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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2025) 만화와 영화 사이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 (2025) 리뷰

by 테리

2020년대 애니메이션 영화의 기준은 누가 뭐래도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라고 확신한다. 비주얼, 서사, 아이디어 등 모든 부문에서 동시대의 어떤 영화도 비견할 수 없다. 한 편의 개별 작품으로서 서사를 완결하며 끝맺었던 전편과 달리, 후속작의 전개를 위해 상당한 여지를 남기고 시간에 쫓기듯 급작스레 끝났다는 단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그런데, 이토록 대단한 영화가 미국 본토에서 열린 제96회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수상에 실패했다.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탓이다. 그가 영영 은퇴하더라도 우리는 그 이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귀멸의 칼날> 극장판 리뷰에 앞서 하야오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까닭은, 그래야만 하기 때문이다. 현대 일본 애니메이션들은 미야자키 하야오와 스튜디오 지브리의 파장 아래에 있다. 그렇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설령 전쟁을 배경으로 하지 않더라도, 비행을 향한 염원을 담지 않았더라도, 주인공에게 마더 콤플렉스가 없더라도 말이다.


흥미롭게도 지금의 하야오와 지브리를 있게 한 건 만화였다. 극장 데뷔작이었던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의 흥행 참패로 하야오는 크게 낙심했다. 아무리 시나리오를 들고 이곳저곳 찾아가도 실패한 감독 딱지가 붙어버린 그에게 선뜻 손을 내미는 곳은 없었고, 젊은 신인 감독은 미처 꽃피기도 전에 크나큰 좌절을 맛봐야만 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은 만화였다. 하야오는 1982년부터 애니메이션 잡지사 '아니메쥬'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그럭저럭 꾸려나갈 수 있었다. 이 시절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돌아보자는 건 아니다. 언젠가 <미야자키 하야오: 자연의 영혼>을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으리라 본다. 요지는 지브리의 태동을 이끈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극장판이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각색 영화라는 것이다. 약 두 시간가량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은 원작의 일부에 불과하며, 만화는 영화가 개봉하고도 10년을 더 연재하여 전혀 다른 양상의 결말을 맞았다.


현재 일본 영화계를 지탱하는 주체는 명백히 애니메이션이다. 현시점에 일본 영화계가 위험에 빠졌다고 말하는 건 어느덧 지겨운 돌림노래에 불과해 보인다. 이쯤 되면 또 다른 국면에 다다른 게 아닐까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를 비롯한 소수의 엘리트 감독에게 의존해 온 세월도 짧게 잡아 20년 정도 되지 않나. 시장의 다양성을 논하는 것마저 배부른 고민이다. 하물며 애니메이션 장르 내에서의 다양성도 터무니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애니메이션 영화 또한 소수의 흥행 대작에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처럼 오리지널 스토리로 도전하는 케이스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만화 원작이 인기를 끌고 수년간 팬덤이 형성되어 안정성이 확인되면, 연재분의 특정 구간을 잘라내 극장판으로 '개봉시키는' 케이스만 살아남아 영화관의 존망을 책임지고 있다. 올해 3월 국내 개봉한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부터 현재 상영 중인 <체인소 맨: 레제편>, 그리고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까지 전부 같은 케이스다. 최근 몇 년간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마인크래프트 무비> 등 애니메이션 영화들의 엽기적인 글로벌 흥행 성적을 보면, 비단 일본이나 우리나라만의 문제도 아니다. 충성도가 높은 팬덤, 특정 연령대의 관객층을 적극 공략해 리스크를 낮추고, 굿즈와 각종 이벤트를 활용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건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합리적인 선택인 것은 분명하다. 수입사나 제작사 입장에선 그렇겠지만, 단순히 오늘의 생존을 위해 다양성을 깡그리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는 점은 한 명의 관객으로서 아주 서글프다.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구조적 결함에 빠지다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국내 5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올해 국내 박스오피스 매출 1위를 달성한 데에는 4년 전 개봉한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편>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은 일반 관객에게 생소했던 원작을 대중적으로 알려 인지도를 높여 뒀기에 가능한 수치로 봐야 한다. 이에 앞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고 표현한 이유는, 두 작품의 결정적 차이에 관해 큰 불만이 있기 때문이다. 무한성편은 최종보스 무잔과의 마지막 결전으로 다다르는 과정을 3부작으로 쪼갠 시리즈의 첫 작품이다. 태생적으로 분절성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구조적 결함을 떠안고 있는데, 더 큰 문제는 영화가 단점을 보완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한성편은 전통적인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가 미약한 것을 넘어 사실상 서사가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한데, 뿔뿔이 흩어져 무한성을 헤매는 귀살대원들이 세 명의 중간 보스 도우마, 카이가쿠, 아카자와 각개 전투를 벌이는 장면을 무작위로 보여주는 식이다. 크게 세 건의 전투 시퀀스로 볼거리는 많지만, 순서가 뒤죽박죽인 데다가 흐름이 난잡하다. 귀신이 인간 시절 겪은 이야기를 보여주며 악인을 단죄하지 않고 동정심을 부여한다는 비판은 차치하더라도, 똑같은 패턴을 되풀이한다는 점만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영화는 귀살대원과 귀신을 아우르는 모든 주요 등장인물의 개별 서사를 일일이 회상하며 스스로 지리멸렬의 늪에 빠진다. 원작의 열성팬이 아니고서야, 전투-과거 회상의 패턴이 무한 반복되는 2시간 반의 러닝타임을 기꺼이 감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니, 500만 명이나 있잖아?


무한열차편은 성보다 작은 규모의 열차 안에서 벌어지는 한차례의 소동을 다뤘고, 최종보스 아카자와의 전투, 귀살대 주(柱) 렌고쿠의 희생과 탄지로의 성장이라는 소년물로서의 완결성을 갖췄다. 비록 원작의 일부분을 떼어 만들었지만, 한 편의 독립된 작품으로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기승전결을 탄탄하게 직조하였기에 관객과 평단에 고루 찬사받았다. 이와 비교한다면 무한성편은 애니메이션 영화라기보다, 차라리 '귀멸의 칼날 게임'의 지하던전 여러 전투 장면을 짜깁기한 푸티지 모음집에 가까워 보인다. 각 보스몹이 죽을 때마다 그들의 과거 회상 장면이 자동 진행되며, 플레이어는 이를 스킵하지 않고 시청해야 한다. 정말 게임이었다면 플레이라도 할 수 있지, 현실의 관객에게는 관람 외에 어떠한 선택지도 없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이 자랑하는 화려한 액션도, 입에 쑤셔 넣듯 강제로 주입한다는 감각이 강해 궁고할 뿐이다. 그러잖아도 신파로 얼룩진 사연 팔이를 연거푸 재탕하여 멀미가 날 지경인데, 관객을 설득하지 않는 외관만 화려한 액션이 대체 무슨 소용인가. '이 녀석도 사실은 불쌍한 녀석이었어'라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내세워 변주하려는 노력을 들이지 않고 정서적 동력으로 삼는 건 원작의 치명적인 단점이기도 하다. 무한성편은 이러한 단점을 보완하는 데 실패했을뿐더러, 영상 매체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아 오히려 부풀려 버렸다.


액션만큼은 훌륭하다는 착각

<귀멸의 칼날> 성공의 일등공신이 영상화로 탄생한 역동적인 액션 장면인 것만은 확실하다.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이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주요한 요인 역시 입체기동장치를 위시한 대 거인전 액션이다. 하지만, 대중적 성공과 비평은 별개의 영역이다. 자신이 이 문장을 굳건히 믿는다는 것을 전제로 용기 내어 말하고 싶다. 리바이 병장이 360도로 회전하며 짐승 거인을 도륙 낸다고 해서, 젠이츠가 번개의 호흡 제7형 화뢰신으로 옛 동료 카이가쿠의 목을 베었다고 해서 작품성을 인정해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무한열차편이 준수한 평작이라면, 무한성편은 귀살대 RPG의 무한성 던전 플레이 실황 푸티지나 다름없는 괴작, 다시 말해 망작이다. (진격의 거인 극장판에 관한 비평은 여기서는 접어두겠다.) 귀멸의 칼날 만화 단행본 액션 장면의 구체적인 컷을 가져와서 극장판과 비교하며 해체분석할 작정은 아니다. 다만, 만화의 액션 묘사와 매체 특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전개할 생각이다.


앞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사례로 만화 원작과 극장판 영화의 괴리가 발생하는 과정을 짧게 언급하였는데, 현대에는 이러한 양상이 더욱더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다. 지금의 애니메이션 영화들은 그저 '생존'만을 쫓는 하루살이가 되어버렸다. 하야오 감독은 나우시카 극장판의 괜찮은 흥행 성적으로 차기작을 준비할 수 있었고, 덕분에 그의 작업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스튜디오 지브리가 창설되었다.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천공의 성 라퓨타>, <이웃집 토토로>, <붉은 돼지> 등을 연속 개봉하면서도, 본인이 나우시카 극장판에서 해결하지 못했다고 여긴 '자연-인간 사이 대립의 근원적 해결책'을 만화 연재를 통해 10년이나 더 고민할 수 있었다. 한 명의 창작자로서 지속 가능한 예술적 고민을 투트랙으로 할 수 있었다는 것, 얼마나 큰 특권인가. 그런 권리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나우시카 만화판의 결말은 극장판에 비해 훨씬 더 염세적이며, 메시아적 존재로서의 나우시카도 없다. 나우시카 극장판과 만화는 다른 작품으로 봐야 하며 만화쪽의 완성도가 압도적으로 우월하다. 긴 세월 동안 쌓은 사유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리라. 만화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은 대부분 만화의 작품성이 더 우수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작가가 본인의 템포에 맞게 오랜 고민을 거친 끝에 작품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고 핵심 메시지를 조립해 나가는 만화 연재에 비해, 극장판은 현격히 불리한 위치에 있다. 짧은 기간 내에 원작을 각색하여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스토리를 만들던가, 각색하지 않고 단행본의 특정 구간을 그대로 살려 영상으로만 옮기던가. 전자도 후자도 결코 손쉬운 작업이 아니다. 실제로 <바람계곡 나우시카>는 개봉 당시 "단체를 위해 희생하는 나우시카는 군국주의 미화"라며 일본에서조차 거세게 비판받은 바 있다.


누군가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너무 옛날 작품이라 현대의 극장 산업 동향, 애니메이션 업계의 사정과 일본의 만화 시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단행본의 완성도와 작품성을 놓고 <귀멸의 칼날>과 동시대 작품인 <진격의 거인>을 비교한다면 어떨까. 말할 것도 없이 <진격의 거인>에게 실례를 범하는 일이다. <귀멸의 칼날>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과분한 신드롬이고, 단행본의 퀄리티와 재미는 처참하다는 게 일반적인 중론이다. 여기서 힘주어 말하고 싶은 핵심은, <귀멸의 칼날> 만화 단행본이 지나치게 무시당한다는 점이다. <귀멸의 칼날>은 현재 누적 판매 부수 2억 2,000만부로 일본 만화 역대 6위를 기록하고 있다. 2019년 4월 TVA 1기를 처음 방영하기 전까지 순위권에 들지도 못하던 단행본 판매량은, 영상화에 힘입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판매량 역대 1위인 원피스와 실시간으로 경쟁했으며, 이제는 누적으로 5위 나루토의 자리를 넘보고 있다. 애니메이션이 나오기 전까지 <귀멸의 칼날>이 보인 저조한 성적, 애니메이션 공개 이후 폭발적인 성장은 원작 만화를 비판하는 주요한 지점이 되어왔다. 애니메이션으로 유입된 팬덤이 거꾸로 만화까지 찾아오며 역수입되지 않았다면 단행본이 이정도로 불티나게 팔릴 수 없었을 거란 지적이다.


만화쪽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대게 "원작이 애당초 전투에 치중한 소년물이기에, 액션을 영상으로 구현할 수 없는 단행본은 작품성이 떨어진다"라고 입 모아 말한다. 심지어 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이건 개인적으로 아주 긁히는 포인트인데, 동의할 수 없다. 동의하면 안 된다. 원작을 초월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든 <올드보이>나 <설국열차> 같은 극영화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만화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긴 경우 원작의 중요성은 차원이 달라진다. <귀멸의 칼날> 단행본은 <강철의 연금술사>의 탄탄한 기승전결을 갖추지 못했고, <진격의 거인>만큼의 철학적 깊이 또한 없으며, <아즈망가 대왕>이나 <란마 1/2>처럼 일상물 보듯 페이지를 가볍게 넘기며 보기에도 여의치 않다. 그럼에도 TVA와 극장판이 갖추지 못한 '여백'을 갖췄다. 이것은 <귀멸의 칼날>이 지닌 고유한 장점이 아니다. 만화 매체의 특성이다. <진격의 거인>을 애니메이션으로만 접한 지인들이 "만화에는 그런 장면이 있냐"라며 자기는 원작을 보지 않아서 모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할 때, 속으로 부아가 끓었다. 자신 있게 말하건대 <진격의 거인>은 아다치 미츠루 이후 만화 매체의 여백을 가장 잘 활용한 작품이다. 동료를 잃은 리바이 병장이 <원피스>의 여느 장면처럼 눈물콧물을 쏟아내며 "나너무많은일이있었어힘들다진짜"라고 말했다면 어떨까? <진격의 거인>은 지금과 같은 명작의 반열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만화와 영화 사이, 갈 곳을 잃은

"만화의 근원적인 매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만화가 갖고 있는 ‘칸과 칸 사이의 관계’와 ‘만화 작가의 독특한 회화적 표현’이다. 만화 독자는 대개 각 칸을 따라 시선을 이동하지만, 사실 만화에 의해 촉발된 독자의 상상력이 작용하는 공간은 칸과 칸 사이의 여백이다. 독자는 하나의 칸과 다음 칸 사이의 틈에서 등장인물의 행동이나 장면의 상호 관련성을 통해 생략된 내용을 잡아내고 음미하면서 사건이나 이미지를 형성한다." (「월간 미술」 2003년 3월호, '만화의 특성')


무한성편은 단행본의 단점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부풀린다. 만화 매체의 특성인 여백이 영상 매체에는 없다. 칸과 칸 사이의 여백, 대사 없이 이어지는 컷, 배경을 생략하고 인물에 집중하여 감정을 극대화하는 여백의 미가 영상에는 존재할 수 없다. 물론, <귀멸의 칼날>이 <진격의 거인>만큼 여백을 잘 이해하고 활용한 만화로 보기는 어렵다. 그래도 단행본은 부족한 서사의 깊이를 독자 개인이 채우면서 상상의 나래로 다소 메꿀 수 있고, 지루한 부분은 속도를 조절하며 적당히 건너뛸 수도 있다. 영화는 그렇지 않다. 객석에 앉아 스크린이 송출하는 영상을 비가역적으로 관람해야 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일을 '체험'으로 부르는 까닭은 이러한 매체적 특성에 기인한다. 무한성편은 독자가 해석할 여지, 물리적 공간을 남기지 않고 분주히 다음 장면을 주입하는 데 급급하다. 따라서, 액션은 훌륭하다는 의견도 도저히 공감할 수 없는 것이다. 나아가, '귀멸의 칼날은 애니메이션>만화'라는 취향에 따른 줄 세우기를 자신의 교양 수준으로 착각하고 단정 짓는 여론에 신물이 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은 만화와 영화 사이에서 갈 곳을 잃고 표류하는 푸티지 모음집이다. TVA에 사용한 무한성 3D 모델을 사용하지 않고 극장용으로 재설계한 정성에도, 디지털 작화에 들인 제작진의 노력은 구조적 결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처럼 만화의 이야기를 영화 시간에 맞게 압축해 완결하면 작품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원작의 연재 속도를 앞질러 독자적인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창작한 <강철의 연금술사>도 모범적인 사례로 볼 수는 없다. 결국 원작 내용을 기반으로 다시 리메이크해 두 종류의 애니메이션이 생겼으므로. 그렇다고 이번 무한성편의 방식대로 원작의 특정 구간을 툭 잘라내 극장판으로 개봉하면 그걸 과연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넷플릭스나 라프텔에 더 어울릴 애니메이션이,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로서 어떤 가치가 있나? 알고 있다. 이토록 영화계가 어려운 상황에 극장판 장사의 경제적 가치는 차고 넘친다. 경기 침체와 새로운 창작자 양성의 부진을 해결할 묘책을 제시하지 못하면서, 다양성 확보와 영화적 가치를 부르짖는 건 허울뿐인 이상론에 불과한 걸까. 그런 영화가 500만 관객을 동원하고 관객의 입맛 기준이 무한성편과 비슷한 영화를 쫓게 된다면, 장기적으로 건강한 애니메이션 영화의 미래, 극장의 미래는 어떻게 논할 수 있는가? 누가 책임질 건가?


며칠 전 무한성편을 관람한 후 SNS에 "팬이 아니면 굳이 안 봐도 될 영화"로 짧은 소감을 남겼다. '영화'에 방점을 찍어 그리 표현했는데, 500만 명이라는 수치는 팬과 일반인으로 나누어 구분할 수 있는 숫자가 아니다. 역대 애니메이션 영화 국내 흥행 순위 상위권의 <겨울왕국>, <인사이드 아웃 2>, <엘리멘탈>, <스즈메의 문단속> 같은 작품에도 불만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오리지널 스토리 아닌가. 신진 감독의 오리지널 스토리는 투자를 따내기 몹시 어렵고, 투자받더라도 외부의 간섭없이 '잘' 만들기 어렵고, 잘 만들더라도 흥행하기 어렵다. 몇 계단의 장애물을 뛰어넘어야 하는 곤궁한 현실은 질 나쁜 악인 한 명이 만든 게 아니다. 일본의 악습과 부조리는 일본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니 어쩔 수가 없다 치자. <스파이더맨: 어크로스 더 유니버스>과 <진격의 거인 완결편 더 라스트 어택>이 간신히 90만 명 언저리의 선택을 받는 나라에서,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을 무려 500만 명이 관람하는 것도 정상적인 일은 아니다. 숫자의 압박 때문인지 이 현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그들에게는 무한성 RPG 플레이 실황을 담은 두 시간 반이, 지금 극장에 걸린 다른 영화와 비교하여 더 재미있는 경험이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이해하고 싶지만 불가능하다. 만화를 사랑하기에 그렇고, 영화를 사랑하기에 더욱 그렇다.



<귀멸의 칼날> 만화 단행본은 생각보다 재미있습니다. 신파 덩어리에 전투 장면만 반복되지만 나름 소소한 개그도 있고, 탄지로의 성장을 지켜보는 게 나쁘지 않아요. 이 녀석도 저 녀석도 다 사실 사연이 있답니다~하는 방식이 지극히 일본스러워서 불쾌하기도 한데, 극장에서는 이런 역겨운 장면을 스킵 못하지 않습니까. 애니메이션은 스킵하면 놓치는 프레임이 생기지만 만화는 적어도 놓치는 컷은 없죠. 단행본 종이를 넘기는 재미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귀칼이 그렇게 별로라면 지금 극장에서 뭘 보냐고요? <퍼펙트 블루> 추천합니다. 이전까지 곤 사토시의 작품은 <파프리카> 이외에 관람하지 못했는데요. 메가박스 단독 재개봉으로 극장 상영 중인 <퍼펙트 블루>는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누구든 스포일러 없이 그냥 몸만 가서 보고 오는 게 낫겠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 이후 그동안 극장에서 <어쩔수가없다>, <린다 린다 린다>, <어파이어>, <피닉스>, <운디네>, <모노노케 히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임 스틸 히어> 등의 영화를 보았습니다. 대체로 모두 좋았습니다. 곧 PTA의 신작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도 감상할 생각이고요. 극장에 걸린 좋은 영화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볼 게 없으니 귀칼이 대박났지'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고 느낍니다. 찾아볼 생각이 없는 거죠. 대중은 그냥 극장에 가서, 선택지 고민 없이 무지성으로 볼 수 있는 영화를 점점 더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멀티플렉스 3사의 담합, 대형 배급사의 스크린 독점을 극복하고 한결 나은 영화를 선택할 지능이 있습니다. 극장이 지능을 포기하고 두 시간 동안 에어컨 쐬며 팝콘 먹으러 가는 곳은 아니죠. 500만 명이 다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너무 비참하잖아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두 개 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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