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리뷰 - (5)
CGV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는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Like Nothing Happened'는 데뷔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부터 국내에 정식 개봉되지 않았던 초기작 5편을 상영합니다. 본래 8월 6일부터 19일까지로 예정되었던 상영 기간이 연장되어, 적어도 며칠 더 극장에서 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획전의 타이틀 'Like Nothing Happened'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영문 타이틀입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모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아사코가 과거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와 교제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체했던 료헤이, 오토의 불륜을 눈치챘음에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가후쿠, 자신이 과거에 카즈키와 교제했다는 사실을 친구 츠구미에게 밝히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 숨겼던 메이코, 엔딩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분노와 공격성을 감췄던 타쿠미까지. 우리가 하마구치의 최근작에서 보아왔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장하며 진실을 은폐합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감독의 초기작부터 반복되어 온 연출 스타일입니다. 아카데미 수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수상 등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름을 수식하는 화려한 수상 경력이 생기기 전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착실하게 축조되어 왔습니다. 저 또한 이번 특별전 덕분에 하마구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지탱하는 정신적 뿌리와 같은 다섯 편의 초기작을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관람하길 바라고, 영화를 본 분들에게는 저의 부족한 글이 영화 속 특별한 순간을 기억에 오래 남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상영작 목록
4.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2013) | 54분
5. <천국은 아직 멀어> (2016) | 38분
여고생 미즈키의 영혼과 기묘한 동거 중인 유조. 열일곱 살에 죽은 미즈키는 유령을 보는 동급생 유조에게 빙의해 17년째 현세에 머무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즈키의 여동생 사츠키가 언니의 죽음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한다며 유조에게 인터뷰를 요청한다. "지금도 저기 있잖아." 영적인 현상은 믿지 않는다던 사츠키는 미즈키가 유조에 빙의하는 것을 직접 보고 세 사람의 관계는 미묘해지기 시작한다.
질베르토 페레스가 영화를 물질적 유령으로 지칭했음을 떠올린다. <천국은 아직 멀어>에서 유령인 미츠키는 살아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거리를 활보하며, 화면에 물리적 존재로 현상된다. 유령의 이미지는 영화 이미지 자체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미츠키와 생활하는 유조는 생업으로 AV 모자이크 작업을 하는데, 이는 하마구치가 그의 데뷔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서 감독 겸 배우가 되어 숨길 정보-공개할 정보를 선택했던 방식과 흡사하다. 포르노의 정의가 '이미지 소비를 통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행태'로 확장된 현대에는, 영화와 포르노의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국은 아직 멀어>는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시네마가 포르노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무언가라고 말한다.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물리적 질료를 현현하면서도 실존하지 않는 허구를 조각하는 모순적 이미지, 바로 물질적 유령인 영화의 가치를 흠모하는 메타적인 작품이다.
영화의 오프닝은 미츠키가 어릴 적 들었던 어머니의 이야기를 회상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미츠키가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던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동안, 천국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을 부감으로 잡은 쇼트가 펼쳐진다. 머지않아 "천국은 아직 꽤 멀다(天国はまだ 随分遠い)"라는 대사와 함께 미츠키가 정면을 응시하는 쇼트로 화면이 전환된다. 하늘에서 미츠키로 이동하는 순간은 해당 대사의 중간 지점이다. 미츠키의 음성이 [천국은 아직(天国はまだ)]을 말하는 시점까지는 하늘 쇼트가 유지되며, 미츠키의 얼굴로 쇼트가 전환되고 1~2초 정도 정적이 흐른 뒤 나머지 문장인 [꽤 멀다(随分遠い)]가 음독된다. 영화가 시작한 지 고작 24초가량 지났을 시점인데, 이 짧은 분량 내에서도 의뭉스러운 점이 여럿 있어 호기심을 자극한다.
24초까지의 연출이 흥미로운 까닭은 쇼트가 제공하는 시각 정보와 내레이션이 제공하는 청각 정보 사이 기묘한 괴리감에 있다. 천국을 들었을 때 흔히 연상되는 하늘을 보여주는 쇼트, 천국과 관련된 이야기를 발화하고 있는 내레이터. 관객은 천국(으로 여겨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시점의 주인과 내레이터가 같은 인물이라고 단정하게 된다. 그것이 전통적인 영화 문법이기 때문이다. 공개된 정보가 극도로 제한적인 24초까지는 관객이 미츠키의 정체를 유령으로 확정할 수 없다.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미츠키가 천국에 가지 못한 유령이란 걸 알게 된다. 그렇다, 그녀는 결코 관객이 본 하늘을 보지 못했다. 24초 이후 이어지는 추가 단서를 통해 관객은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인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과 내레이션, 이미지 간의 부조화로 음산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마저 흐르는 하늘 쇼트의 시점 주인은 누구인가? 더 정확히는, 이것이 과연 특정 인물의 시점 쇼트가 맞는가? 우리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오프닝-엔딩 트래킹 쇼트를 통해 이러한 난제에 봉착한 바 있다. 과거의 작품이 뒤늦게 개봉했기에 두 영화 사이 유사성을 찾아 역으로 추적할 수 있으리라 본다. 오프닝과 엔딩에 동일한 구도의 쇼트가 반복된다는 공통점이 있으며,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경우 아래(땅)에서 위(하늘)를 올려다보는 쇼트인 반면, <천국은 아직 멀어>는 위(천국)에서 아래(하늘)를 내려다보는 쇼트다. 전자의 트래킹 쇼트를 초자연적인 존재의 시점으로 짐작하는 현재, 전자의 원형이 되는 후자의 쇼트 또한 생명을 초월한 존재의 시점으로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영화는 목소리의 주인과 시선의 주인을 교란하는데 머물지 않고, 내레이터/시점의 주인/스크린 속 인물 3자가 모두 다른 존재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츠키가 직접 입을 열기 전까지, 내레이션을 미츠키의 육성으로 확신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영화가 의도적으로 관객에게 혼선을 주고 있다. '내레이터=미츠키'라는 정보는 미츠키가 만화책을 보는 유조에게 "너무 빨라"라는 첫 대사를 말하며 목소리를 공개하기 전까지 은폐되어 있다. 24초 이후 펼쳐지는 씬은 더 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미츠키의 정면 쇼트를 시작으로 유조가 화장실에 들어가 자위하기 직전까지, 단 4가지 쇼트가 교차된다. 미츠키 정면 쇼트, 유조 좌측면/우측면 쇼트, 그리고 컴퓨터 스크린의 모자이크 쇼트다. 유조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을 하며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는 미츠키가 서 있는 유조의 좌측면에서 그를 바라본 클로즈업 쇼트다(미츠키가 물리적으로 유조를 보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모자이크 처리된 스크린 위로 포르노의 신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미츠키는 처음 등장했던 자세 그대로 서서 무표정한 얼굴로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 뒤로 컴퓨터 앞에 앉아 모자이크 작업 중인 유조의 왼쪽 얼굴이 흐릿하게 보인다. 추가 작업에 관해 통화를 하는 유조의 오른쪽 얼굴 뒤로는 미츠키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등장인물의 눈을 대리하고 있는 쇼트는 유조가 보고 있을 모자이크 쇼트 뿐이다. 유조의 우측면 쇼트는 수직으로 배치된 유조와 그를 등지고 선 미츠키 간의 구도를 비추는 지극히 기술적인 쇼트이고, 좌측면 쇼트는 미츠키가 유조를 보고 있지 않기에 인물의 시선이 아닌 카메라의 시선, 촬영자의 존재를 환기하는 쇼트이며, 미츠키의 정면 쇼트는 이 장면이 영화라는 사실을 명시하는 쇼트이다. 개별 쇼트와 이로 이루어진 씬 전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인위적이다. 유조는 추후 영화 제작자의 위상에 놓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포르노=영화라는 비유적 등식을 성립시킬 수 있다. 따라서 유조의 방 씬에서 인물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유일한 쇼트인 모자이크 쇼트는, '영화를 편집(또는 제작)하는 영화'로서 메타적 특성을 밝히는 증언이 된다.
미츠키의 정면 쇼트에서 반드시 헤쳐 나가야 할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 번째는, 미츠키는 왜 정면을 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다시 말해, 미츠키가 카메라 정면을 응시하는 쇼트는 왜 반복되고 있는가? 해당 쇼트는 명확한 의도를 갖고 촬영되었다. 영화에서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기시된 일이다. 영화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는 작품 내에서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유리되어 있어야 한다. 제4의 벽을 깬다고 일컬어지는 이러한 연출은 의외로 1960년 김기영 감독의 <하녀>의 엔딩을 통해 국내에서도 일찍이 시도된 바 있다. 다만 이것은 검열을 피하기 위한 선제적인 자체검열이었기에, 역사적 의의를 부여하긴 어렵다. 김기영 감독 본인조차 이 장면을 넣은 것을 부끄러워했다고 전해진다. 세월이 흘러 2003년이 되어서야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을 통해 영화 내러티브와 조화를 이루는 제4의 벽 깨기 연출이 완성되었다. <살인의 추억>이 없었다면 연극에서 시작되어 영화로 확장된 제4의 벽이라는 개념이 국내 관객에게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가와 안이 연기한 미츠키의 정면 응시 쇼트를 보고 더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살인의 추억>보다는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다. 우연히도 <하녀>와 개봉연도가 같다. 무엇보다 인물의 표정이 상당히 비슷한데, 진 시버그가 연기한 패트리샤가 정면을 응시하며 끝나는 엔딩 장면은 작중 두 번째로 제4의 벽을 깨는 지점이다. 초반부, 미셸(장폴 벨몽도)이 여성과 자동차에 관해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은 스토리 라인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그런데, 영화가 개봉된 1960년에는 제4의 벽 연출이 유럽 관객에게도 그리 친숙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네 멋대로 해라>는 누벨바그의 물결을 불러온 장본인 중 하나인 고다르의 데뷔작으로, 다방면에서 시도한 여러 형식적 실험 중 하나가 제4의 벽 깨기였다. 따라서 제4의 벽 깨기가 두 번 시도된다는 점은 아주 중요하다. 첫 번째 미셸의 정면 쇼트와 달리, 두 번째 패트리샤의 정면 쇼트에서는 관객 전원이 마침내 이 연출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실존하는 배우 험프리 보가트를 동경하는 캐릭터인 미셸은,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우상의 시그니처인 입술 제스처를 따라한다. 미셸은 패트리샤에게 "난 정말 역겨워(Ch'uis vraiment dégueulasse)"라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는데, 미국인인 패트리샤는 프랑스어를 알아듣지 못해 옆에 있던 경찰에게 그가 뭐라고 했는지 묻는다. 경찰은 잘못 알아듣고, "그는 당신이 역겹다고 했어요(Il a dit que vous etes vraiment 'une degueulasse')"라고 일러준다. 그 말을 들은 패트리샤가 똑같이 험프리 보가트의 입술 제스처를 한 뒤 정면을 응시하며 나지막이 뱉는 대사가 바로 "역겹다는 게 뭐죠?(Qu'est ce que c'est 'degueulasse'?)"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이 실존하는 배우의 제스처를 따라하고 카메라 너머 관객을 응시한다는 것은, 곧 영화 스스로 작중 벌어진 사건이 전부 가짜임을 시인하는 행위다. 미셸의 정면 쇼트는 관객에게 큰 의미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엔딩에 이르러 패트리샤의 정면 쇼트를 마주하면, 제4의 벽의 존재를 인지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거대한 영화적 체험을 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천국은 아직 멀어>로 돌아오겠다. 두 번째 의문은 왜 미츠키는 유조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가이다. 카메라가 '유조를 등지고 있는 미츠키의 정면'을 찍고 있을 뿐이기에, 첫 번째 의문과 두 번째 의문은 얼핏 같은 의제로 들린다. 하지만, 첫 번째의 경우 인물의 구도를 어떻게 배치하는가, 어떠한 방식으로 촬영하는가 하는 연출에 관한 질문이다. 두 번째는 작품 속 인물의 관계 설정이나, 유조가 하고 있는 모자이크 작업과 미츠키 사이의 연관성을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다. 같은 공간 내 같은 구도에 있는 같은 인물들을 방향만 180도 바꿔 촬영했을 뿐인데도 그 영화적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앞서 설명했듯, 미츠키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쇼트를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제시한 것은 <네 멋대로 해라>처럼 영화 스스로 "이것은 영화다"를 말하는 선포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단순히 메타성을 드러내는 연출 정도로 짚고 넘어가기에는 임팩트가 너무 강하다. 오가와 안의 연기에 어떤 디렉팅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고 "그냥 멍때리고 있네요"라고 말할 관객은 없을 거라 장담한다. 제4의 벽 깨기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염두에 둔 연기임은 확실하다. 하늘을 보고 있는 시점의 주인을 알 수 없듯, 미츠키가 천국을 볼 수 없듯, 미츠키가 뚫어져라 응망하는 지점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관객에게는 그 너머가 허락되지 않는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감추고 있다. 패트리샤의 정면 쇼트가 두 번째 반복으로서 엔딩에 배치되어 연출의 효과와 감정적 여운을 충실히 느낄 수 있었던 반면, 미츠키의 정면 쇼트는 영화의 첫 장면이다. 정보가 제한적이기에 "영화 속 인물이 스크린 바깥을 의식하고 있다"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영화가 명확히 공개하지 않은 지점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관객이 집중해야 하는 것은 두 번째 의문이다. 영화의 형식을 따져 묻고 이론적으로 접근하려는 강박적인 시도는, 늘 그 안에 자리한 사람을 간과하고 그들의 감정을 지나치게 만든다. 미츠키와 유조의 감정이 어떠한지, 미츠키가 유조의 포르노 작업을 어떻게 여길는지 '인간적으로' 생각해 봐야 한다. 하마구치 감독의 단편 묶음집 <우연과 상상>은 그의 작품 세계를 탁월하게 표현하는 두 키워드를 제목으로 나타내었다. 그의 영화에서, 우연이 틈입하는 불안정한 세계에 놓인 인물은 상상이라는 불확실한 도구로 난관을 극복하곤 한다. <천국은 아직 멀어>의 등장인물도 마찬가지다. 미츠키가 하필 친분이 전혀 없던 유조에게 얽매이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유조는 자신만이 그녀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러한 우연에 당위성이나 영화 형식의 논리를 들이미는 일은 거추장스럽고 하찮다. 만약 미츠키가 실존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유조의 상상이 된다. 우리는 미츠키의 존재가 진실인지 거짓인지 따지기에 앞서, 인물의 심리를 조명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해야만 다시 연출과 형식에 관한 분석으로 돌아와 영화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카페에서의 인터뷰 요청 장면이 끝나면, 유조와 미츠키는 방에 돌아와 있다. 미츠키는 인터뷰에 응하면 동생을 다시 볼 수 있다며 유조를 부추긴다. 유조는 옷을 갈아입는데, 미츠키는 오프닝처럼 그를 등지고 뒤돌아 있다. 유조가 바지만 입고 상의는 아직 입지 않았을 때, "예쁜 여자들은 절대 나한테 관심이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미츠키는 뒤돌아 유조를 쳐다본다. 이 즉각적인 리액션은 수려한 외모의 미츠키가 유조에게 관심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에서 나체 모델 히사시를 연기한 오카베 나오와, 그를 바라보는 에리나를 연기한 칸노 리오의 관계를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유조 역을 맡은 오카베 나오가 옷을 벗은 채 서있고, 그의 상대 역이 남자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어린 여성이며, 동시에 예쁜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미츠키가 유조로부터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
사츠키를 자신의 방으로 부르는 게 어떻냐는 유조의 제안에 미츠키는 화를 내는데, 화해의 제스처로 유조는 음악을 틀고 춤을 제안하며, 이내 두 사람은 춤을 춘다. 이때 두 인물의 입은 열리지 않고, 마치 텔레파시로 소통하듯 짧은 대화가 오간다. "왜 나였을까?(なんで私だったん?)"라는 미츠키의 의문에, 유조는 너와 여동생이 닮았기 때문이라 답한다. 이 대화를 통해 미츠키 대신 사츠키가 죽었어야 할 운명인데, 자매의 비슷한 외모 때문에 미츠키가 대신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는 다큐 촬영 장면에서 사츠키의 대사로 재확인된다. 결국, 미츠키가 죽은 이유, 미츠키가 유령이 된 이유, 미츠키가 유조에게 붙은 이유 모두 우연에 기인한다. 미츠키는 우연이라는 폭력에 휘말려 고등학생인 상태로 현세에 박제되었다. 미츠키는 사망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육체 관계는커녕 연애 한 번 못했다는 억울함에 유조의 몸을 빌려 좋아하던 선배에게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지 않았을까. 아직 먼 천국을 직접 보지 못했듯, 그녀는 17살의 순간에 갇혀 영영 포르노를 볼 수 없는 인물이다. 미츠키의 몸에는 빗방울도, 유조의 춤사위도, 그 어느 것도 닿지 않는다. 그런 미츠키는 포르노 모자이크 작업이 생업인 유조와 살며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앞으로도 경험하지 못할 살결의 부딪힘과 노골적인 육욕 앞에 노출되어 있다.
미츠키의 동생 사츠키는 유조와 만나 죽은 언니의 다큐멘터리 촬영을 시작한다. 그 이면에는 고교 시절 유조가 마치 미츠키인 것처럼 선배 쿠보타에게 고백했던 사건에 대한 의문이 자리한다. 유조는 미츠키가 죽은 후 유령이 되어 같이 생활하고 있고, 원한다면 그녀가 자신의 몸을 빌려 타인과 대화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사츠키는 반신반의하며 입증해 보라고 다그친다.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일을 하는 유조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과 같은 상태에 놓도록 요구받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영화가 물질적 유령이라면 이러한 난제는 영화를 비롯한 창작론 전반에 대한 고민이 된다. 보이지 않는 가치를 입증해야만 하는 유조는 그렇게 영화 제작자의 위상에 오르고, 사츠키는 관객의 자리에 놓인다. 흥미롭게도, 연기를 시현하는 주체는 제작자(유조) 본인이다. 영화의 역할인 미츠키는 정작 빙의가 시작되면 소파에 누워 잠에 빠진다. 일단 상영되고 나면 이를 수용하는 것은 오롯이 관객(사츠키)의 몫이다. 해당 장면에서 미츠키는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다. 그녀는 추상적인 대상을 물리적으로 실체화하려는 충동적 이미지, 물질적 유령이기 때문이다.
유조에 빙의된 미츠키와 대화하며 눈물을 흘리던 사츠키는, 불현듯 일어나 "이런 거 하면 즐겁냐", "언니와 내 정보는 어떻게 캐냈냐"라고 말하며 미츠키와 공명한다는 유조의 주장을 부정한다. 이전까지 미츠키는 살아있는 사람처럼 스크린에 현상되었는데, 이 대사를 기점으로 유조의 태도가 아리송하게 변모하며 미츠키의 실존 여부를 의심하게끔 한다. 사츠키의 추궁에도 꾸준히 미츠키의 존재를 주장하던 유조는 "뭐, 요즘 시대에는 정보를 캐는 이런저런 방법이 있다"라며 돌변한다. 물론, 여태 본 모습 중 가장 생기있어 보인다며 신랄하게 비꼬는 사츠키에게 불쾌함을 느껴 퉁명스럽게 받아친 것일 수도 있다. 분명한 건 관객은 이번에도 진실을 가려낼 수 없다는 점이다. 미츠키는 유조의 환상인가, 유령인가? 다큐 촬영 장면에서 미츠키는 진정 유조에 빙의했는가? 두 번의 빙의(어쩌면 연기)에서, 정확히 어느 순간부터 어느 순간까지 빙의가 유지되었는가?
만약, 사츠키의 불신처럼 미츠키가 유조의 상상이라면 어떠한가? 영화 속 모든 이야기가 가짜로 전락하고 만다. 유조와 미츠키의 대화, 사츠키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미츠키의 눈빛, 엔딩에서 미츠키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장면 등 미츠키가 등장하는 쇼트 전체는 유조의 변태적 망상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방향으로 영화를 해석하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애초에 유조의 주장은 근거가 빈약하다. 유조가 미츠키를 보게 된 것, 함께 생활하게 된 것은 오로지 우연이며, 미츠키가 하필 미성년자일 때 죽은 것도 우연에 불과하다. 미츠키가 망상에 불과하다면, 그녀가 선배 쿠보타를 좋아했다는 걸 유조가 어떻게 알았겠는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 아무 남자 선배나 붙들고 여고생 연기를 했다거나, 유조가 몰래 생전의 미츠키를 관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 이야기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관객은 다다를 수 있는 여러 갈래 중에 더 좋은 이야기를 선택하면 된다. (<라이프 오브 파이>, "the first story is the better story.")
유조(에 빙의된 미츠키)가 유령의 존재를 입증할 방법은 예상 외로 간단하다. 사건 당일 있었던 범죄 정황을 설명하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소명하면 된다. 하지만, 유조의 몸을 빌린 미츠키는 다큐멘터리의 주제가 되는 그날의 사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동생 사츠키과의 시시콜콜한 추억을 떠올리며 "그때 네가 정말 귀여웠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라고 말한다. 이는 하마구치 감독이 영화를 대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영화의 실증적인 가치를 애써 논증하기보다, 영화를 보고 체험하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역설한다. 다큐 촬영 장면에서 우리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향한 찬사만이 아니다. 카메라 너머에는 하마구치 류스케가 영화 제작자로서 가진 은밀하고도 묵직한 욕망이 깃들어 있다. 영화는 그저 미츠키가 상상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뿐이다. 그것이 감독이 진단하는 영화의 성질이기 때문이다.
히치콕은 일찍이 스크린의 외부(현실)와 내부(허구)의 철저한 분리를 넘어서고자 하는 시각적 충동을 보여주었다. 유령인 미츠키가 카메라 바깥에서 감독 겸 배우인 유조와 관객 사츠키를 보고 있다. 사츠키는 카메라 화면을 통해 카메라 안의 배우 유조를 관람하며, 유조는 카메라 바깥에 있는 미츠키와 사츠키를 보고, 이 광경은 현실 관객에게 보여진다. 해당 장면에서 감독과 배우를 겹쳐 두는 연출은 에이젠슈테인이 주창한 '상호침투(interpenetration)'의 맥락으로 비치는 측면이 있다. (미츠키가 문 너머 화장실에 있어 보이지 않는 유조를 문 밖에서 관람하는 듯한 장면도 있었다.) 하마구치가 데뷔작인 <아무렇지 않은 얼굴>부터 감독 겸 배우로 출연하면서 보여준 조용한 충동은 히치콕이 <이창>과 <사이코>에서 스크린 외부와 내부를 각각 서로 다른 방향에서 관통하고자 했던 충동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가정을 통해 오프닝 시퀀스를 다시 돌아보면, 앞서 언급한 첫 번째 의문이 다소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미츠키가 스크린 외부를 넘어 바깥을 의식해야만 하는 이유. 이것은 후반부 다큐 촬영 장면의 예고이기도 하다. 오프닝 장면에서 미츠키가 스크린의 외부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면, 이어지는 다큐 촬영 장면은 <천국은 아직 멀어>라는 영화의 촬영 현장을 촬영하는 메타적 장면으로 볼 수 있다.
"한 번도 잊은 적 없다면 오버하는 거겠지만 네 생각 많이 했어."
"나도 그랬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 말 들으니 기뻐. 고마워."
"안아도 돼?"
물질적 유령으로 불리는 영화 이미지가 제시한 가능성을 통해, 유조와 사츠키는 잠시나마 정서적 공존을 이룬다. 유조가 미츠키에게 몸을 내어주게 되면, 빙의가 끝날 때까지 미츠키의 형상은 카메라에 드러나지 않는다. 미츠키는 유조의 자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한편, "언니 대신 내가 죽었다면"이라는 대사로 사츠키는 죽은 미츠키의 위치에 놓인다. 촬영용으로 연극을 좀 더 이어가자는 유조의 제안에, 사츠키도 일종의 연기를 하기 시작한다. 사츠키가 유조의 빙의를 믿지 않았음에도 그 과정을 '테라피'라 칭하며 위로받았다는 점에서, 하마구치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의 본질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그렇게 사츠키 역시 유조의 자리에 놓이게 된다. 연극의 감독 겸 배우인 유조는 동시에 사츠키를 바라보는 관객이 되며, 연극의 관객이었던 사츠키는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감독 겸 배우가 된다. 내레이터/시점의 주인/스크린 속 인물을 구분할 수 없었듯 유조, 미츠키, 사츠키 사이의 위상 구분은 매우 불분명해진다. 유조-미츠키 단일 관계에서만 가능해 보였던, 한 사람의 미심쩍은 망상으로 여겨졌던 영화 이미지는 3자 사이에서 자유롭게 이동 가능한 확장성을 지닌 무언가가 된다. 공교롭게도 두 인물을 매개하고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미츠키다. 비록 미츠키의 존재는 입증되지 못했지만, 미츠키라는 이미지의 존재 가치는 틀림없이 입증되었다. 에이젠슈테인의 상호침투, 관객과 배우의 수렴 원리가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고, 하마구치 감독의 충동은 스크린을 관통하여 실제 관객인 우리에게 도달한다. <네 멋대로 해라>의 첫 번째 정면 쇼트가 두 번째 정면 쇼트가 되어서야 관객에게 도달했듯, 오프닝의 미츠키 정면 쇼트의 진의(眞意)는 다큐 촬영 쇼트가 되어서야 관객에게 가닿는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영화는 인물의 공간 이동에 따라 하늘-유조의 방-지하철-하늘 타이틀 시퀀스-카페-유조의 방-다큐 촬영-귀갓길-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하늘은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 시퀀스, 엔딩까지 총 3번 등장한다. 오프닝과 타이틀 시퀀스의 하늘은 시각적으로 동일하다. 하나의 촬영본을 두 번 쓴 것으로 추정한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항공기를 대동하지는 않았을 테니, 저작권을 주고 영상을 따로 구매했으리라 본다. 그런데, 오프닝 및 타이틀 시퀀스에 쓰인 영상과 엔딩에 쓰인 영상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영상을 굳이 개별적으로 구매해 사용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두 영상의 가장 큰 차이점은 고도와 시간이다. 비교적 구름 가까이, 땅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높이에서 찍은 오프닝 쇼트에 비해, 엔딩 쇼트는 확연히 고도가 높아졌다. 밝고 푸르렀던 하늘에는 어느새 구름 위로 노란색 그라데이션을 그리는 햇빛이 드리우며, 시간의 경과를 알리고 있다. 영화와 시작과 끝 사이 무언가 변했음을 시사한다.
서두에서 <천국은 아직 멀어>라는 제목과 오프닝의 내레이션 사이 불일치를 언급한 바 있다. 차이점은 부사 하나다. 오프닝 내레이션에서 미츠키는 천국은 아직 '꽤, 상당히(随分)' 멀다고 말하며 스크린에 처음 등장한다. 엔딩은 오프닝보다 더 높은 곳에서 하늘을 내려다보는 쇼트와 함께 미츠키의 내레이션이 낭독되는 수미상관 연출로 장식된다. 엔딩의 내레이션은 부사가 생략된 원제 그대로의 '천국은 아직 멀어'다. 이를 말하기 직전의 내레이션도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된다. 오프닝에서 천국에 간다는 어머니의 말을 "믿지 않았다(信じてたわけじゃないけど)"는 대사가 엔딩에서는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信じてないわけじゃない)"로 변주된다. 어렸을 적 천국을 믿지 않던 미츠키는 엔딩 시점에서는 최소한 믿지 않는 것은 아닌 상태가 되었다. 오프닝의 구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있었다면, 엔딩의 구름은 전보다 까마득히 멀어졌다. "이 비구름 저편에는 천국이 있다(この雨雲の向こうには天国がある)"라는 미츠키의 대사로 보아, 구름과 멀어진 만큼 천국에 가까워졌다고 볼 수 있다. 미츠키에게 꽤 멀던 천국은 그냥 먼 천국이 되었다.
"비는 어차피 내겐 닿지 않아."
"비 냄새도 맡을 수 없어."
"하지만 빗소리는 들을 수 있지."
"빗방울도 볼 수 있어."
무언가를 믿는다고 뜨겁게 소리치기보다, '믿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곳을 떠날 수 없다며 에둘러 표현한 내레이션은 유조의 갑작스러운 고백,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를 향한 세레나데와 일맥상통한다. 유조는 비가 닿지 않는 유령 미츠키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며 우산을 나눠 쓴다. 비와 미츠키는 닿지 않는다. 미츠키와 유조도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유조는 미츠키를 볼 수 있다. 미츠키도 유조를 볼 수 있다. 유조는 미츠키에게 비가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우산 중앙을 내어준다. 허구적 세계인 영화는 관객에게 닿을 수 없고, 냄새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영화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미지도 볼 수 있으며, 사랑에 빠질 수 있다. 하마구치 감독은 그러한 영화도 스크린을 관통하여 우리를 바라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천국은 아직 멀어>는 허구와 현실이 교류하며 생성하는 영화 이미지의 가치를 긍정하며 엔딩을 맞는다. 질베르토 페레스는 앙드레 바쟁이 빛의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카메라를 통해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각인을 남긴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전했다. 영사기의 빛으로 스크린에 떠오르는 이미지들 속에서 탄생한 물질적 유령의 이름은 미츠키다. 미츠키(みつき)는 빛을 뜻하는 '미츠(光)'와 각각 희망, 시작을 뜻하는 '키(希)' 또는 '기(紀)'가 결합된 이름이다. 하마구치 감독이 궁리하는 실험적인 영화 행위의 토대에는 빛의 희망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다. 유조의 고백은 하마구치가 시네마에 보내는 헌사이다. 비록 만질 수도 없고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지만, 나는 너의 자리를 늘 비워놓겠다는 절절한 고백.
참고문헌
1) 유운성, 『어쨌거나 밤은 무척 짧을 것이다 』, 보스토크프레스, 2021, 30~38쪽.
2) 씨네 21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2 <'드라이브 마이 카'와 하마구치 류스케 작가론> -씨네21 송경원 편집장
3)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Like Nothing Happened> CGV 아트하우스 진(ZINE) No.6 부록
기획전 내 다섯 작품 중 유독 <천국은 아직 멀어> 리뷰를 작성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본문에서도 언급했듯 오카베 나오와 상대 역의 관계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를 떠오르게 하고, 수미상관으로 반복되는 하늘 쇼트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오프닝-엔딩 트래킹 쇼트와 아주 유사합니다. 사츠키 역의 현리가 유조와 카메라 앞에서 대화하는 시퀀스는 <우연과 상상> 1부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의 카페 씬을 닮아 있고, 닿을 수 없는 미츠키와 유조가 방에서 춤을 추는 장면은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에서 치히로와 나오야가 비접촉 무용을 연습하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카메라 앞에서 빙의를 굳이 두 번 반복한다는 점은 <아사코>의 실험적인 초기 형태로 보이기도 하는데, 글쎄요. 진의는 하마구치 감독 본인만이 알겠죠. 감독의 다른 작품을 여럿 감상했다면, 38분이라는 짧은 분량 내에서도 이처럼 정말 다양한 유사성과 변주의 재미를 찾아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정성일 평론가 GV에 꼭 참여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전문가의 평가나 의견에 오염되지 않은 온전한 자기 생각을 글로 정리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그렇다기에는 인용도 많이 했고, 다른 곳에서 끌어온 개념도 있긴 하지만요.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짧은 단편 영화로 이 정도 깊이의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감독이 있을까 싶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에게 신세대 거장이라는 명함은 기계적인 칭찬이 아니라, 지금의 그를 잘 나타내는 합당한 표현입니다. <친밀함> 외에 짧은 단편을 묶어서 상영하지 않고 개별 상영한 점은 살짝 아쉽지만, 요즘처럼 극장이 침체된 시기에 이렇게 하마구치 감독의 초기작 기획전을 만나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컸습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차기작은 비르지니 에피라 주연의 프랑스-일본 합작 영화 <올 오브 서든>이 될 예정인데요. 처음으로 일본, 한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언어로 찍는 영화이며, 배경도 일본과 한국을 떠나 파리에서 찍는다고 하니 더 기대됩니다. 최신작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지금까지의 스타일을 다소 벗어나는 커리어의 분기점처럼 여겨졌었기에, 그 다음 작품으로 이렇게 해외에 나왔다는 건 '하마구치 2.0'으로 이행하는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보이네요.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네 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