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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렇지 않은 얼굴 (2003)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리뷰 - (1)

by 테리

아무렇지 않은 얼굴 (2003) -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Like Nothing Happened 리뷰 (1)

CGV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는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Like Nothing Happened'는 데뷔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부터 국내에 정식 개봉되지 않았던 초기작 5편을 상영합니다. 본래 8월 6일부터 19일까지로 예정되었던 상영 기간이 연장되어, 적어도 며칠 더 극장에서 이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획전의 타이틀 'Like Nothing Happened'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영문 타이틀입니다. 하마구치 감독의 영화 속 등장인물은 모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곤 합니다. 아사코가 과거에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와 교제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체했던 료헤이, 오토의 불륜을 눈치챘음에도 아무 일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가후쿠, 자신이 과거에 카즈키와 교제했다는 사실을 친구 츠구미에게 밝히지 않고 자신의 상상 속에 숨겼던 메이코, 엔딩 직전까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분노와 공격성을 감췄던 타쿠미까지. 우리가 하마구치의 최근작에서 보아왔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장하며 진실을 은폐합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감독의 초기작부터 반복되어 온 연출 스타일입니다. 아카데미 수상, 베니스 국제 영화제 수상 등 하마구치 류스케의 이름을 수식하는 화려한 수상 경력이 생기기 전부터, 그의 작품 세계는 착실하게 축조되어 왔습니다. 저 또한 이번 특별전 덕분에 하마구치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지탱하는 정신적 뿌리와 같은 다섯 편의 초기작을 영화관에서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영화를 보지 못한 분들은 이번 기회에 관람하길 바라고, 영화를 본 분들에게는 저의 부족한 글이 영화 속 특별한 순간을 기억에 오래 남기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 초기작 특별전 상영작 목록

1. <아무렇지 않은 얼굴> (2003) | 43분

2. <영원히 그대를 사랑해> (2009) | 58분

3. <친밀함> (2012) | 4시간 25분

4. <섬뜩함이 피부에 닿는다> (2013) | 54분

5. <천국은 아직 멀어> (2016) | 38분



아무렇지 않은 얼굴 (何食わぬ顔, 2003 | 43분)
엔도, 오카모토, 하마구치는 엔도의 생일에 함께 경마장에 간다. 엔도는 고등학교 동창 마츠이를 경마장에 초대한다. 한편, 마츠이는 오래간만에 엔도를 만나는 설렘에 정장을 차려 입고 핑크색 장미 한송이를 사서 경마장으로 향한다. 경마장 앞에서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네 남녀. 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대화가 무르익어 가던 중, 하마구치는 왕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고 네 사람의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간다.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한 소녀가 사전을 읽는다.


미야케 쇼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모든 영화 부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라 말했을 만큼, 그의 영화는 사람의 얼굴이 가진 숨김-드러남의 특성을 포착해 왔다. 졸업 작품이자 데뷔작인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원제는 ‘모르는 체하는 모양, 시치미를 떼는 모양(얼굴)’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는 건 감정의 동요를 감추기 위해 가면을 썼음을 의미한다. 다섯 주인공은 변화무쌍한 관계 속에서 저마다의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한다. 특별한 서사 없이 진행되나, 어른 흉내에 서툰 청춘들의 가면무도회에는 줄곧 긴장감이 감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두 집단의 개별 서사가 한 공간에서 만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도쿄로 함께 여름 특강을 들으러 온 마츠이와 이시이, 도쿄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는 엔도, 하마구치, 오카모토는 경마장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비밀은 밝혀지고, 누군가의 비밀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츠이를 좋아하는 이시이의 마음, 엔도를 좋아하는 마츠이의 마음, 서로를 좋아하는 엔도와 오카모토의 마음은 큰 비밀도 아니라는 듯 관객에게 즉각 공개된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엔딩 시점에 이어지는 커플은 엉뚱하게도 영화 내내 교류를 보여준 적 없는 이시이와 하마구치다. 하마구치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숨긴 비밀의 진상을 끝까지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다. 그 은밀한 속내는 무엇인가? 관객조차 알 수 없는 비밀은 ‘고교 시절 이지메 가해자로 몰렸던 일화’에 있을 것이다. 데뷔작에서 감독 겸 배우를 맡은 오직 그만이 자신의 맨얼굴을 관객에게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숨김-드러남의 특성은 숨길 정보-공개할 정보를 선택하는 영화 연출의 방법론으로 확장된다. 8mm 필름으로 찍은 이 투박한 졸업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를 지탱하는 뿌리로 자리매김한다.


느슨한 관계 속에서 이어지는 소통의 시도는 대부분 불통으로 귀착된다. 단지 그들이 어른을 흉내 내는 청춘이기 때문일까? 소통과 불통의 차이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무엇인가? 같은 공간에 머무르며 같은 언어로 대화하면서도 불통이 반복되는 까닭은 시간의 상대성에 있다.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는 인물 사이에서 개인이 겪는 시간의 흐름은 상대적이다. 영화의 주요 배경으로 채택된 두 공간은 기차와 경마장이다. 전자가 밀폐된 실내이고 사람의 공간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며 외부는 고정되어 있는 반면, 후자는 개방된 야외이고 사람의 공간은 고정되어 있으며 외부의 말이 한 방향으로 이동한다. 완전히 상반된 공간 설정은 개인이 각 공간에서 겪는 시간의 밀도를 달리하고, 운동성의 주체를 바꾸며 인물 간의 심리적 시차와 거리감을 유발하려는 치밀한 의도로 보인다.


기차와 경마장의 특성이 교차하는 공간은 바로 볼링장이다. 이곳에서는 사람이 직접 움직이며, 사람이 굴린 공도 움직이고, 이로 인한 운동 에너지가 핀을 강타하며 스파크가 발생한다. 열차 내부의 폐쇄성, 경마장의 도박성과 다수 군중이 공존하는 공간에서, 인물 모두가 운동성의 주체와 객체를 오가며 같은 리듬과 감각을 공유한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핀이 넘어지는 순간만큼은 일시적인 유대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볼링장에서 나오면 다시 그들은 속절없이 흩어질 뿐이다. 손에서 공으로, 공에서 핀으로 이동한 운동 에너지는 군중 속으로 사라진다. 앞서 단둘이 볼링장을 방문한 마츠이와 하마구치가 그랬듯, 찰나의 공존은 진정한 관계 맺음으로 연결되지 못한다. 그저 한시적인 어떤 감각에 불과하다. 여름처럼 들끓는 청춘의 에너지는 다시 갈 곳을 잃고 무작위로 발산된다.


열차는 경마장과 볼링장처럼 불확실한 공간이 아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경로를 통해 일정한 속도로 목적지에 반드시 도달한다. 경주마와 볼링공은 출발하기 전까지 어떤 속도로 언제 목적지에 도착할지 알 수 없다. 하마구치가 말하는 관계 맺음과 소통은, 열차 안에서 이시이가 읊었던 나츠(여름) 돌림 노래처럼 지겹고 긴 과정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비록 그 과정의 정도(正道)가 미리 정해져 있어 한없이 지루할지라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은 아닐지라도, 창밖을 쳐다보는 것만이 유일한 유희일지라도. 경마장과 볼링장의 휘발성 에너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도박의 요행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하마구치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논지를 넘어, 어쩌면 과정이 전부라고 말하고 있는지 모른다. 감정을 넣지 않고 건조하게 텍스트만 낭독하는 행위는 훗날 그의 작품 세계를 이끄는 순수한 원동력이 된다. 그가 생각하는 영화란, 과정 전체를 나열하며-나츠에서 나데루(손으로 쓰다듬는 행위)에 이르기까지-축적된 시간의 총합이 아닐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의 이번 특별전 상영 버전은 2003년 공개된 단편 버전입니다. 2002년 공개된 1시간 38분짜리 장편 대신 편집된 단편이 실린 것은 감독이 직접 요청한 사항이라고 하네요.


1시간 미만의 단편에, 그것도 원래의 장편을 편집한 단편에는 다른 일반적인 장편 영화와 같은 기준으로 별점을 주기 애매하다는 견해입니다. 그래도 추천/비추천의 영역을 나눌 수 있으니 장편 <친밀함>을 포함하여 이번 기획전 다섯 작품 모두 별점을 매겼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세 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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