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컨슈머
김호연의 <불편한 편의점>을 오래전에 읽었다.
소설의 배경이 편의점이라 마트에서 일하는 사람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거기에 보면 JS of JS라는 말이다. 진상중의 진상이란 뜻이다.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의 한국식 표현인 것 같아 재미있다.
어디에나 진상고객은 있다.
백화점에, 레스토랑에, 바(bar)에, 병원에, 은행에도...
마트에는 말할 것도 없다.
보통 그들은 언성을 높이고 화를 내며, 때로는 모욕적 언사도 서슴지 않는다.
마트에서 그들의 불만들은 대개 이런 것들이다.
" 다른 데는 리턴(반품)해주는데 여긴 왜 안된다는 거냐?
속이 썩은 과일을 어떻게 팔 수 있느냐?
이것도 반찬이라고 만들어서 파느냐? 너무 짜다, 상했다....
여기 직원은 왜 이렇게 불친절하냐?
매니저 어디 있냐, 나와 보라고 해.
사장한테 전화하겠다.
SNS에 올리겠다...." 등등이다.
구매일이 오래되었는데 환불 또는 교환해 달라는 경우도 있다.
증거가 불충분한 상태에서 상식 없이 환불해 달라는 경우도 있다.
과일이나 야채, 반찬이 상했는데 냄새가 너무 나서 버렸다고 한다.
집이 너무 멀어서 제때에 실물을 가져올 수 없어 버렸다고도 한다.
부득이 실물을 지참하지 못하는 경우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상식인데 말이다.
이런 여러 상황에서 진상고객을 어떻게 알아보고 길들일 것인가?
마트의 고객센터(커스터머 서비스)에 일하면서 수업료내고 얻은 방법들은 이렇다.
첫 번째는 우선 나 자신부터 통제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나를 냉정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고객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해야 한다. 처음부터 거부 반응을 일으켜 고객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 안 된다. 감정적으로 절대 대응하지 않는다.
두 번째,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야 한다.
가격착오, 이중계산등 회사의 잘못 가능성이 큰 것은 영수증과 가격 정보를 확인하고 신속하게 매듭짓는다.
세 번째, 환불규정(refund policy)에 부합한 지를
번개처럼 체크한다.
1. 반품 및 교환 시 영수증이 있고 원래 상태와 포장을 유지해 재판매가 가능한지?
2. 어떤 제품인지, 구입한 지 얼마나 경과했는지?
(즉, 일반상품 및 전자제품, 화장품이면 7일 이내에,
냉장, 냉동, 신선식품, 델리는 48시간 이내에 가져왔는지?)
3. 환불은 구매 당시 결제 방법으로 할 수 있는지?
보통 영수증 아래에 환불규정(refund policy)이 위와 같이 나와 있지만 글씨가 작아 대부분 고객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화가 난 JS에게 환불규정부터 설명했다가는 오히려 고객의 불만을 부추길 수 있다.
고객의 말을 경청하면서 클레임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해법을 찾는다.
언제 구입했는지? 유통기한이 지난 것인지? 상하거나 변질된 것인지? 실물을 일부 또는 전부 지참했는지? 그 대신 사진을 찍어 왔는지?
교환을 원하는지? 환불을 원하는지 체크하는 게 핵심이다.
네 번째, 손님에게도 한 번의 기회는 준다.
무리한 요구가 아니라면 한 번은 반품을 받아준다. 정말로 환불규정을 잘 모르는 고객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번을 위해서 규정을 반드시 설명해 준다.
환불 때문에 일부러 마트에 왔다고 하면 전화로 클레임을 접수하는 방법도 있음을 알려준다.
다섯 번째,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경우에 잘 대처한다.
상한 음식을 먹어 탈이 났거나 이물질이 들어간 경우가 사실이라면 중대한 사항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담당자는 환불까지만 할 수 있고 그 이상의 권한이 없음에 이해를 구한다. 추가보상을 원한다면 자세히 글로 작성하고 증거와 함께 매니저에게 보고한다.
사실 환불과정에서 양심을 속이는 고객이 있을 수 있으나 그 자리에서 혼자 섣불리 판단하지는 않는다.
한인 마트는 특성상 서로 얼굴을 쉽게 익히는
사이가 되다 보니 진상고객이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진상이든 아니든 손님은 왕이다.
왕에는 성군도 있지만 폭군도 있음을 인정한다.
이제는 진상고객이 있어도 크게 두렵지 않다.
고객의 <화난 얼굴>을 <환한 얼굴>로 바꾸어 주는 것이 나의 퀘스트(quest) 이기 때문이다.
그냥 슬기로운 마트직원의 경험치를 더욱더 높이는 기회가 될 뿐이다.
게임 속의 커스터머 서비스에서 일하는 나를 잠시 상상해 보며 혼자 웃어본다.
오늘도 "클레임"이라는 이름의 몬스터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커스터머 서비스(CS ) 던전.
헌터인 나는 오늘도 JS를 맞이한다.
나의 주 무기는 "친절한 미소와 공감"이라는 스킬이지만, 때로는 "단호한 규정 안내"라는 방패를 들고 있다.
오늘의 첫 번째 JS는 유난히 강력한 분노를 뿜어내는 '클레임 거인'이다. 거인의 포효에 나의 멘털 방어력이 잠시 흔들렸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고객님, 저희로 인해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불편하신 점을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해결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라고 하자, JS의 분노 게이지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JS가 원하는 것이 '보상'보다는 '공감'과 '경청'임을 깨달았다. 진심을 담아 고객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했고, JS는 "수고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꼬리를 감췄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또 다른 JS가 올까 봐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나의 퀘스트는 고객의 '클레임'이라는 몬스터를 물리치고 고객의 '만족'을 되찾아 주는 것이다.
오늘도 커스터머 서비스의 헌터는 고독한 전투를 이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