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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이혼일기 06화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

이혼일기, 두 번째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그냥 기억을, 장면을 얘기해 주시는 게 도움이 돼요.


─기억? 장면?... 네, 살아오신 장면. 기억나는 장면. 어떤 장면이 기억나세요?


─음...


─......


─애기 때 장면도 좋고, 어릴 때 장면도 좋고, 학교 다닐 때 장면도 좋고...


─장면이요?... 어...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 하나는...




국민학교 1학년이 맞을 거다. 아님 7살 때였던가 싶기도 하고. 어쨌든 대략 일곱, 여덟 살 무렵의 사연이다.

우리 가족은 5층짜리 아파트 1층에 살았다. 그날은 나 빼고 모두 친척집에 갔던 날이었다. 집에 아무도 없으니 당연히 친구들과 온 동네방내를 휘저으며 신나게 뛰어놀았다.


해가 기울 무렵, 거리의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이 기억나는 걸 보니, 아마 저녁보다는 밤에 가까운 시간이 맞겠지. 그때 부모님 차가 아파트 입구를 들어오는 걸 봤다. 그 길로 친구들과 인사를 하고 반가운 마음에 집으로 향했다. 근데 문이 잠겨있었다. 연신 노크를 했지만 엄마와 아빠가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만 문고리 틈으로 새어 나올 뿐이었다.


노크를 멈춘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한참을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에서는 아빠의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내 엄마의 목소리가 잦아들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침묵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믿었던 엄마마저 문을 박차고 나를 구하러 나오지 않는다니... 오래된 기억이지만 아직도 뭔가 서럽게 서글프다.


갈 곳이 없었다. 한참을 집 앞을 서성이다가 나도 모르게 옆 동에 사는 친구 집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 번째였는지 네 번째 층이었는지도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차마 친구집에 노크를 하고 사연을 설명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서 그 집 앞에서 웅크린 채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나마 기댈 수 있었던 건 환한 보름달빛뿐이었다.

어릴 적 우리 동네 아파트는 아빠 회사 사람들만 살았다. 회사에서 준 사택이라 100세대도 채 되지 않았던 작은 규모였으니, 누가 어디 사는지 모르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할 정도였다.


그날은 아빠가 밤 10시에 출근하는 날이었다. 출근길에, 창문 틈으로 나를 발견한 아빠는 소리를 질렀다. "야, 이 자식아! 거기서 뭐 하고 있어? 당장 집에 들어가!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대체 왜 이렇게 혼나고 있는 걸까. 함께 사는 '우리 집'인데 왜 나만 쫓겨났을까...


아직 아이였던 그때의 나로서는 도대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계단에 웅크려 앉아 있던 어린 꼬마도, 어느새 그 꼬마와 똑 닮은 딸을 키우는 어른이 되어버린 나도, 여전히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해 보면, 만약 제가 잘못한 게 있다면 저녁에 늦게까지 놀았던 거? 그 거 말고는 없는 거 같아요.
─해가 져도 집에 안 들어갔다. 그거? 근데... 그날은 집에 아무도 없었으니까요. 어린아이 혼자 집에서 뭐해요. 당연히 동네 친구들하고 밖에서 놀지...

─어차피 그날 집에 늦게까지 안 들어간 걸 아버지가 모르시는 거 아니에요? 노는 걸 보고 같이 들어가셨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아... 그랬다고 화를 내신 건가?
그 순간 선생님 목소리에서 뭔가 모를 따뜻함이 느껴졌다.


─모르죠. 저도 궁금하네요. 지금도 이유를 몰라요.

─어... 음... 안... 물어, 안 물어보셨어요?

─네, 안 물어봤죠. 다 커서 갑자기 그런 얘길 한들 뭐해요.

이 얘기는 음... 애가 배 속에 있었을 때 처음 이혼을 결심하고 집으로 내려가, 엄마랑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속상한 마음에 다시 꺼낸 적이 있어요. 그 심각한 상황 속에 어릴 적 저 얘기를 꺼낸 걸 보면, 저 사연이 꽤나 아픈 상처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아빠가 돌아가실 때 이거는 꼭 물어봐야겠어라고 했었죠...

─참... 그때 도대체 왜 그랬냐고, 아빠한테 사과하라고 말할 거라고 엄마를 앞에 두고 다짐하듯 말했었네요.


─......



나는 마른침을 애써 꼴깍 삼키며 말했다.

─아무튼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은 그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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