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두 번째 상담 episode 6.
─자세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아마... 놀란 저를 잘 달래주고 시간이 좀 지난 뒤 내려가 보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장면에서 제일 큰 거, 그러니까 선생님은 친구집 문을 두드려서 너무 창피했을까요?
─아니요. 그건 별로 창피하지 않아요. 그 장면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거는 아빠를 밀치고 아빠가 소파에 넘어졌던 거 그리고 제가 신발을 신지도 않고 맨발로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데 아빠가 소리쳐서 "이 새끼야 이리 와!"라고 소리쳤던 장면이...
─어... 그때 마음이 어땠어요?
─마음은 뭐, '빨리 가서 누군가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된다.', '엄마를 살려야 한다.' 뿐이었죠.
─혹시 무섭지는 않았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때의 기억을 일부러 지우고 살아서 그런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요?
─"감정표현불능증", 제가 저번에 얘기했던 거요. 여러 힘든 사건들을 겪다 보니 '감정 표현 자체가 어려워졌을까요?' 아니면 힘들어도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그런 행동 패턴이나 습관을 만들어낸 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초등학교, 중학교 내내 같이 다니던 친구 집을 잠옷 바람에 맨발로 뛰어 올라갔다. 초라하고 남루한 내 모습 따윈 안중에도 없이 한숨에 내뱉었던 첫마디. "아줌마!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잘 시간에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이 황당한 소리였을까. 당황한 아줌마의 커지는 동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친구가 직접 문을 열고 나오지 않은 걸 속으로 얼마나 감사했던가. 지금 생각해도 내가 가엽다.
─혼자서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자랐나 봐요.
─생각... 많이 했겠죠? 생각 많죠. 생각이 많은 스타일이죠. 결혼 전까지 혼자 여행을 많이 다녔었어요. 생각이 많았으니까. 살면서 굳이 겪지 않아도 될 불쾌한 우여곡절이 꽤 많았으니까. 그런 나름의 괴로운 시기를 생각으로 풀어내지 않았을까요...
─선생님이 힘들었던 장면을 조금 얘기해 주셨는데,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선생님의 감정에 대해 구체적인 얘기를 안 하셔서 그런지 '뭐가 결정적으로 힘드셨구나'하고 정리가 잘 안 되네요?
─방금 제 인생에 가장 힘든 얘기를 말씀드렸는데...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는.
─사진 찍은 거? 싸운 거? 뭐 칼 하고 때리고 뭐...
─근데 감정은 뭐 무섭지도 않다고 하고, 무서운 것도 잘 모르고...
─무섭죠. 고1 어린애가...
─무섭죠. 그죠? "야, 이 새끼야. 이리 와!" 그랬을 때 말이에요.
─그거요? 그거는 무섭지 않아요. 그러니까 아빠가 저를 붙잡으려고 '이 새끼야 이리 와!' 했던 그때의 감정은...
─음... 지금은 아빠도 참 불쌍하다. 약간 이런 감정인 거 같은데, '아빠도 나름 불쌍하다...' 근데 그때 당시는... '엄마를 살려야 된다?' 근데 살려야 된다는 감정일까요? 생각 아닐까요?
─절박함. 절박함이죠.
─부모님이 그렇게 싸우시고 막 그 사이에서 선생님이 이렇게 자꾸 중재하고 막고 이런 역할을 계속하셨던 그런 건 없었어요?
─중재하고 이런 건 없어요. 왜냐하면 말린 것도 그때 딱 한 번이에요. 엄마를 또 때리려고 했으니까. 그날은 아빠가 술 마시고 왔던 것 같은데... "중재하고 말렸다"라고 할 수 있는 건 그때 딱 한 번이요. 나머지는 방에 들어가서 그저 빨리 끝나길 견뎠던 시간들이었죠.
─부모님이 그렇게 막 심각하게 싸우시는데 선생님은 뭘로 그렇게 힘드셨을까요?
─뭘로 힘드냐... 부모와 싸우는데 안 힘든 자식이 어디 있어요?
─초등학생 이전이면 그게 굉장히 힘들 수 있는데 고등학교 1학년인데 그게 그렇게 꿈이고 생시고 막 헷갈릴 정도로 그렇게 많이 힘들어진 이유가... 무슨 다른 게 또 있을까요?
─음... 또 다른 거요? 뭘 더 말씀드려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뭔가 제 추측으로는 부모님이 싸우는데 굉장히 힘들었고 근데 지금 남편하고 싸움으로 인해 딸이 힘들 거에 대해서 굉장히 염려를 하는 어떤 부분이 엄마와 아빠가 싸울 때 선생님이 힘들어했던 심정과 관련이 돼 있는 거 같은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리고 그게 뭔지가 궁금한 거죠.
─뭐가 그렇게 괴로웠을까요?
─음... 왜 저렇게 할 거면 이혼하고 살지 왜 살고 자빠졌지라는 감정이...
─굉장히 답답하셨군요?
─네. 답답함이 있었던 것 같고요. '왜 이런 힘든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라는 그런 절망감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고요.
─이혼하길 바라는 것 같네요. 차라리
─네. 차라리! 지금도 똑같아요. 최근에 부모님 댁에 갔을 때도 아빠가 엄마를 답답해하면서 뭐라고 잔소리하셨는데, 그럴 때면 저는 '에휴, 도대체 왜 사는 거야? 그냥 빨리빨리 이혼하고 살지 정말...' 싶은 거죠.
─그게 누구 편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이제는 누구의 편도 안 들어요. 이제는 어떤 느낌이냐면, 지금 제 가정이 사실상 끝이 났잖아요? 이제 정말 비참한 거는... 아빠도 이해가 돼요. 동시에 엄마도 이해가 돼요. 그런데 어렸을 때는 항상 엄마 편만 들었는데 요즘은 아빠가 이해가 되는 날이 더 많아요.
─얼마나 답답했을까? 얼마나 미칠 것 같았을까? 누구한테 얘기하고 싶었을 텐데 어디 기댈 곳이라도 있었을까? 아빠가 심지어 30년을 넘게 장기근속을 하시고 상까지 받으셨는데 제가 사회생활을 해보니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더라고요.
─네...
─제가 남편하고 처음 이혼하려 했을 때, 어렵게 이직한 회사를 한 달 만에 바로 퇴사했어요. 근데 옛날 모두가 괴로웠던 그 시절에 아빠는 퇴사도 못하고 버티셨겠죠. 진짜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걸 버텨냈을까 싶어요. 술에 미쳤든, 뭐에 미쳤든 정말 제정신으로 살지는 않으셨겠구나 생각하니 안쓰럽기도 하고요.
─아! 그때 당시에 아빠가 바람을 폈었어요. 그러니까 엄마 아빠가 서로 이렇게 몸싸움까지 갔던 결정적인 이유는 아빠의 외도였네요. 엄마가 아빠 핸드폰을 몰래 보면서 심하게 싸우기 시작했거든요.
─그걸 선생님도 아셨어요?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신 걸?
─네. 알죠. 근데 그게 이해돼요. 그땐 죽을 만큼 미웠지만 어느 정도는 아빠가 이해돼요. 너무 이해돼요. 저 같아도 엄마랑 살았으면 미쳤을 것 같아요. 동시에 엄마도 너무 이해돼요. 저 같아도 아빠랑, 아빠처럼 성질 더러운 미친 사람이랑 살면 돌아버렸을 것 같아요.
─마음이 너무 혼란스러워요.
막아둔 감정의 댐이 터질 듯했지만,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무뎌진 것도 아니었다.
무너지지 않도록 틈새를 메우며, 스스로를 다잡아온 시간 덕분이었다.
"자네가 불행한 것은 과거의 환경 탓이네.
그렇다고 능력이 부족해서도 아니고.
자네에게는 그저 '용기'가 부족한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