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리뷰 - (2)
CGV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는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Like Nothing Happened'는 데뷔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부터 국내에 정식 개봉되지 않았던 초기작 5편을 상영합니다. 본래 8월 6일부터 19일까지로 예정되었던 상영 기간이 연장되어, 적어도 며칠 더 극장에서 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획전의 타이틀 'Like Nothing Happened'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영문 타이틀입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모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아사코가 과거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와 교제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체했던 료헤이, 오토의 불륜을 눈치챘음에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가후쿠, 자신이 과거에 카즈키와 교제했다는 사실을 친구 츠구미에게 밝히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 숨겼던 메이코, 엔딩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분노와 공격성을 감췄던 타쿠미까지. 우리가 하마구치의 최근작에서 보아왔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장하며 진실을 은폐합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감독의 초기작부터 반복되어 온 연출 스타일입니다. 아카데미 수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수상 등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름을 수식하는 화려한 수상 경력이 생기기 전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착실하게 축조되어 왔습니다. 저 또한 이번 특별전 덕분에 하마구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지탱하는 정신적 뿌리와 같은 다섯 편의 초기작을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관람하길 바라고, 영화를 본 분들에게는 저의 부족한 글이 영화 속 특별한 순간을 기억에 오래 남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상영작 목록
2.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2009) | 58분
4.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2013) | 54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 에이코는 약혼자 세이치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다. 결혼식 당일, 전남친 히사시는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에이코의 결혼식장에 찾아오고 에이코는 그들에게 엄청난 고백을 한다. 결혼식 직전, 세이치는 에이코가 숨기고 싶었던 일을 이미 알고 있다며 오히려 미안하다고 한다.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는 하마구치 감독이 타인(와타나베 유코)에게 각본을 의뢰해 자주제작으로 촬영한 중편이다. 핵심 과제는 결혼을 앞둔 신부 에이코가 자신의 불륜 내막을 신랑 세이치에게 ‘언제 어떤 방식으로 전달할 것인가’이다. 이 작품에는 불가해한 언어의 힘을 탐닉하려는 하마구치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겼다. 후반부에 접어들수록 플롯은 전형적인 스크루볼 코미디로 수렴하지만, 인물과 상황을 관찰하는 카메라에 서린 인식의 감각은 결코 전형적이지 않다. 관객은 카메라의 진실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하마구치 감독은 현실을 기록하는 도구로서 카메라의 힘을 얼마나 신봉하였는가?
"두 분께선 아직 진실을 얘기하지 못한 것 같군요"
인물 각자가 짊어지고 있는 비밀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아이디어를 변주한 것으로 보인다. 주연 4인, 에이코, 세이치, 히사시, 에리나의 비밀은 결혼식이 시작되기 전 낱낱이 공개된다. 전작에서 얼굴이 감정을 감추는 가면이었다면, 이 작품에서는 언어가 진실을 유폐하는 가림막이 된다. 언어는 감정으로 요동치는 신체를 얼마나 잘 감출 수 있을까? 카메라는 언어의 거짓을, 혹은 신체의 진실을 제대로 기록할 수 있을까?
초기작 시기에 세워진 여러 단계의 가설들-언어 또는 신체만으로 거짓됨을 가릴 수 있는가(이는 바꿔 말하면 언어 또는 신체만으로 진실을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가 된다), 가시적 신체와 비가시적 언어는 동시에 같은 것을 말하고 있는가, 카메라는 주관적인 판단자가 아닌 객관적 기록의 도구로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가-은 카메라의 도구적 역량을 믿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카메라는 누군가의 시선을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고, 자신의 어떤 영화에서도 시점 쇼트를 찍은 적 없다던 하마구치 감독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에 이르러 오프닝과 엔딩의 트래킹 쇼트, 차량 뒤편의 시점 쇼트를 통해 '무언가'의 시선을 의도적으로 대리했다. 어쩌면 그가 존경해 마지않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방식처럼 카메라에 자아를 부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해당 작품이 감독 커리어의 전환점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은 연출법을 전면에 내세워 새로운 영화적 지평을 모색했음에 있다.
"카메라는 촬영 장치로서 기능할 뿐이다. 다만 이번엔 아예 대놓고 인물의 시선이 부재한 카메라의 시선을 내세웠다. 이건 내가 점점 관객의 힘을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가 진짜인 척하지 않고 외려 그것이 영화임을 내세움으로써 관객과 더 잘 소통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씨네21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페셜 토크 중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는 <드라이브 마이 카> 인트로의 원형이 된다. 아내 오토가 불륜의 전말을 남편 가후쿠에게 밝히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날, 가후쿠는 소통의 불가능에 좌절을 느끼고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그는 엔딩에 이르러 <바냐 아저씨> 연극에서 소냐의 수화로 위로를 받는다. 애당초 불통이 과연 언어의 탓이었는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서 탐구한 숨김-드러남의 고리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에서 신체와 언어가 감춘 비밀을 카메라가 어디까지 포착할 수 있는지, 인간의 눈과 렌즈는 얼마나 다른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배우와 얼굴, 언어와 대본, 신체와 연기, 카메라와 감독 중 어느 하나라도 부재하다면 연구할 수 없는 것. 즉, 하마구치가 천착하던 것은 그저 언어의 힘과 한계가 아닌 영화언어의 근간과 재인식이다.
“말은 단지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스스로를 의식하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말의 감옥에 갇히면 어느새 그 틀 안에서 사고를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는 문자와 말 이외 다양한 경로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곤 한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진심을 대면하지 못하는 한 남자의 상처와 내면을 그린다. 다만 이건 언어의 불완전함, 소통의 불가능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도리어 언어의 확장에 관한 통찰이다. ‘영화언어’ 역시 하나다.” –씨네21 송경원 편집장
하마구치 감독은 도쿄예술대학원 재학 시절 제작한 단편 <기억의 향기> (2006) 이후로 직접 각본을 맡지 않은 영화를 두 편 더 만들었다. 바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과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이다. 두 편 모두 이번 기획전에 포함되어 있다. 기획전 다섯 편의 공통 주제를 '언어가 가진 힘에 대한 긍정과 그에 대한 허상 내지 태생적 한계에 대한 고찰'이라고 가정한다면(그의 영화적 문법을 생각해 보면 허상과 한계를 선결적으로 지적해야만 비로소 언어의 힘을 긍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는 이 주제를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전달자에 해당할 것이다.
이것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종의 모순이자 순환 논증이다. 언어의 한계를 지적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대사를 통해), 발화자인 감독이 직접 전하는 대신 전달자인 배우가 대본을 숙지하여 연기로 승화한다. '연기하는 연기'는 영화 매체에서 꽤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지만, <드라이브 마이 카>로 대표되는 하마구치의 극중극이 고작 순환 논증에 갇힌 언어는 자생이 불가능하다는 걸 무한정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다면 어떠한가? 그의 영화에 대사가 많아야 할 논리적 근거도 없고, 현대 영화 프로덕션의 기조를 거스르는 4~5시간짜리 영화가 만들어져야 할 상업적 이유도 없지 않은가?
영화는 사진과 함께 별다른 가공 없이 현실을 포착하여 제시하는 것만으로 예술적 실천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가공하지 않고 90도 돌려 서명만 하여 전시해 놓은 것은 영화와 사진이 보여준 직접화법의 예술과 유사해 보인다. 변기가 예술의 기능을 수행하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라면, 뒤샹의 서명은 전달자의 존재를 명시하는 최소한의 진술에 해당한다. 문학에서 흔히 편집자적 논평으로도 불리는 간접화법과 다르게 직접화법에는 서술자의 논평이 없다. 대신, 직접화법의 예술은 화법 자체를 주제로 보는 새로운 관점을 도입했다. (유운성,『물듦』, 미디어버스, 2025, 24-27쪽 참고) 이해를 위해 직접화법, 간접화법, 자유간접화법의 예시를 순서대로 나열해 보겠다. (내적독백에 해당하는 자유직접화법은 다루지 않는다)
1)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녀를 사랑해"
2)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3) 그는 그녀를 사랑해.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속 대사를 두 가지 버전으로 제시하겠다. [감독님의 대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에이코: 미안해. 앞으로도 분명 미안할 거야]가 직접화법이라면, [미안해. 앞으로도 분명 미안할 거야]는 에이코 역을 맡은 배우가 문장의 주어가 되어 체화한 대사로서 자유간접화법이 된다. 하마구치 감독의 연기론은 완고하다. 본촬영 전까지 감정은 빼고 텍스트만 몇 번이고 낭독하는 것. 하도 여러 번 말해서 자연스럽게 외워버린 텍스트가 카메라 앞에 발화된다. 이때 처음으로 현출되는 감정은 감독이 대본에 써놓은 감정인가? 배우가 창조한 감정인가?
유운성 평론가는『물듦』에서 자유간접화법의 특징으로 발화자의 말과 전달자의 말 사이의 상호감염(물듦)을 언급했다.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는 배우의 언어와 감독의 언어가 유리된 세계가 아니다. 직접화법을 거부하고 '문은 열어둔 채로' 기꺼이 상호 간에 감염되고자 하는 태도 자체가 서명이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유간접화법이 그의 영화를 예술로 만든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에 사전 낭독이 있어야 했던 이유, <드라이브 마이 카>에 자신의 연기론을 그대로 재현한 대본 리딩 장면이 들어간 이유, <해피 아워>의 러닝타임이 5시간을 초과해야 했던 이유는 미학적 태도의 고수, 완성도에 대한 고집, 그리고 상호감염의 성취에 있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가 순환 논증이라는 임의적 가설을 스스로 반박하지는 않겠다. 이미 전제부터가 어설프기 때문이다. '언어는 어차피 빈약한 도구다. 그래도 언어의 힘을 믿는다'라는 피상적인 주제의식을 못박고 마치 교과서 개념 정리처럼 '하마구치 스타일'로 명명하는 것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다소 어색하고 불충분한 논의일 수밖에 없다. 평소 인물 간의 대화 장면을 먼저 떠올리고 작업을 시작한다는 인터뷰로 미루어 짐작건대, 각본을 다른 사람에게 맡긴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에는 상호감염을 향한 열망이 또렷하게 투영되었다고 본다. 송경원 편집장의 말마따나 그의 영화는 언어의 확장에 관한 통찰이라고 규정하는 편이 훨씬 마땅하다.
"있잖아, 난 말이야. 울고 싶을 땐 웃어."
실반 톰킨스가 얼굴을 음경에 비유했듯 진실은 신체에서 발기하고, 거짓은 언어 속에 암약하는 것일까?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속 에리나의 대사 그대로 미소와 눈물이 다르지 않다면, 언어와 신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전 여자친구의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키스를 목격하는 극도로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신체 역시 언어처럼 얼마든지 거짓을 꾸며낼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언어와 신체가 진실과 거짓을 두고 경합하는 경쟁사가 아니라는 건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와 <해피 아워>쯤 도달하면 아주 명료해진다. 전자의 두 주인공은 무용을 연습하고, 후자의 네 주인공은 신체 워크숍에 참가한다. 포커스는 신체로 옮겨갔지만, 영화 전체는 여전히 언어의 힘과 한계 그 어딘가에서 자발적으로 표류한다. 언어와 신체는 서로를 일부 노출시키며 일부 은폐하기도 하는 적대적 공생 관계 내지 상호보완적 관계다. 살짝 비약하면 우로보로스적 관계일지도 모르겠다. 언어와 신체를 끊임없이 사유하는 그의 필모그래피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순환 논법으로 보이기도 하니까.
"내가 배우의 연기를 카메라로 찍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배우의 신체에 우연히 일어나는 일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영화는 배우의 신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볼 수도 있다." -시네마테크 하마구치 류스케 시네토크 중
"목소리는 신체적인 상태를 많이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대사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배우의 내적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며, 내적 상태가 캐릭터와 동떨어져 있다면 그 점 역시 노출되기 십상입니다." -씨네21 '드라이브 마이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 인터뷰
하마구치 감독에게 단편 제작은 장편 제작을 위한 이야기의 씨앗을 발아시키는 실천적 행위다.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는 <아사코>와 <드라이브 마이 카>의 씨앗으로 볼 수 있다. <우연과 상상> (2021) 또한 본래 7편짜리 단편 기획이었다. 공개되지 않은 4편의 단편은 단편 묶음집이 될 수도 있고, 차기작의 원형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아마 순서대로 둘 다 제작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하마구치는 현역 감독 중 가장 활발한 단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단편 프로젝트가 장편과의 균형을 통해 진행되는 프로젝트라고 말한다.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라는 타쿠미의 대사가 떠오른다. 장편과 단편 사이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그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일까? 언젠가 균형감각을 잃고 한없이 휘청거리는 그의 영화를 만나보고 싶지만, 솔직히 그럴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의견 개진을 위해 내용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유독 전문가의 글을 많이 인용했습니다. 그만큼 제 식견이 부족하기도 하지만, 그럴 필요성이 있었다고 생각하여 작성한 글입니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일부 반응을 보면 각본도 포기하고 그냥저냥 쉬어가는 코미디 단편으로 찍은 작품으로 오해하는 것 같아 제가 다 속상하거든요. 하지만 기획전 내 다섯 작품 중 가장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인 건 또 맞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세 개 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