서의 위상 이상으로 막대할지 모른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창설된 이래 지난 수십 년간 아무리 아나키즘을 표방하며 탈정치적인 정체성을 추구해 왔다 한들, 대중은 그의 작품을 온전히 독립적인 하나의 창작물로 보지 않는다. 하야도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의 창작물은 현대 일본을 둘러싼 거대 담론, 정치 우화에 등극하고 마는 것이다.


수많은 청년이 강제징용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무의미한 죽음을 맞는 상황에도, "통조림은 맛없다"라며 반찬 투정을 할 수 있었던 삶이 특권이었다는 것을 하야오는 안다. 원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온 노인의 부디 깨어 있으라는 호소가 모순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전하려 한다. 행여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더욱 필사적이다. 이마저도 위선적인 설교로 느낀다면? 역시 하는 수 없다.


우리가 한국인이어서일까? 전쟁에 대한 책임의식과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빙빙 돌려서 말하는 하야오 특유의 완곡함이 아쉽게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렇게 할까? 하야오의 작품 세계가 비행에 대한 로망과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으로만 점철하지 않고, 반전과 평화를 향한 염원 또한 꾸준히 강조했다는 사실은 되려 평가받지 못하는 듯하다. '직접적인 표현의 부재'를 지적하기 전에, '표현이 전무하거나', 술 더 떠 '과거를 왜곡하는' 자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신의 추한 부분까지 담은 진솔함에 존경심을 표한다. 그러나 이 영화에는 단점이 참 많다. 2시간 남짓한 시간에 인생 전체를 담으려 했던 탓인지, 지브리와 하야오의 이미지는 착실히 입혔으나 캐릭터의 매력과 개별 서사의 설득력은 부족하다. 부끄러운 모습도 세세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의식과는 대조적으로, '소년 하야오'를 투영한 주인공 마히토는 감정 표현을 극도로 피한다. 한 차례의 자해를 제외하면 딱히 잘못을 저지르는 장면도 없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마히토는 이미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물로 보일 정도다. 그는 갑작스럽게 이세계로 떨어진 이후에도 무슨 대수냐는 듯 멀쩡하게, 성실하게 행동한다. 미숙함보다 조숙함이 돋보이는 캐릭터에 매력이 부족한 건 당연지사다. 후반부에 이르러 새어머니를 '어머니"호칭하는 전개 외에는, 성장을 이루는 장면도 찾아볼 수 없다. 주인공 마히토와 내러티브 사이의 애매한 거리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주인공의 입체성이 미흡하다 보니, 나머지 등장인물도 무거운 주제 의식 근처를 어설프게 맴돌다 적당한 시점이 되면 퇴장하는 데 그친다.


특히, 서사의 원동력이 되는 인물인 히미의 빌드업이 부실하다는 점은 작품의 완성도를 떨어트릴뿐더러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단점이다. 히미는 마히토의 현실 세계 시간선으로 함께 돌아가는 대신, 자신이 마히토를 낳은 이후 화재로 죽은 원래의 시간선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언젠가 화재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 걸 알면서도 "너를 낳는 건 멋진 일이잖아"라며 마히토와 작별하는 장면은, 서사의 부재로 인해 감동적인 모성애가 장식하는 화룡점정이 되지 못했다.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히미는 다시 태어나도 지브리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하야오 감독이, <모노노케 히메>의 명대사를 연상케 한다. 살아라, 비록 예술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이렇게나 아름답지 않은가.


왜가리: 야, 마히토. 저쪽에 일어났던 일을 다 기억하고 있는 거냐?
마히토: 당연하지.
왜가리: 그럼 안돼. 잊어버려.
마히토: 왜?
왜가리: 보통은 다 잊어버리거든.


집으로 돌아온 마히토에게 왜가리가 전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는 "보통은 다 잊어버리니까 너도 잊어버려"다. 이 대사를 거짓말쟁이의 역설로 뒤집으면 "모두 잊더라도 너만은 잊지 마"가 되는데, 마히토는 왜가리를 거짓말쟁이로 생각하지 않나. 작품을 보는 내내 하야오가 마지막 작품일 가능성을 상정하고 만들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왜가리의 입을 빌려 작품에 유언을 남겼다고 짐작한다. 늙고 병들어 제대로 날지 못하는 왜가리, 노인이 될 때까지 일평생 비행을 동경한 소년. 예술로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한 거짓말쟁이 하야오. 그가 미래 세대에 전하는 최후의 한 마디, "과거를 잊지 말라".


다소 이른 유언을 남긴 그는 자신이 건설한 세계로의 영원한 회귀를 선택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어도 다시 만화가가 되어 만화를 그리고, 영화 감독이 되어 애니메이션을 만들 거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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