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의 소원

이지연 작가 <잿소리>2025, 경기도립미술관

by 최영란

난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어. 한쪽 모서리가 조금 부서졌거든. 내가 있는 작은 창고에는 ‘불량’이라는 푯말이 붙어 있어. 불량이 뭔지는 모르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지. 그래서 나 혼자 이름을 지었어. 온통 새까마니까 밤이라고. 게다가 밤은 친구도 많잖아. 반짝거리는 별도, 은빛으로 빛나는 달도 모두 밤의 친구지.

동글동글 반듯하게 태어난 다른 연탄들은 넓고 환한 창고에 모여 있었어. 나란히 줄 맞춰 앉은 모습이 참 다정해 보였지. 저마다 멋진 불꽃을 피우겠다며 재잘거렸어. 유명한 식당에 가서 손님들의 박수를 받으며 고기를 굽고 싶다는 둥, 달콤한 설탕을 녹여 마법처럼 부풀려서 뽑기를 만들겠다는 둥 별별 연탄이 다 있었지.

“얘들아, 나랑 친구 하자. 난 밤이야!”

연탄들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크게 소리쳤어. 그래야 날 봐줄 것 같았거든.

재잘거리던 소리가 뚝 멈췄어. 연탄들이 모두 나를 쳐다봤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어. 불량 연탄이 이름까지 지었다며 놀리기 시작했지. 어떤 연탄은 내가 곧 가루가 될 거라며 혀까지 차더라.

난 기운이 쭉 빠졌어. 친구는커녕 놀림감만 됐으니까. 슬퍼서 까만 몸이 더 새까매졌지.


그때였어. 연탄 공장 문이 드르륵 열리고 남자아이가 양철통을 들고 들어왔어. 날씨가 제법 매서웠는데 목이 다 늘어난 낡은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공장 아저씨가 그 아이에게 말했어.

“혜성아, 저기 있는 저 연탄, 조금 부서졌지만 쓸 수는 있을 거다. 불량품은 돈 안 받을 테니 언제든 가져가거라.”

혜성이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어. 그렇게 난 혜성이를 따라나섰지. 혜성이는 나를 양철통에 담고 소중한 보물처럼 끌어안았어. 가슴이 두근거렸어.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게 친구일까?

혜성이의 집은 언덕 꼭대기에 있었어. 불기 없는 썰렁한 집에 할머니 한 분이 누워계셨지. 다 타버린 연탄처럼 머리도 얼굴도 하얀 할머니였어. 혜성이는 아궁이에 나를 넣고 불을 붙였어. 난 정성을 다해 불꽃을 피웠지. 혜성이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었거든. 곧 집에 훈기가 돌았어. 혜성이가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 옆에 누웠지. 덜 닫힌 방문 틈으로 하얀 머리와 작고 까만 머리가 보였어.


한밤중이었어. 밖엔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었지. 밤새 불꽃을 피운 나는 어느새 하얗게 변해있었어. 방에서 스르륵 할머니가 나왔어. 할머니는 연기 같기도, 달빛 같기도 했지. 시간이 멈춘 듯했어.

“밤아, 우리 혜성이 곁에 있어 다오. 난 멀리 떠나야 하거든.”

할머니가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갔어. 할머니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았는지, 왜 달빛처럼 일렁이는지 궁금했지만,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 차가운 눈이 내 몸에 닿았지. 처음엔 금방 녹아버리더라. 녹아버린 눈이 하얀 내 몸에 눈물자국을 만들었어. 차가운 바람이 불자 내 몸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지. 할머니는 나에게 단단하게 눈을 붙이고, 동그란 눈덩이를 하나 더 만들어 내 위에 올렸지.

아침이 되자 혜성이가 울면서 뛰쳐나왔어. 할머니가 먼 길을 떠났나 봐. 사람들이 오가고 혜성이 혼자 남았어. 난 창문 아래에서 혜성이를 기다렸지. 혜성이의 울음소리가 창문을 넘어왔어.

나뭇가지 팔로 창문을 톡톡 두드렸어. 혜성이가 창문을 열었지.

“눈사람이……, 할머니랑 만들기로 했던 눈사람인데…….”

혜성이가 밖으로 달려 나왔어. 난 두 팔을 활짝 벌렸지. 혜성이가 나를 끌어안았고, 나도 혜성이를 꼭 끌어안았어.

이것 봐. 나에게도 지켜주고 싶은 별 친구가 생겼어.



밤이는 이지연 작가의 설치미술 작품 <잿소리> 2025, 경기도립미술관, 를 보고 영감을 받아 쓰게 되었다.

구운 연탄 200장으로 제작된 이 작품에서는 식물이 자라고, 샘처럼 물이 솟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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