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두 번째 상담 episode 5.
─안 만났었어야 됐는데 만나버렸네. 그렇게 만나서 여기까지 왔네? 뭐, 어쩔 수 없지. 이건 실수, 실패. 그래 인정!
─나중에 다른 사람, 지금보다는 훨씬 가치관이 맞는 그런 사람 잘 알아보고 만나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지 못한다면 그냥 혼자 살든가... 그런 삶의 방식을 결심한 상태죠. 그러니까 엄마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으음...
─뭔가 또 말이 다른 길로 센 거 같은데 다시 돌아가면, 엄마도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그게 당연히 잘못된 건 아니고요. 그냥 우린 안 맞는 거죠.
서로 성향이 다른 부부가 잘 사는 경우도 많은데,
성향이 안 맞아서 굉장히 살기 어렵다고 느끼시는가 봐요?
─과연 성향이 정말 잘 맞는 부부가 세상에 얼마나 있을까요? 오히려 맞는 사람들이 훨씬 적겠죠. 성향 차이를 극복하려면 처음부터 가치관이 잘 맞는 사람과 결혼했거나, 아니면 아예 내려놓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저는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핵심 가치가 그 사람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 성향 차이를 극복하는 게 불가능하다 결론을 내린거고...
─아, 네.
─예를 들어, 집에 뭐가 고장이 났다고 해볼게요. 그 사람은 좀 알아보다가, '못 고쳐 그냥 이대로 살아야지. 어쩔 수 없지 뭐.' 이런 스타일이에요. 그럴 때 저는 이래요. "정말 이걸 못 고칠까? 어디까지 알아봤는데? 이렇게는 해봤어? 껐다, 켜봤어?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잘 모르니까 아파트 경비실에다 문의해 봤어?
─아니, 그러면 그냥 선생님이 고치면 되잖아요.
선생님과 나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날 선 공기가 스쳤다.
─저는 둘 다 살면서 처음이라 모르는 일인 경우를 말하는 거에요. 정작 중요한 건, 누가 됐든 일단 최선을 다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다른 사람이 시도하면 되는 거죠. 어차피 이건 우리 가정의 일이니까, 둘 중 누구라도 해결하면 되는 문제니까. ‘니 일, 내 일’ 그렇게 나눠서 할 일이 아니잖아요. 어차피 부부가 함께 해결해야 하는 문제잖아요.
─그런데 조금의 노력이나 시도도 제대로 해보지 않고 "못한다, 안된다." 그렇게 쉽게 포기해버리는 태도가 정말 싫거든요. 이건 삶의 태도나 가치관의 문제라고 봐요, 저는.
─그냥 그런 사람과 같이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이신 거예요?
─괴로운 거죠. 괴롭죠.
─그 사람은 그렇게 생긴 게 왜 그렇게 괴로우실까요?
─음... 제가 실수한 거니까요. 배우자를 선택하고, 결혼을 결심하는 중요하고 신중했어야 하는 일을 무시하고 그냥 목적에 맞춰서 결혼을 해버린 것 같아요. 제가 신중하지 못했나봐요...
아버지의 정년퇴직 전에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쓸대없는 목표. 서른 중반이 넘어가기 전에 결혼을 해야만 한다는 어이없는 강박. 스스로 만든 족쇄같은 생각에 억지로 결혼을 끼워 맞췄다. 그래서 난 실패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
하루하루가 조급하게 결혼을 결정한 내가
치러야 할 대가 같았다.
─만약에 성향이 비슷한 사람과 결혼했으면 뭐가 달라졌을까요?
─그랬다면 설령 그것 때문에 싸울지언정, 최소한 '나는 거기에 대해 이렇게 생각해서 이렇게 했어.'하며 대화의 물꼬는 트였을 것 같아요.
─아... 본인하고 대화가 잘 안 되세요?
─네. 근데 이런 일은 서로 대화를 해서, 부부는 대화를 통해 간극을 좁히고 오해와 차이를 풀어야 되잖아요.
─네... 그렇죠.
─서로의 생각 차이는 당연히 있자나요. 살아온 배경과 가치관이 다르니까... 그러니 대화를 통해 '나는 이랬고 그건 저랬다, 아... 그랬구나' 해야 되는데 이런 대화조차 안 되는 게 정말 괴로운거죠.
─그게 그 사람의 문제인가요?
─아니요. 저도 문제가 있고 그도 문제가 있겠죠. 누구의 문제라고 탓하기엔,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정답이 없는 문제니까 어렵죠.
─부부 사이에 어떻게 정답이 있나요? 없죠. 둘 다 문제겠죠.
─아니면 굳이 그 사람보다는 제가 덜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게 속 편하겠죠. 차라리 제가 그냥 '에휴... 그래 원래 저렇게 사는 사람인데 뭐.' 하고 넘겨버리면 될텐데... 근데 이제는 그것조차 싫은거죠. 저는 이렇게 우리처럼 서로 안 맞아서 괴로워하는 부부만 있는 게 아니라, 서로 노력하고 대화로 얼마든지 풀어가는 사람들도 꽤 많잖아요.
─아까로 돌아가서 부모님이 부부 싸움한 게 아마 선생님한테 굉장히 큰 자극이 됐던 것 같고, 지금 상대하고 자꾸 싸우게 되는 것도 뭔가 선생님한테 굉장히 큰 스트레스를 주고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 부모님이 서로 다퉜던 그때, 엄마를 피멍이 들게 때리고 칼로 협박을 하고 뭐... 그런 장면들이요. 그게 기간이 어느 정도나 됐어요?
─고1 때에요. 아마 17살 무렵?
─고2부터는 괜찮아졌어요?
─괜찮아졌다라... 네, 뭐 그 이후에는 그 정도로 심각한 사건은 없었죠.
─아... 그럼 뭐가 가장 충격적이었어요? 뭐가 떠올라요?
─그 사건에서, 고1 동안에요. 고1 이전에는 병원에도 안 가고 잘 적응을 하셨던 거잖아요? 뭔가 갑자기 힘들어졌잖아요. 그때 가장 계기가 된 게 어떤 일이 기억이 나세요?
─음...
생각이 날듯 말듯 멜랑꼴리한 기분이었다.
─지금 떠오른 거!
─지금 떠오른 거... 새로 이사간 집도 1층이었거든요. 저랑 동생은 방 안에 있었어요. 아마 엄마가 들어가 있으라고 했던 거 같아요. 엄마, 아빠가 또 싸우고 있었어요. 방에 숨어있었는데 동생이 저한테 밖에 나가서 좀 말려보라고 했어요. 근데 제가 도저히 못 나가겠는 거예요.
그때 동생은 초등학생이었다.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요? 막 던지고 싸우나요? 소리지르고?
─네. 소리 지르고 막 쌍욕하면서...
─음... 막 때리는 소리도 나고?
─때리는 거요? 어... 때리는 거는 그날이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날 밤도 이제 막 몸싸움으로 번지기 직전이었는데 '엄마가 소리를 지르면서 하지마! 하지마 '라며 울부림 치는 걸 견디지 못하고 제가 처음으로 거실로 나갔어요. 그리고 아빠를 손으로 밀었어요.
─오우... 네...
─아빠가 쇼파 위로 넘어졌어요. 아마 어이없었겠죠. 그리고 아빠를 밀자마자 문을 열고 계단으로 올라갔어요. 4층으로. 근데 그 4층이,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어릴적 일화있자나요? 이유도 모른채 아빠가 문을 걸어 잠그고 내쫓아서 어쩔 수 없이 친구집 문앞에서 쪼그려 앉아있었다고 했던 집. 옛날 아파트 4층에 있었던 집. "그 집"이 '그 집'이거든요.
─아! 네.
─아버지를 밀치고 집을 나와서 4층 올라간 그 집이 아까 그 친구네 집이었어요. 그러니까 그 집 친구도 저와 똑같이 이사를 왔는데, 이번에는 같은 동에 살게 됐고 집은 여전히 우린 1층, 그 집은 4층이었던거죠.
─아, 그 친구네 집이었군요.
─무섭게 '야! 돌아와!' 하며 소리치는 아빠를 무시하고 숨도 안 쉬고 맨발로 4층까지 계단을 뛰어 올라갔어요.
옛날일을 말하면서 아직도 어이가 없고 너무 치욕스러웠다.
─차가운 맨발로 그 친구집 문을 두드릴 때 얼마나 심장이 두근거렸는지 몰라요. 참...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진짜 창피한 일인데. 제가 창피하다기보다는 엄마, 아빠가 정말 창피한 일인데, '아줌마 도와주세요.' 이렇게 했었던 것 같아요.
─"도와주세요. 아줌마 제발 도와주세요." 와... 근데 지금 생각하면 '진짜 무슨 낯짝으로 살았지 엄마, 아빠는?' '창피하지 않았을까?' '대단하다. 대단한 정신력이다.'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니면 정말 대단한 희생 정신이다. '정말 자식 새끼들을 위해서 자신들의 체면이라는 거를 다 내려놓고 이렇게 살았구나.' 그런 생각도 들고 지금도 많은 감정이 스쳐가네요.
─정말 절박하니까 가서 도움 요청을 했겠죠. 그래서 도와줬나요?
─아마... 아줌마가 내려오진 않았을 거예요. 아줌마도 많이 당황스러웠겠죠.
어이없는 헛웃음이 연신 쏟아져 나왔다.
살면서 절대 입 밖으로 꺼낼 일은 없을 거라
믿었던 사연을 고작 두 번 본 사람에게 쏟아내다니.
나도 참 이상했다.
그럼에도 애써 외면했던 기억들을 막힘없이
나열하는 내 모습이 초라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