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1996) 리뷰
종종 당해낼 수 없는 영화를 만나게 된다. 샬롯 웰스가 그의 데뷔작 <애프터썬>에 사용한 문장을 빌리자면, 소마이 신지의 <이사>는 나에게 있어 지극히 정서적으로 자전적인(emotionally autobiographical) 영화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가 운명적인 영화로 다가온 주요한 까닭 역시 주인공 새미가 이혼가정이라는 점에 유대감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이사>와 <파벨만스>는 명작임이 틀림없지만, 과연 주인공의 가정환경이 나의 유년 시절과 유사하게 설정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떨까? 영화를 보고 느낀 감동이 과잉몰입으로 인한 과대평가라면? 비애에 젖은 자기 위로가 그저 때늦은 감정 발산에 불과하다면?
이러한 고민이 불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그리 많은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떤 영화는 종종 운명처럼 다가온다고 믿는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영화를 만난다면, 그것은 때로는 자연재해에 가까운 경험일 터다. 어떤 영화가 국내에 수입되어 극장에 배급되고 상영이 결정되기까지 복잡한 과정을 모두 거치고, 개인이 그 영화를 보기로 결심하고, 특정한 날짜와 시간을 골라 특정한 영화관에 당도하여, 마침내 거대한 스크린에 드리운 불가항력을 마주하기까지. 운명 외에 다른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 체험이다.
몇 년 전, 이동진 평론가가 별점 5개를 주는 기준을 설명하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한다. 누군가 이딴 영화에 만점을 주냐며 돌을 던진다면 그 돌에 맞아 죽어도 좋다는 심정이라던. 이어서 그가 덧붙인 단어 '감정적 올인'은 딱 <이사>, <파벨만스>에 사용할 법한 용례가 아닐까 한다. "네가 이혼 가정 출신이라 이 영화를 고평가하는 거겠지"라고 말하더라도 반박할 필요가 없다. 사소한 감정까지 전부 영화에 올인했기에 그대에게 할애할 감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으니까.
소마이는 일본 영화계 스튜디오 시스템의 끝자락에 커리어를 시작했고, 디지털 시대로의 전환기에 사망한 감독이다. 그가 아날로그 시대의 상징과 같은 35mm 필름 카메라와 함께 필드를 누비기 시작한 80년대는 일본 영화의 암흑기이기도 했다. 소마이가 처음 커리어를 시작한 닛까쓰의 로망포르노나 도호의 사무라이 영화 같은 장르 영화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고, 좋든 싫든 스튜디오 영화의 종언을 목격한 그 시절 영화인들은 포스트 스튜디오 시대로의 이행에 동조할 수밖에 없는 신세였다.
흥미롭게도, 평론가 후지이 진시는 스튜디오 시대가 끝나고 80년대 뉴 웨이브로 전환되었다는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오히려 이미 6~70년대부터 스튜디오와 인디펜던트라는 양 극단이 긴장하며 공존해 왔다고 지적한 것이다. 더불어, 소마이 감독은 구로사와 기요시나 모리타 요시미츠 같은 동시대의 다른 영화 감독보다 나이도 많았고 데뷔도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다. 그가 사후에 뒤늦게 '발견된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이러한 시차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현대적 작가로 보기에는 스튜디오의 그림자를 갖고 있고, 스튜디오 감독이라 보기에는 너무 현대적'이라는 후지이 진시의 평가가 소마이 감독을 온당하게 표현한 문장일 것이다.
카메라 동선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할 수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롱테이크의 희소성은 다소 퇴색되었다. 촬영 공간에 제약이 있다면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면 그만으로, 적어도 롱테이크 사용에 있어 기술적인 영역의 고민은 대부분 해소되었다. 그렇다 보니 이러한 시대에 뉴욕 브로드웨이 한복판을 굳이 롱테이크로 촬영한 <버드맨> 같은 괴짜가 오히려 엄청난 주목을 받는 것이다. 반면, 아날로그 시대의 롱테이크는 지금보다 훨씬 더 희소성 있는 고급 기술이었다. 35mm 필름 카메라 한 롤로 촬영 가능한 한 쇼트의 길이는 길어봤자 12분 정도였고, 무거운 카메라 및 촬영 장비의 이동도 지금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소마이가 롱테이크로 칭송받은 것은 그 기술적 훌륭함 덕분인가? 그렇지 않다. 롱테이크가 소마이를 보는 현대의 관객이 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핵심 요소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소마이가 태어난 1948년에 이미 히치콕의 <로프>가 공개되어 롱테이크의 교본이 되었고, 자국 내에서도 기술의 완성도만 놓고 보면 미조구치 겐지의 아성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정성일) 소마이는 롱테이크가 아니면 절대 안 된다는 식으로 롱테이크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의 후기 작품을 보면 점점 롱테이크가 줄어든다. (후지이 진시)
촬영 상황 전체를 세심하게 컨트롤하는 미조구치 롱테이크와 비교하면, 소마이의 롱테이크는 통상 무리하게 사용된다. (정성일) 그 자신도 '과장된 방법론'이라 표현했을 만큼, 감독조차도 컨트롤할 수 없는 예측불허한 현장의 에너지를 믿는 사람이었다. (후지이 진시) 이러한 설명에는 반신반의하는 입장이다. 그가 급작스레 돌출되는 순간의 현장성을 믿었다는 데에는 의심이 없으나, 카메라 시선에 자아를 부여하려는 듯한 노골적인 의도성은 <태풍 클럽>만 봐도 단숨에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춤을 추는 아이들과 그들을 지켜보는 미카미의 등을 멀리서 응시하며 천천히 무대로 접근한다. 이윽고 카메라는 잠시 멈춘다. 이때 무대를 지켜보는 관객은 미카미 한 명이다. 그런데 영화는 돌연 미카미마저 무대에 세우더니, 텅 빈 객석을 뒤로하고 다시 무대 가까이로 접근한다. 그리하여 관객을 방금까지 미카미가 있었던 객석으로 위치시킨다. 관객은 이 음울한 청소년들의 퍼포먼스를 강제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카메라 시선의 움직임에는 선명한 의도가 담겨있다. 카메라는 렌즈가 비추는 광경을 그대로 관객이 보게 된다는 점을 의식한 것이다. 이 사실을 관객에게 비밀로 할 생각도 딱히 없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소마이의 롱테이크는 영화가 외부세계를 의식하게끔 함과 동시에, 이 사실을 관객에게 주지하려 하는 독특한 실험적 시도로 읽힌다. 스튜디오 영화와 인디펜던트가 수십 년간 불편한 공존을 해왔듯, 그 경계에 선 시대의 산물인 소마이는 관객과 카메라의 불편한 공존을 도모한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는 롱테이크보다 '원씬 원컷'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정성일 평론가는 이를 두고 단순히 한 외래어를 표기하는 두 국가의 언어적 차이로 보지 않았다. 하나의 장면에 모순된 감정과 상황을 한 번에 담는 일본의 전통적 미학 세계관이 반영된 단어로 보았다. 즉, 소마이 감독의 원씬 원컷이 주는 부자연스러움과 돌발성은 일본의 미학 세계에서 의도적으로 빠져나오기 위한 도구라는 설명이다. 이어서 그는 소마이를 높게 평가하는 국내의 동료 평론가들조차 그를 제대로 조명하는 글을 쓴 적이 없다고 지적하며, 소마이 감독의 예술 세계를 가장 잘 비평한 사람이 다름 아닌 하마구치 류스케라고 말한다. 그는 감독이기에 앞서 도쿄예술대학의 대학원 과정을 수료한 엘리트 영화학도다.
하마구치가 발간한 <다른 영화와> 2권의 영화 비평 중 소마이 신지에 관한 단락을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소마이의 영화 세계가 작동하는 원리로 '거리'와 '경계 넘음'을 언급한다. 하마구치에 의하면, 소마이 스타일의 롱테이크는 여기에서 저기까지의 거리, 여기와 저기라는 공간의 분리와 경계가 핵심이다. 통상적으로는 숏으로 나눠 분할할 장면조차 롱테이크를 사용하여 인물이 경계를 넘는 과정을 담아낸다. 소마이 롱테이크의 요점은 'A와 B가 서로 얼마나 먼 거리인가', 'A에서 B로 넘어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가'에 있지 않다. '롱테이크의 시작과 끝을 비교할 때 인물이 얼마나 달라졌느냐'가 이 고집스러운 연출의 노른자위다.
렌과 아버지가 호텔 밖에서 대화하는 장면에 사용된 롱테이크 기법과 카메라 워크는, 렌이 초반부 언덕 아래에 누워있던 아버지와 장난치던 장면의 변주로 보인다. 높이 차이로 렌과 아버지의 상하관계를 지속적으로 바꿔가며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흐리다가, 불현듯 카메라를 부감으로 잡으며 부자연스러운 긴장감을 조성한다. 카메라의 시선에 자아가 서려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타자의 시선을 의식한다. 방식은 약간 다르지만, 하마구치의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프닝과 엔딩 씬은 소마이 스타일에 깊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이사>의 여러 롱테이크 중 친구 타치바나와 언덕을 오르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렌은 타치바나와 부모님의 별거라는 공통점을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두 인물은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언덕을 오르며 대화를 나눈다. 타치바나는 사실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고 고백한다. 게다가 그 여자는 곧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있다는 소식까지 공유한다. 렌은 이 말을 듣고 충격에 빠진다. 지금껏 자신이 전념해 왔던 가족의 재결합이란, 가정을 '아버지-어머니-나' 3인의 구성으로 되돌리는 일, 즉 '역행'이었다. 불타는 가족사진을 꺼내 불을 껐고, 말이 안 통하는 어른들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질주했고, 오사카로 가는 기차에서 역방향 좌석에 앉았으며, 어머니가 집안 규칙을 강요할 때는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를 추며 온몸으로 역행에 힘썼다.
그런데, 만약 아버지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다면? 또 다른 렌이 태어난다면? 앞으로 역행은 두 번 다시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린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를 떠올리자, 이내 렌의 세상은 무너진다. 영화는 충격 받은 렌의 얼굴을 클로즈업하거나, 배경 음악을 삽입하는 방식으로 렌의 감정을 묘사하지 않는다. 현재 상영 중인 소마이 감독의 <태풍 클럽>이나 <여름 정원>의 한 장면처럼 비를 퍼붓는다. 렌은 충격에 빠진 것도 잠시, 자신이 올라온 언덕을 되돌아 뛰어 내려간다. 이 롱테이크는 렌으로 시작하여 렌으로 끝난다. 이때, 언덕을 오르기 전의 렌과 언덕을 내려가는 렌은 서로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된다.
해가 쨍쨍한 여름, 야외 촬영에서 원하는 타이밍에 폭우를 재현하려면 반드시 대형살수차가 필요하다. 소마이 감독은 야외 촬영을 할 때도 마치 스튜디오 촬영의 조건처럼 인공비를 동원한다. <이사>의 언덕 장면에 등장하는 비는 현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마치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형상화한 것처럼, 영화라기보다는 만화에 가까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폭우다. 하마구치는 이러한 연출적 고집을 용기라고 표현한다. 소마이는 스튜디오 쇠락 이후의 영화 감독이면서도 선배 세대보다 스튜디오의 존재를 더 의식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소마이 신지는 '마크'란 어휘를 즐겨 사용했다. 여기서 마크는 스튜디오의 로고를 의미한다. 그는 이 작품이 어느 스튜디오의 작품인지를 많이 의식했다. 소마이 신지는 영화 스튜디오가 쇠락한 다음 데뷔한 감독이지만 오히려 선배들보다 스튜디오의 존재를 더 의식하고 있었다." (후지이 진시)
정성일 평론가는 소마이를 뒤늦게 발견된 감독으로 평가하면서도, 재평가가 일정 수준으로 완료된 지금도 유독 해외에서는 저평가받는 경우가 있다고 말한다. 소마이 감독 사후부터 지금까지 국제적으로 꽤 많은 회고전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낭트 3대륙 영화제, 에든버러 국제 영화제, 파리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있었다. (긴바라 유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2005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열린 회고전은 일본 바깥에서 열린 최초의 소마이 신지 회고전이었다고 한다. (유운성) 이렇게 사후 20년 넘게 재평가의 세월을 지나온 덕분에 <이사>는 국내에 재개봉할 수 있었다. 하지만 회고전이 자주 열렸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국제적 관심도와 명성 자체는 쭉 낮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있었던 한 가지 주요한 사건은 2023년 제80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4K로 리마스터링 된 <이사>가 최우수 복원 영화 부문을 수상이다. 당시 경쟁 부문에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출품했던 하마구치 감독은 "일본 바깥에서 소마이 신지 감독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사>를 보고 "소마이 신지가 그 세대에서 최고의 감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라고 했고 “유일하게 넘어서고 싶었던 감독”이라며 격찬을 아끼지 않은 바 있다.
이렇게 일본 내에서 압도적인 인정을 받는 반면, 각종 영화제를 비롯한 국제무대에서는 간간이 소수 씨네필의 지지를 받는 정도다. 단지 일본인끼리 팔이 안으로 굽는 것일까? 시대적 시차 때문에 그의 영화가 관객에게 늦게 도착했다는 점이 문제일까? 왜 소마이 신지는 일본 바깥으로 나가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가? 바로 소마이 감독 영화에 빼곡히 쌓인 로컬 시네마적 특성 때문이다. 현시점에서 소마이의 세계를 서술하는 데 있어 가장 적합한 개념은 로컬 시네마라고 본다. 롱테이크가 그의 연출적 특징인 것은 맞지만, 롱테이크는 '소마이 스타일'에 입문하기 위한 형식적 접근에 더 가깝다. 로컬 시네마적 특성은 그의 세계를 훨씬 더 적절하게 설명하는 개념이다.
당신은 <이사>가 어느 지역에서 촬영되었는지 눈치챘는가? 일본에 여행 몇 번 가본 한국인이 카메라에 담긴 풍경만 보고 지역을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이사>는 교토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그러나 금각사, 은각사, 기요미즈테라 등 교토의 랜드마크는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배경에도 한 컷조차 나오지 않아, 일부러 피해서 찍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우리는 엔딩이 되어서야 영화가 교토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사카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다음 역은 교토 역입니다"라는 안내방송이 나오기 전까지, 영화는 공간적 배경을 명시하지 않는다. 일본인에게 있어 교토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다른 아무 지역에서 촬영한 영화와는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의미심장하게도, 일본인은 <이사>를 보고 첫 장면부터 교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렌 가족이 교토 방언을 쓰기 때문이다. 일본어를 모르는 외국인은 전혀 알 수 없는 청각 정보가 시작부터 영화를 감싸고 있는 것이다. 렌과 언덕을 함께 오른 타치바나는 처음 등장할 때 학교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묘사된다. 이는 그녀가 이사온 전학생이기 때문이다. 교토 방언 사이에서 한 줄씩 들려오는 요코하마 방언의 즉각적인 이질감, 외국인은 결코 읽어낼 수 없는 괴리감이다. 영화는 사실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 모두 명시하고 있다. 렌은 미노루와 비밀 계획을 궁리하며 방학 첫날에 계획을 실시하기로 한다. 외국인 입장에서는 단지 7~8월 사이의 여름방학 시즌으로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인은 정확한 날짜를 알 수 있다. 렌이 아빠 회사 앞에서 전화할 때 도심에는 축제가 한창인데, 교토 기온에서 열리는 '기온 마츠리' 중에서도 매년 7월 17일 반복되는 '야마보꼬 순행'이 진행 중이다. 후반부 렌과 어머니의 여행지가 오사카라는 점도 일본인에게는 매우 직관적인 정보다. 렌이 경험하고 온 지역 축제 '텐진 마츠리'가 매년 7월 24일, 25일 양일간 열리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는 기온 마츠리, 텐진 마츠리 같은 단어를 직접 대사로 언급하지 않는다. <이사>는 일본인만 알 수 있는 로컬적인 특성을 겹겹이 쌓아 의외로 진입장벽이 매우 높은 영화다.
앞서 언급했듯 소마이는 자국에서 꾸준히 높은 평가를 받아왔다. 고레에다, 하마구치 이외에도 구로사와 기요시, 아오야마 신지 같은 유수의 영화 감독, 하스미 시게이코 같은 평론가도 그를 극찬했다. 이들은 소마이가 쌓아 올린 영화의 로컬성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한다. 그들이 이 의도적인 로컬성을 인식한다고 해도 어디까지나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 로컬성을 외국인으로서 바라볼 때의 감각을 결코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소마이 영화의 로컬성은 동시대 일본 감독들과 자신의 세계를 분리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함과 동시에, 진입장벽을 형성하여 국제적 인정을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영화의 제목은 관객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강력한 선전물이다. 예컨대, 제목이 <괴물>인데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떨까? 관객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사>는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이사하는 이야기인가? 영화 오프닝은 렌 가족이 비현실적으로 뾰족한 삼각형 테이블에서 식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다른 정보를 제공하지 않더라도, 관객은 이 가정이 불화를 겪고 있다는 점을 직감하게 된다. 테이블의 모서리는 스크린(관객)을 향해 있다. 사실상 화살표로 보이기도 하는 모서리는 관객을 지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프닝부터 영화 속으로 참여하게 된다.
식사를 마치면 이사의 주체가 렌의 아버지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버지의 이사는 대략 10분 정도 흐르면 완결된다. 영화는 아버지의 이사인 것처럼 관객을 오도하게 만들고, 이사의 의미를 후반부까지 비밀스럽게 숨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사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이사의 의미는 무엇인지 고민하게 한다. 물론 주인공은 누가 보아도 렌일 것이다. 물리적으로 보면, 집이 있는 교토에서 축제가 열리는 오사카로의 이사가 진행된다. 엔딩에 이르러 어머니와 기차를 타고 다시 교토로 돌아오며 끝나기 때문에, 이사보다는 차라리 일시적인 '이동'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영화는 소설 <두 개의 집>을 원작으로 한다. 원작은 어머니와 렌이 방학을 맞아 아버지의 집에 방문하며 끝난다. 끝까지 렌이 아버지의 집을 보지 못한 채 이야기가 완결되는 데 비해, 영화는 10분 만에 아버지 집 탐방을 마치고 두 번 다시 방문하지 않는다. 따라서, 각색된 <이사>의 구조적인 측면을 볼 때 이사의 주체는 렌으로 보는 편이 온당하다. 영화 타이틀 시퀀스에서 '오히코시(이사)'를 외치는 앙칼진 목소리의 주인공도 렌이다.
<이사>는 주인공 렌이 교토-오사카를 왕복하는 여행에서 죽음의 의식을 통과하며, 아이에서 어른으로 거듭나는 성장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이때 교토가 현실적인 공간이라면, 오사카는 비현실적이고 영적인 기운이 감도는 공간이다. 렌은 여름방학 첫날 실시한 비밀작전에 실패하고 친구 미노루와 만나 "작전에 실패했어"라고 말한다. 이후 저녁이 되어 집에 돌아가는데, 렌이 지나는 배경은 뜬금없게도 공동묘지다. 수많은 묘비 사이에 켜진 등불이 스산하게 렌을 비춘다. 교토는 현실적인 공간이기에 판타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렌은 이 장면에서 죽음을 경유했다. 이것이 렌이 처음 죽음의 의식을 치른 시점이다. 두 번째로 마주한 죽음의 의식은 오사카에서 진행된다. 호텔 밖에서 "아빠는 나를 사랑해"라며 질문한 렌은 "다이스키"라고 답하는 아버지에게 금방이라도 안길 듯 달려가지만, 도리어 그를 휙 지나쳐 달려간다. 도심을 떠돌던 렌은 어떤 할아버지에게 물세례를 맞고 그의 집으로 들어가 낮잠을 잔다. 옷을 갈아입고 누운 렌은 유사 죽음을 경험한다.
렌에게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고 밝힌 할아버지는 잊는다는 게 슬프지 않냐는 렌의 질문에, "추억이라는 건 한 손에 들어올 정도면 충분해"라고 답한다. 이전까지 역행에 열중했던 렌은, 할아버지의 조언으로 역행의 무가치함을 깨닫게 된다. 렌은 추억을 잊지 않고자 불타는 가족사진을 건져냈었고, 감정적으로 벼랑 끝에 몰리자 알코올 램프를 깨트리며 교실을 불태웠다. 잊는 것이 더 낫다는 조언을 체화한 이후로는, 가까이 가려다 저지당할 만큼 텐진 마츠리의 불에 깊이 빠져든다. 텐진 마츠리는 본래 제사로 시작되었다. 역모죄로 억울하게 죽은 헤이안 시대 학문의 신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애도하는 제사가 지금의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이처럼 소마이 감독은 로컬성이 짙은 텐진 마츠리를 통해 렌이 통과하는 죽음의 의식에 애도의 의미를 심어두었다. 이는 후반부 바닷가에서 자기 자신을 향한 애도로 드러난다. 작중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던 물과 불이 처음으로 한 장면에서 화합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역행만이 가족의 재결합을 위한 해결책이라 여겼던 렌은,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는 성숙한 어른이 된다.
논쟁의 여지가 있겠지만, 영화가 렌의 성숙을 묘사한 3가지 지점을 밝히려 한다. 먼저, 영화의 톤이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변모하는 명확한 터닝포인트가 있다. 혼자 오사카 거리를 떠돌던 렌은 축제 현장에서 어머니에게 발견된다. 다리 위의 어머니는 다리 밑의 렌에게 "엄마 걱정 좀 시키지 마"라며 화를 낸다. 렌은 "누가 걱정해 달라고 했어?"라고 응수한 후, "나 빨리 어른이 될게"라는 다짐을 전하고 갑작스럽게 배가 아픈 듯 주저앉는다. 명백한 초경의 암시다. 이 우회적 표현을 조금 더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로 초경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초경을 뜻하는 단어 '쇼-쵸-(しょちょう/初潮)'의 두 번째 글자 '조(潮)'는 조수간만의 차에 쓰이는 조 자다. 한자사전에 이 단어를 검색하면 세 번째 뜻으로 '바닷물'이 쓰여있다. (정성일) 초현실적인 롱테이크로 촬영된 산속 모험을 마치고 렌이 마침내 도착한 바다, 소녀가 초경을 경험하고 어른으로 거듭나는 과정은 단어 속에도 은밀하게 숨어있다. 당연한 소리지만, 영화는 이러한 로컬 시네마적인 특성을 관객에게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리고 나머지 2가지 지점은 순서 상으로는 초경 암시 장면 전이다. 영화 전체에서 가장 격렬한 에너지가 시시각각분출되는 순간은 렌의 두 부모와 유키오, 와카코까지 4명의 성인이 옥신각신 다투는 롱테이크 장면일 것이다. 아이 같다 못해 유아퇴행적일 정도로 이기적인 두 부모는 서로의 한심함을 자랑한다. "왜 낳았어?", 렌의 한마디는 몇 분 이상 지속되던 지리멸렬한 상황을 순식간에 전환한다. 영화의 구심점과 같은 결정적 순간에 던져진 이 대사는, 소마이가 세상의 모든 렌을 위해 어른들에게 대신 던지는 질문으로 들린다. 렌의 어머니는 렌이 들어간 화장실 유리문을 주먹질로 깨부순다. 피칠갑이 된 어머니의 손, 온통 피투성이가 된 화장실, 몸에 피가 묻은 렌, 그리고 렌과 어머니가 대치한다는 공통점으로 보아 이 장면은 후반부 초경의 예고로 보인다. 마지막 지점은 할아버지에게 물세례를 맞는 장면이다. 종교적인 의미로서의 세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렌이 처음 남성의 사정을 경험하는 은유로 보인다. 아역 배우에게 이러한 표현 방식을 덧씌우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고 그른지를 따지기에 앞서, 이것이 영화적으로 과도한 해석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밝힌다. 3가지 지점을 순서상으로 나열하면 초경 예고-물세례-초경이 된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들은 뒤 초경을 겪고 어른이 된 렌은 과거의 아이였던 렌을 애도하는 자기의식, 제사를 거행한다. 언덕을 오르기 전의 렌과 언덕을 달려 내려가는 렌이 나뉘었듯, 어머니와 대화하고 주저앉기 전의 렌과, 일어나서 모험을 마치고 마침내 바다에 도착한 렌으로 나뉜 것이다. 판타지에 가까운 후반부는 하마구치가 언급한 경계 넘음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 후반부 약 30분이 길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본래 어른됨이 초현실적인 전력투구를 요구하는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기 때문이리라. 어른됨은 누구나 처음 겪는 일이다. 어렵고 지지부진하여 그저 아득히 먼 일처럼 느끼고 만다. 모순적이게도, 어른이 되는 순간은 경계를 넘듯 순식간에 완료된다. 어른이 되는 과정은 험난하고 길지만 '어름 됨'의 현재완료는 경계를 넘듯 단숨에 벌어진다. 렌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는 대신, 아버지를 등뒤로 하고 아이였던 과거의 자신에게 달려가 있는 힘껏 안아주며 작별한다. 만약 렌이 아이에 머물렀다면, 호텔 앞에서 그대로 아버지에게 달려가 안기며 응석 부렸을 것이다.
끝으로, 렌이 바닷가에서 외치는 대사 "오메데토"에 대한 코멘트를 덧붙이고자 한다. <러브레터>의 "오겡끼데스까"에 버금가는 강력한 대사지만, 이 또한 로컬성에 가려져 해석이 필요한 텍스트라 부각이 덜 되는 편이다. 한국어 자막과 영어 자막은 각각 "축하합니다", "congratulations"로 번역되었다. 생략된 맥락에는 "오메데또-고자이마스(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라는 새해 인사가 있을 것으로 본다. 7월에 웬 새해 인사냐 하겠지만, 렌에게 바다에서 맞은 아침은 어른 렌으로서의 첫날이다. 어머니는 "새해 인사치곤 좀 이른 것 아니니?"라며 렌의 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강을 건너 렌에게 접근하지도 못한다. 어머니 대사의 원문은 "소메노스케-소메타로(染之助-染太郎)야? 너무 이른데?"이다. 오소메브라더스(お染ブラザーズ)로 불리는 소메노스케-소메타로 듀오는 60~90년대에 활동하던 형제 엔터테이너다. 특히 새해 맞이 기념 방송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おめでとうございます)'를 유행어처럼 말하던 그들의 모습 때문에, 렌의 어머니도 그들을 의식하여 장난스럽게 농담한 것이다.
<이사>를 둘러싼 비평이 유독 주관적 설명의 나열이나 아름답다는 식의 인상비평 위주였던 까닭은, 영화가 로컬 시네마적 특성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음에 있다. 소마이가 <이사>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인가? 모든 아이는 필연적으로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것, 이미 어른이 된 사람들은 아이의 어른됨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비참하게도 현실은 아이의 어른됨에 끔찍할 정도로 무신경하다는 것. 실제 세상에는 수많은 렌이 존재할 것이다. <이사>의 현실 인식은 <태풍 클럽>만큼이나 잔혹하고, 서늘하다 못해 차가울 지경이다. "우유부단한 부모보다 훨씬 더 행동력이 넘치지만, 거기에는 반항이라는 과정마저 빼앗긴 아이들의 무딘 짜증이 절제된 서스펜스가 되어 팽팽하게 감돌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선혈이 낭자한 폭력 영화보다 훨씬 더 폭력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스미 시게히코)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풍 클럽>과 달리 <이사>에는 미래가 있다. 여름날의 날씨처럼 밝고 쾌청한 꽃길은 아닐지언정 말이다. 우리는 렌에게 동정심을 느끼기보다, 그가 묵묵히 걸어갈 앞날을 응원하게 된다. 교토로 돌아가는 기차에 탄 렌은 전과 다르게 정방향 좌석에 앉아 있다. 렌은 역행하던 과거를 청산하고 순행(順行)하기로 했다. 중학교 교복을 입고 앞으로 나아가는 렌을 보면 자못 흐뭇한 기분마저 든다. 무엇보다 가장 기특한 점은 "왜 낳았어"라는 질문에 스스로 해답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렌은 인생에서 한 번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을 원망하게 될 것이다. 부모 입장에서도 그 하드코어한 질문에 마땅히 들려줄 대답은 없다. 그들도 자신의 부모에게 듣지 못했으니까. 렌은 '부모가' 왜 자신을 낳았는지 고민하는 일을 멈추고,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직접 부딪히며 배우기로 했다. 마츠리는 끝났으며 완실한 어른이 된 렌은 부모의 일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자기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해당 리뷰는 8월 1일 씨네큐브에서 진행된 정성일 평론가의 <이사> GV를 토대로 다양한 문헌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습니다.
<이사>의 엔딩 크레딧을 보며 '시간이 약이다'라는 문장을 떠올렸습니다.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흐름에 따른 망각일지 모릅니다. 시간이 지나며 고통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시간이 지나며 과거의 고통을 아예 없었던 일처럼 잊어버리는 것이죠.
제 어린 시절을 돌이켜 보면, 사소한 사건 하나에도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받곤 했습니다. 아마 불안정한 가정환경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그 많은 사건들의 디테일이 낱낱이 기억나지 않네요. 지나간 과거는 망각하고, 새로운 무언가로 나를 다시 채우는 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은 아이를 어른으로 변태시키는 약일 수도 있겠네요.
어제 재개봉한 <여름정원>도 첫날 바로 감상했는데 역시 <이사>보다는 확연히 처지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이사>>>태풍 클럽>여름정원 순서네요. 나머지 작품도 영화관에서 만나길 기대합니다만... 소마이 감독이 커리어 내내 스튜디오를 계속 옮기며 작업한 터라 저작권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관련은 없겠지만 국내수입도 <이사>와 <여름정원>은 찬란이, <태풍 클럽>은 엠엔엠이 했고요. OTT도 사정은 비슷한지 소마이 감독의 다른 작품 중 오직 <러브 호텔>만 왓챠에서 감상 가능합니다.
올해 극장에서 본 영화 중 <벌집의 정령>, <자전거 탄 소년>, <그림자 군단>에 이은 4번째 만점작이네요. 전부 재개봉이라는 특징이 눈에 띕니다. 작년에 비해 글로벌 영화계가 전반적으로 창의력이 뛰어난 작품을 선보이는 데 무척 애를 먹고 있는 것 같네요. 재개봉작은 아니지만 드디어 OTT로 감상한 PTA의 <마스터>도 만점 주었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제 별점은 다섯 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