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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혼일기 09화

내 결혼은 실패 or 실수라고 인정할 용기

이혼일기, 두 번째 상담 episode 4.

by 검정멍멍이




크게 심호흡을 하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거 정말 서랍 속 깊이 숨겨뒀던 전부를 꺼내어보자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어린 날, 무섭고 두려웠던 나에게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용기를 내어 그 시절의 나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보라고. 그러면 모든 게 괜찮아진다고, 그냥 그렇게 믿으라고 다독였다.




─지금 진짜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데, 엄마는 어디서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으니까 그랬겠죠... 저를 시켜서 아빠가 때려서 몸에 생긴 피멍자국을 사진을 찍게 만들었어요.


─지금도 이해가 안 돼요. 아마 엄마도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저뿐이었겠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어요. 아빠가 때려서 온몸에 생긴 피멍 자국을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했어요. 잘 보이게 찍으라고... 목, 어깨, 등, 팔... 온몸에 생긴 그 피멍들을 찍으면서 너무 괴로웠어요.

─나한테 왜 이런 걸 시킬까? 엄마는 왜 그랬을까...


─......


─와... 우리 엄마, 정말 불쌍했어요. 사진을 찍고 있는 그 상황이 너무 비참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너무너무 어리숙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도!

─지금도 저는 엄마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어른다운 어른'은 아닌 것 같아요. 엄마는 나를 힘들게 키워준 정말 고마운 사람이고 나를 언제나 믿어주는 사람이지만 그런 엄마가 '성숙한 인간이다'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음...


─근데 엄마도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겠어요...

─오죽하면 저한테 사진을 찍으라고 했겠어요. 불쌍하고 미안한 마음이 한편에 있어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물어 다문 입으로 감정을 지우듯 몇 번이고 되뇌었다. '울지 마, 괜찮아.'


─......



─그런데 그 사람도 똑같거든요.

─아... 그런 의미에서?


─네, 철이 없다고 할까요? 근데 철이 없다는 건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순수하고 해맑고 깨끗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제가 엄마에게 '나는 엄마 같은 사람하고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던 이유가... 삶의 방향성을 갖고 주체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내일 죽어도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사는 사람과 결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참, 슬픈 건 그 사람도 똑같아요. 그냥 사는 대로, 또 흘러가는 대로. 오늘 못 했으면 뭐 어쩔 수 없지 하며 자기 합리화하는 모습이 저를 괴롭게 만들어요. 한편으로는 그게 편하게 사는 걸 수도 있죠. 엄마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 참고 버텼던 시간들을 존경해야 마땅하지만, 한편으로는 '왜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출발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도 참 많았거든요.


─......


─지난번에 선생님 저한테 그 말씀하셨잖아요. 저는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괴테의 말을 참 좋아한다고... 그때 저에게 "노력을 안 하면 방황도 안 하지 않을까요?"라고 하셨었죠?


─네.


─그때 말씀을 해주셨을 때는 그래... 너무 그렇게 노력만 하니까 방황만 하고 있잖아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노력하지 않으면요.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 돼서 모두가 그 사람을 거들떠보지 않게 되거든요. 적어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뭐 이 세상에 사람들이 그렇게 남을 거들떠보나요?


─그렇긴 한데, 제가 말하는 거는 경제적인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돈 관련된 거, 그렇게 하고 싶은 대로 그냥 오늘 못 했으면 어쩔 수 없지 하고 그렇게 넋 놓고 살다 보면...


─이거는 연구가 많이 있는데. 부자가 된 사람들 연구해 보면 그 사람들의 노력보다는 운도 크게 영향이 있었다는...


─그렇죠. 저도 그건 인정해요. 근데 운도 노력을 하는 범위 안에서의 운이 만들어지는 걸 수도 있고 뭐 여러 가지 케이스가 있는데, 저도 그 부분은 인정하고요. 성공한 사람들이 항상 노력만 가지고 성공한 건 아니니까...


─그렇죠.


─하지만 조금 이분법적으로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하고, 그냥 오늘 목표한 것들을 못 했으면 '어쩔 수 없지' 하며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결괏값은 달라질 수밖에 없지 않나요?

─앞서 말한 사람들은 계속 자기가 원하는 삶의 방향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방향에 조금이라도 그 방향에 더 가까워지려고 계속 걸어가고 있을 건데... 운도 노력을 해야 더 많이 따라올 테고.

─그러니까 선생님은, 선생님이 굉장히 의지를 갖고 노력한 것에 대해서 큰 가치를 부여하고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군요. 그런데 이 세상에 그렇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도 많다는 건 알고 계시죠?


─네, 맞아요. 그건 알죠.

─누가 더 낫다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냥 하나의 삶의 방식일 뿐이잖아요.


─네. 맞아요. 누가 더 낫다는 아니죠. 당연히 그건 아닌데, 저는 그런 삶의 방식과 가치를 두는 사람하고 살고 싶지 않은 거죠.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또 자기개발서에 나올법한 이런 이야기로 흘러갔을까? 집착이고 병이고 강박관념일 수 있는 '노력하면 뭐든 다 할 수 있다'라는 뉘앙스의 거짓말들. 항상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던 그 버릇이 지금껏 나를 지탱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면서도 오히려 지금은 떼어낼 수 없는 족쇄가 됐다고 생각했다.




─근데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딸이 엄마처럼 굉장히 노력하고 참고 이렇게 의식적으로 잘 해내는 아이로 자라길 바라나요?


─아... 아니요. 우리 초아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자유분방하게...


─뭐야 왜 말이 안 맞아... 하하. 왜 초아는 그렇게...


왜냐하면... 제가 딸을 키우면서 느끼는 게 있어요. 아... 나는 원래 저런 사람일 수 있겠구나.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저랬겠구나 싶은 것들이요. 그러니까 나는 원래 저런 스타일이었구나.


자연스러운...


─네, 나는 저런 캐릭터였구나. 저런 상황에서는 저렇게 좋아하고,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짜증 내는 사람. 우리 딸이 그림을 색칠하다가 삐져나오면 막 못 마땅해하고 다시 그려 찢어버리고 다시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원래 난 완벽주의였구나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많이 하거든요.


─아하...


─근데 사람의 성향이나 본질은 바꿀 수 없는 거고 타고난 것을 부모라는 그런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키워줄 건지 그 잠재력을 극대화해 줄 건지는 그 '울타리의 영향력'이 엄청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래서 초아는 그 본질을 제가 이해하고 있으니까 어차피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막 이렇게 노력해 봤자 그렇게 되지 않잖아요 삶이... 여기까지 살아보니까...


─음... 또 전혀 다른 얘기를 하시네요.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면, 저는 타고난 본성과 달리 사는 괴로움을 경험해 봤으니까... 그래서 아니까 딸은 저와 달리 살기를 바란다는 말이죠.

─아마 저는 계속 이렇게 살겠죠? 이게 편하니까. 그러니까 양가감정인데, 이렇게 살지만... 한편으로는 저처럼 아등바등 살아봤자 어차피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아는 거지, 그게 노력을 안 한다는 거랑 다른 거거든요. 결론은 남편하고 엄마한테 느끼는 부분 하고는 조금 다를 수 있어요.


─아... 네...

─남편은 아예 노력을 안 하나요?


─노력하겠죠. 노력하는데, 저 같은 사람한테는 그 노력이 '진짜 노력'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뭐가 고장 났다고 해볼게요.

─그러니까, 선생님 성에 안 차는 거죠?


─네. 성에 안 찬다는 표현이 맞을까요? 근데 과연 세상에 자기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존재할까요? 아마 없을 텐데. 성에 차는 사람이 사회생활에서 만난 사람들을 보면 있고 또 주변을 보면 이런 제 생각과 가치관과 비슷하게 잘 맞는 다른 사람들 많더라고요.


서로의 말 끝을 주고받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미묘한 어긋남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 결혼은 실패 혹은 실수였다.'라고
인정을 하는 게 맞겠죠.
그냥 속 편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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