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오브 인터레스트 (2023) 리뷰
우리는 로다주와 엠마 스톤의 패싱 논란에 묻힌 용감한 수상소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난 3월, 조나단 글레이저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소감에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희생자를 언급하며 모든 갈등과 비인간화에 반대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음을 밝혔다.
유대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관련 발언은 할리우드의 금기사항으로, 커리어를 걸어야 할 정도로 큰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다. 차분하고 당당한 어조의 목소리와는 대조적으로, 원고를 든 손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떠는 모습이 그가 품은 원대한 용기의 크기를 가늠케 했다. 시오니스트인 총괄 프로듀서 대니 코헨을 앞에 두고 한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이 영화는 그런 용기를 양분 삼아 만들어졌다. 역사를 엄중히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반성하고 돌아보기 위해’ 평범한 인간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변모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우슈비츠의 저택, 루돌프 회스가 입은 새하얀 제복은 ‘밝은 악’의, 굶주린 수감자를 위해 밤마다 사과를 숨겨두는 소녀는 ‘어두운 선’의 표상이 되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영화는 시작부터 암전된 스크린과 함께 기괴한 사운드만 들려줌으로써, 아우슈비츠 학살의 시각적 묘사 대신 청각적 간접 경험만 허락하는 영화의 방식을 예고한다.
소녀를 열화상 카메라로 촬영한 이유는 무엇일까? 글레이저 감독은 영화 제작 과정에서 아우슈비츠 옆 어떤 마을의 할머니를 만났고, 그가 영화 속 소녀처럼 밤마다 작업장 근처에 잠입해 음식을 숨겨두고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 이야기를 영화에 넣으려 했으나 조명을 최소화한 촬영 세팅 때문에 밤 촬영이 불가했던 관계로, 열화상 카메라로 소녀를 찍게 된다.
회스 가족의 단란한 저택과 화사한 정원의 풍경은 한 줌의 그림자조차 없이 선명하다. 마치 우리네 일상에 악이 끼어들 여지는 추호도 없다는 듯.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수용소 옆에 자리한 저택의 경관은 그림자 없이 선명하며, 인위적으로 대칭적이다. 마침내 얻어낸 안온한 일상을 방해할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돈된 시각적 형상을 응시하던 관객은 끝없이 울리는 총성과 비명을 이미 일상으로 체화한 인물들의 무감각을 인지한다. 이러한 청각적-시각적 서사의 불일치는 회스 일가의 뻔뻔한 태도, 나아가 나치의 비인간성이 평범한 가정으로 틈입하는 과정을 부각한다.
내러티브의 주체가 청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수용소의 ‘벽’은 영화가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명명백백한 증거가 된다. 벽은 곧 영화관의 스크린이나 다름없다. 관객은 늘상 내러티브를 성실히 따라가다가도, 결국 영화가 끝난 뒤엔 모든 이야기를 하나의 스크린(벽)을 두고 일어난 남의 이야기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4의 벽’은 영화가 끝날 시점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소한 균열과 함께 나지막이 붕괴한다.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루면서 현대의 관객에게 자성을 요구한다. 이는 한나 아렌트가 주창한 개념인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 그동안 빈번히 오역되고 남용되어 왔다는 사실과 큰 관련이 있다. 평범한 사람도 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단편적 명제로 착각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평범한 악이란 자신이 저지르는 행위를 성찰하지 않거나, 선악을 구별하는 판단 능력이 결여되었거나, 자기합리화를 통해 악행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등 비이성적으로 ‘평범한 척’하는 상태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회스 일가의 일상과 아우슈비츠 저택의 광경은 그야말로 악의 평범성 그 자체다. 시도 때도 없이 들려오는 비명과 총성, 시체를 태우는 소각장의 연기를 애써 무시하고 화목한 일상을 누리려 몹시 애쓰고 있으니. 그렇게 영화는 피해자가 겪은 참상을 보여주기보다 악과 비인간성이 일상으로 전이되는 추악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전시한다.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한 회스는 고위 장교들이 한데 모인 파티장을 내려다보며 가스실의 수감자들을 어떻게 잘 죽일지 고민한다. 관료적 직업 정신에 투철한 살육 전문가 회스에게 가스실 집단학살의 광경과 파티장의 풍경은 소름 돋을 정도로 차이가 없었다.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의 홀로코스트 연구 서적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넷플릭스에서 시청했다. 홀로코스트에 가담했던 101예비경찰대대의 호프만 대위가 학살을 할 때마다 위경련과 설사에 시달렸다는 책 13장의 내용이 다큐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주목할 점은 그가 병을 숨기면서까지 임무에 참여할 만큼 성실한 권력의 개였다는 사실이다. 자아도 인식하지 못한 악을, 신체는 명확히 인식했던 것이다.
영화의 엔딩으로 이어지는 회스의 구토는 호프만 대위의 이상한 병처럼, 악을 마주한 신체의 본능적 거부 반응일지 모른다. 악행을 숨 쉬듯 일삼는 인면수심의 악인에게도 일말의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걸까? 영화는 현대의 박물관 씬으로 순식간에 시간을 뛰어넘음으로써, 악인에게 서사가 부여될 여지를 철저히 배제한다. 말 그대로 구역질 나는 ‘악’을 후대 역사가 판단할 수 있도록 한다. 회스가 100년에 한 번 나오는 특출난 악인이어서 그런 악행을 저지른 것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악인이었으리라. 그는 악을 모조리 토해내는 대신 계단 아래 도사린 악의 구렁텅이로 내려간다.
영화 속 검은 존재들은 CCTV처럼 역사 속 인물들의 행적을 감시한다. 오프닝의 검은 화면은 시청각적 괴리를 자아낼 뿐만 아니라, 아우슈비츠의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는 게 맞냐며 현대인의 성찰 부재를 지적한다. 몇 분 동안 지속되는 암전은 마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당신을 들여다본다”는 니체의 격언을 시각화한 듯하다. 촬영 카메라 역시 집안 곳곳에 CCTV처럼 설치되어 인물의 궤적을 쫓으며 관찰한다.
이때 회스 부인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검은 개 딜라는 일련의 사건과 인물의 선악에 대해 가치 판단은 하지 않지만, 한없이 곁을 맴돌며 그들의 언행을 쭉 관찰한다. 산드라 휠러는 같은 해 개봉한 <추락의 해부>에서도 좋은 연기를 펼쳤는데, 여기 등장한 보더콜리 스눕도 내내 관찰자 역할을 한다. 딜라는 산드라 휠러의 실제 반려견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한편, 유대인을 탄압해 일군 정원을 희희낙락 거닐며 부자 행세에 소꿉 놀이하는 모녀의 탐욕적 모습은 같은 씬에서 식탁 위 음식을 탐내는 개의 모습과 영락없이 겹친다.
이 영화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과거의 수많은 미디어 매체와 영화 등을 여러 번 접한 관객을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아우슈비츠 학살을 다룬 기존 작품들은 피해자가 겪은 참극, 나치의 만행을 중심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의 경험에 의존, 전위적으로 홀로코스트를 복원했다. 전쟁을 묘사하지 않은 <덩케르크>처럼 학살의 시각적 재현을 배제함으로써 ‘보는 영화’와 ‘듣는 영화’가 엇갈리도록 제작했다. 사운드와 비주얼이 줄곧 엇갈리다 순간 교차하는 지점, 바로 존 오브 인터레스트다.
독어 원제의 사전적 의미는 ‘관심’보다 ‘이익’에 가깝다고는 하나, 중의적 표현을 넘어 관심의 비중이 더 높다고 느낀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학살을 역사 속 한 페이지로 인식할 뿐 큰 관심은 없지 않나. 영화 속 인물들이 벽 너머 학살에 관심이 없듯이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인간화를 끊임없이 경계해야 하며,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
결국 이 영화는 시대를 막론하고 ‘악의 평범성’을 함부로 논하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기만적인지 다시금 일깨우는 경고다. 평범한 사람이 악에 잠식되는 과정을 이해하고, 과오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어 있기를 촉구한다.
뉘른베르크 군사재판의 검사로 나치 전범을 처벌했던 벤자민 페렌츠가 <아주 평범한 사람들> 다큐멘터리의 엔딩에서 남긴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2022년 촬영을 마친 후, 지난 2023년 타계했다.
“우리 모두 작은 행성 하나에 사는 사람들이에요. 우리의 종교, 나라, 피부색이 다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작은 행성 하나에 사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다면 우린 성공할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겠죠. 난 할 일을 다 했어요. 100살이잖아요. 얼마나 더 오래 버틸지 나도 모르겠지만 힘닿는 데까지 계속 갈거예요. 이제 젊은이들에게 바통을 넘길게요.”
역대 최고의 홀로코스트 영화입니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카메라를 곳곳에 CCTV처럼 고정해 촬영했습니다. 넓은 아우슈비츠 저택, 탁트인 정원에 머무는 회스 일가는 사실 앵글 안에 갇혀 벽 너머 수용소의 유대인처럼 감금된 상태죠.
조나단 글레이저는 일찍이 자미로콰이의 'Virtual Insanity' 뮤직비디오에서 좁은 방 안에 앵글을 고정하고 벽과 가구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연출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를 본 뒤 뮤직비디오를 다시 감상하면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네요.
엔딩에서 계단을 내려가던 회스는 박물관 씬과 교차되며 스크린 너머 관객을 지그시 응시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는, 역사가 이미 우리를 응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회스가 관객을 바라보는 것도, 검은 개가 회스 부인을 감시하는 것도, 암전된 화면이 관객을 마주하는 것도, 저는 모두 같은 맥락에서 연출한 씬이라 믿습니다.
설령 어떤 목격자도 없고, 누구도 기록하지 않았더라도, 역사는 같은 시공간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반복될 '악'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러한 비인간화에 대한 저항, 끝없는 저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