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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미 아름다운 노을이 보이는 집에 살고 있었다

이혼일기, 집필 후기

by 검정멍멍이




상담을 마무리하고 멍하니 일주일을 소비했다. 다시는 소중한 삶을 소비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때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터졌다.



도대체 나는 어디 갔을까?
아니, 우리 부부는 어디쯤 머물러 있을까?



집 주변을 산책하고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 생각이 가루가 되어 꿀꺽 삼킬 수 있을 만큼. '3년 동안 남편과 나는 이 소중한 시간을 얼마나 허비했을까? 그 긴 시간 내내 우리 딸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여러 생각들이 복잡하게 뒤엉켰다. 딱히 추억이 될만한 어떤 일들도 하지 않았으니 하지 않았던 것들을 되뇌는 것보다, 뭔가를 함께 했던 걸 세어보는 게 훨씬 쉬웠다.





"신이여, 바라옵건대
바꾸지 못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함과
바꿀 수 있는 일을 바꾸는 용기와
그 차이를 늘 구분하는 지혜를 주옵소서"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말이 계속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바꿀 수 없는 내 원가족과의 과거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차분함이 필요했다. 모든 일을 어제로 치부하고 남편과 나 그리고 사랑스러운 우리 딸의 삶을 새롭게 가꿔 나갈 용기가 필요했다. 결혼한 지 5년, 말 안 하고 산 지 3년째인 우리는 2년 뒤 이혼하기로 했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던 걸까?



길었던 일주일의 고민을 마치고 남편에게 말했다. "다시 예전처럼 잘 지내보고 싶어. 우리 딸이랑 셋이 함께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어..." 남편은 꽤 오랜 시간 땅을 바라봤다. 그리고 시계를 쳐다보며 조심스레 말을 이어갔다. "어떻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야?"



말하지 않고 살아온 지난 3년의 세월이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우리 관계를 다시 예전처럼 돌이킬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나를 압도했지만 '내가 내밀었던 용기보다 나에게 화답해 준 남편의 용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하나, 둘, 셋! 점프!'



요즘 우리 딸은 엄마와 아빠 사이에 껴서 손을 잡고 점프하는 취미가 생겼다. 어쩌면 지난 3년 내내 하고 싶었지만 차마 할 수 없었던 한을 풀고 있는 느낌이 들 때마다 미안함이 밀물처럼 차오른다. 결국 우린 다시 일상을 회복했다.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산책하는 밤공기와 함께 스쳐간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지금 살고 있는 이 아파트를 팔고 '진짜 내 집'을 짓고 살길 희망한다. 언제부터인가 틈 나는 대로 꿈꾸는 집에 대한 아이디어를 종이에 적어둔다. 수십 가지 아이디어 중 가장 첫 번째 문장은 이거다.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는 집"




무엇이 맞는 걸까 또 어떤 게 더 현명한 방법일까 고민하며 멍하니 삶을 소비했던 지난 일주일 어느 해 질 녘. 책을 읽다가 문득 반쯤 쳐 놓은 커튼을 뚫고 내 발 밑까지 차오르는 햇살을 발견했다. 스멀스멀 차오르는 빛에 이끌려 창을 열고 먼 하늘을 바라봤다. 이윽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을이 내가 좋아하는 푸른 하늘빛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난 이미 아름다운 노을이 보이는 집에 살고 있구나...'



남편의 단점을 들추기 바빴던 내가 아니었는지. 나를 양육하던 부모님의 큰 노고보다 스쳐 보낼 수 있는 아픈 기억의 조각을 붙잡고 상처를 더 키우기만 했던 건 아닌지. 이미 나에겐 감사할 많은 일들이 충분한데 부족한 것에 집중하며 살아왔던 건 아닌지... 지난 결혼 생활을 돌아봤다. 돌이켜보니 멋진 노을빛 하늘 위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가 떠올랐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외로울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힘들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 행복 -



이미 나에겐 저녁 때 돌아갈 노을이 멋진 집이 있었고, 외로울 때 생각할 가족이 있었고, 힘들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었다.




행복은 이룬 것에서 바란 것을 빼는 거라고 했는데, 분명 내가 이룬 것보다 바란 게 적은데... 왜 난 행복하지 않을까 고민했었던 때가 있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틀려도 한참 틀렸던 모양이다. 지금의 나는 이룬 게 너무 많아 오히려 두려울 정도라고 해야 딱 적당했다. 그만큼 충분하다. 어쩌면 이 모든 건 정말 사소한 생각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나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온 힘을 다해 친절할수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게 다가갈 수 있음을 깨달은 것.' 아마 이런 사소한 깨달음을 실천하며 살기로 결심한 이후부터 더 이상 이혼일기를 쓰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했다.








온전히 드러내면 누군가 상처받을까 두렵고, 뭉근히 가리면 치유하지 못할까 걱정이 됐었다. 그리고 앞으로 남은 2년, 딸을 위해서라도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이별을 준비하리라 다짐했었다. 그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많은 사연과 켜켜이 쌓인 오해의 시간들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 속에서 가장 괴로웠을 우리 딸을 더 자주 끌어안고 사랑해줘야겠다고 다짐을 했던날 밤, 남편에게 편지 한통을 썼다. 3년 전 생일에 줬던 편지가 마지막이었으려나...




"우린 이미 충분히 아름다운 노을을 보며 살아가고 있더라... 그러니 충분히 행복한 삶이라고 자부하며 당당히 살아가도 좋겠다."


내 편지에서 특별히 이 말에 너무 가슴이 뭉클했다며 화답한 남편이 말을 건냈다.



그래...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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