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레던 것은 꼭 설레지 않게 된다

독일 교환학생의 일상

by 반하의 수필


내 방





남은 것은 근육통


격렬한 일주일이 지나고 독일에서 산 두 번째 몰스킨 일기장과 함께 7월이 시작됐다. 긴팔 긴바지를 입었지만, 겉옷을 챙기지 않아 후회할 정도로 쌀쌀한 날이 이어졌다. 저녁 공원에는 스웨터를 입고 입을 맞추는 연인들이 보였다. 그러다 해가 쨍쨍하게 비추는 날이면 짧은 탱크탑을 입고 길거리에서 맥주를 마시는 여름의 풍경이 펼쳐졌다. 러브버그 대신 납작복숭아가, 후덥지근한 습기 대신 건조하고 선선한 바람이 있어 한국의 여름이 그립지 않았다. 유로파 축구 경기가 한창이었던 것이 시끌시끌한 여름의 향기를 더했다. 점점 길어지는 해는 오후 9시가 되어도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늘어지듯 긴 하루에 낮잠을 자고 일어나도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착각이 일어 할 일을 미루다 “벌써 밤 10시잖아?”하며 그제야 책상에 앉는 일이 잦았다.


독일에 온 지 3개월이었다. 빈티지샵이나 플리마켓에서 산 것이나 ‘가져가세요’라는 종이가 붙은 주택 앞이나 학교의 구석에서 데려온 것이 옷장을 채웠다. 마시기 떨떠름하던 수돗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 기어이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다가도 심심하면 물을 마셨다. 하지만 독일인 친구가 하듯 따뜻한 물도 싱크대 손잡이의 방향을 바꿔 따라마시지는 않았다. 전기밥솥 대신 냄비로 밥을 했다. 그것이 익숙하지 않아 기숙사 주방에 있던 공용 냄비를 거의 전부 태웠다. 뿌연 연기가 주방을 채워 화재경보기가 울린 적도 두어 번 있는데 그때마다 어쩔 줄 몰라 플랫 전체가 시끄러운 경고음으로 가득 찼다. 큰 키의 플렛메이트가 뚜벅뚜벅 걸어 나와 소방관처럼 천장에 달린 그것을 눌러 꺼주었다. 이제는 밥을 태워도 다급히 창문을 활짝 열고 스스로 의자를 밟고 올라가 능숙하게 끌 수 있게 되었다. 겁먹어서 오래 하지 않았던 세탁 카드를 사용해 빨래를 하고 좁은 방이 아니라 뻔뻔하게 빨래를 주방에 널어 말린다.


익숙한 것이 생기는 건 설레던 것이 더 이상 설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마치 만유인력의 법칙처럼 가슴 뛰던 것들에 마음이 식어버리고 꽃보다 달보다 아름답던 사람이 평범해지는 순간이 온다. 4월 초에 쓴 일기를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아름답고 설레고 떨리게 보았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영어 수업을 하시는 레이첼 교수님의 수업에서 쓴 메모에는 교수님의 시계며 옷의 패턴, 신발까지 그려져 있다. 그녀의 우아한 영국 발음과 목소리에 감탄하며 커다란 창문 앞에 선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지켜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제는 그저 지루해하며 어서 수업이 끝나기를 바라는 뒷자리 학생이 되었다. 교수님이 어떤 옷을 입으셨는지는 쳐다보지 않아 기억할 수 없다. 친해지고 싶어 잔뜩 기대하며 말을 붙이던 친구와는 곧 헤어질 사람처럼 간단히 인사하고 내 갈 길을 간다. 많은 것들을 반짝반짝하게 보던 눈을 잃고, 덜 겁먹고 덜 실망하고 덜 놀라는 내가 보인다. 새로운 것이 나를 휩쓸어가길 기대하지 않아도 내게 주어진 해내야 하는 일들이 있다. 모르는 사람에게 억지로 말을 걸지 않아도 말을 나눌 사람이 생겼다. 어느정도 채워진 일상에서 지난 시절을 되돌아보며 비어 있다는 것은 기회가 있다는 것임을 안다. 모든 시기는 지나간다.


긴 여름 방학이 오기 전 일상의 끝자락, 나는 자주 심심함에 투정한다. 친구들은 저마다 성공적인 종강을 얻으려 애쓰고, 나도 독일어 시험 준비나 팀프로젝트 따위의 해내야 하는 일을 적당히 해낸다. 떠나는 것은 미뤄두고, 기대되는 일은 없지만 주어진 할 일들을 하며 열심히 살아내기.


열심히 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는 뻔하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산책도 하지 않고 숙제도 하지 않고 방에서 드라마 정주행을 하거나 유튜브만 보다가 무엇을 했는지도 잊고 찝찝한 마음과 어지러운 머리, 거북한 속만 남겠지. 방에는 눅눅한 과자 냄새가 나고 기분이 더 안 좋아질 것이다. 이미 여러번 거쳐보았다. 일기장을 펴서 이 밋밋한 하루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적어본다. 산책, 새로운 요리 도전, 이북으로 책 읽기, 유튜브 영어 강의 듣기, 독일어 온라인 강의 듣기, 친구들이랑 쌀국수 먹으러 가기, 쌀 사러 가기, 도자기 하러 BTZ 가기, 도서관 가서 독일어 동화책 읽기, 멘자에서 점심 먹기, 영상 만들기, 블로그 쓰기, 인스타그램에 사진 올리기, 유지혜페이퍼 읽기, 여행 계획하기.


새로운 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히든 살금 살금 들어가든, 그런 문이 보이지 않는 시기가 일상인 것이다. 그때는 그냥 일상을 살아야 한다. 오늘의 평범한 하루가 나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기억이 될 터였다. 게으르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나의 지금은 아주 많은 사람에게 특별한 축하와 응원을 받은 것이었다. 떨렸던 교환학생 면접과 많은 사람들의 축하와 응원이 생생하다. 특이하고 이상하다. 잠에서 깨고 잠들고 밥을 먹고 웃거나 울거나 지친 표정이다. 매일이 평생이 하루일 뿐이다. 다만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동시에 지금의 나를 그리워하는 게 보이는 그런 이상하고 특별한 날들. 그들의 시선 속에서 지금의 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



체육 수업 시험 날






유로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