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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혼일기 08화

나는 엄마 같은 사람하고 살지 않을 거야!

이혼일기, 두 번째 상담 episode 3.

by 검정멍멍이




─언제부터 맞으셨어요? 아버지한테?

─언제부터 맞았다는 게 딱히 없죠. 상습적인 폭행을 하셨던 분은 아니에요.



차라리 정말 감사해야 했을까?

그래도 나는 눈에 띄는 상처 없이,
'겉으로는 멀쩡한 아이'로 자랄 수 있었음을?

적어도, 남들 눈에는 ‘괜찮은 편’으로
보이는 가정에서 자랐음을?



─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아... 옛날에 내가 느꼈을 감정이 이런 거였겠구나. 또 내가 아팠던 정신적인 증상이나 상태는 뭐 이런 거일지도 모르겠구나." 하면서 되게 많이 공감을 했거든요. 그땐 참 재밌었어요. 아무튼 뭐 많이 맞았죠. 언제부터 맞았냐고 물어보시면, 글쎄요. 한두 번 맞은 게 아니라... 잘 모르겠어요.


또 질문과 다른 이야기를 주절거리는 나를 알아챘다. 알아챔과 동시에 선생님이 눈치채지 못하게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럼 초등학교 때 이전에도?

─그랬겠죠. 모르겠어요. 그 이전 기억은 거의 없어요.


─1년에 어쩌다 한 번 정도 때리시는 편이었어요? 아니면...


─자기가 기분 나쁘면 그냥 때리는 거죠. 뭐 머리통을 때릴 수도 있는 거고.


─동생이 있다고 하셨나요?

─네, 남동생이 있어요.


─남동생이 있었고 선생님이 첫째.


─예. 그러니까 좀 더...


─무슨 일을 하셨길래 밤에 출근을 하세요?

선생님이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빠르게 질문을 더했다.


─교대 근무하셨어요. 기술직이어서 3교대를 하시는 패턴이 많았었죠.


─술을 드셨나요?

술 먹고 때리고 이러지는 않았는데 술을 좋아하셨죠. 지금도 좋아하시고.


─어머니는... 어머니도 야단을 많이 치시나요?


─아니요. 엄마는 야단을 많이 치진 않았어요. 그게 위안이었죠. 그나마 마음 기댈 곳은 엄마였던 거죠.

선생님을 쳐다보려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 꼬리를 내리듯 시선을 발아래로 떨궜다.


─근데 엄마 같은 사람과는 결혼을 안 하겠다고 하시고...




─네, 맞아요. 아까 제가 처음 떠오르는 장면 말씀드렸을 때 그 상황에서 아무리 아빠가 문 열어주지 말라고 했어도, 엄마가 밖으로 나왔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음... 내 편을 안 들어줬다?


─아니, 내 편이라기보다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제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인 애가 밖에서 거의 3~4시간을 어디서 뭐 하고 있는지 찾아보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때도 그리 생각했지만, 제가 부모가 되어보니 여전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 것 같아요.

울컥했다. 가슴이 답답해서 차라리 펑! 하고 터져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았다.


─엄마가 나 잊어버렸나 싶었겠다. 애는...


잊어버렸다기보다는...


─왜 이렇게 나를 안 찾지?


─음... 잊어버렸다기보다는요...

─후... 아빠가 하지 말라니까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는...


엄마가 아버지를 굉장히 무서워하셨어요?


─무서워한다기보다...


─아버지가 엄마도 때리시나요?


─음... 어렸을 때는 안 때렸죠. 제가 고1 때 처음 때렸죠. 그래서 제가 고1 때 병원도 다녔었고요. 정신과도 다녔었고... 그때 좀 큰 사건이 있었어요.


─어떤 사건이 있었어요?


─부모님이 이혼을 안 하신 게 이상할 정도로 많은 일들이 있었죠...

그런다고 선생님이 정신과를 다니나요?


─아... 제가 그때 실제로...

─사실 그때 기억을 일부러 지우고 살았어요. 지금도 정확한 건 모르지만, 아마 공황장애나 불안장애 아니면 PTSD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조금 더 자세히 말하면, 학교는 갔는데 "지금 이건 현실이 아니야. 이거는 꿈일 수 있잖아." 하며 외면하는 증상이랄까. 약간 그런 멍하고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는 거죠.

─어, 음...


─참... 그때 전교 꼴찌도 해봤네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시험 기간에 컴퓨터 사인펜으로 답안지 마킹을 하는데 한, 세 번 정도 OMR카드 바꿔달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계속 실수하니까 선생님이 "야, 이 새끼야! 장난쳐?" 이러면서 싸대기를 때리시더라고요. 근데 그것조차 저는 꿈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아, 꿈일 거야." 하며... 그 시험이 꿈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시험공부를 했을 리도 없고요.


─네...


─현실을 부정하는 게 너무 세지니까 그런 불안장애에 가까운 증상을 보였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 시기에 내가 진단받은 병명이 뭔지 엄마에게 묻는 것조차 괴로워서, 지금까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근데 이거는 알아야 될 거 같은데?


─네, 어느 날 문득 알고 싶어 져서... 병원에 전화해서 예전 저의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지 또 그때 당시에 상담했던 의사 선생님을 만나서 좀 대화를 해볼 수 있는지에 대해 물어봤어요. 왜냐하면 제 스스로는, '그 시기에 해소되지 않은 어떤 결핍된 감정이나 욕구가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까 제가 계속 삶에서 방황하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 이거를 엄마한테 물어보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엄마가 옛날 생각에 괴로워하실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못 물어봤어요.

─그래서 병원에 알아보셨어요?

─얼른 알아보셔요.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야 하는 걸 수도 있어요. 이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면...


─거의 20년도 넘은 이야기라...

─근데 이렇게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면...

─그러니까... 현실인 건 아는데, 부정하는 거예요. 괴로우니까. 내 현실이 너무 괴로우니까...

─엄마랑 아빠가 막...

─부정한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알고 있죠, 그게 좀 애매해요. 내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계속 멍한 상태가 지속돼요. 왜 그냥 멍 때리는 느낌 있잖아요. 그런 상태가 계속 이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시험 문제 풀 때도 그냥 의식보다는 무의식으로 시험을 보기 바빴던 거고. 부모님이 자꾸 그렇게 싸우고 그러니까...

─아빠가 엄마를 때리고, 칼을 꺼내서 서로 죽이니 살리니 하면서 막...



처음이었다.
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는 건.

그 누구에게도 한 맺힌 과거를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는데, 거짓말처럼 술술 털어놓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쩌면 상담이 유일한 희망이겠지.
이거라도 해봐야 정신을 차리고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잃어버린 나를 되찾아야
비로소 소중한 사람들에게 진심을 전할
용기가 생길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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