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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때려치우고 당장 이혼할 수 없어, 더 미칠 것 같은

이혼일기, 첫 번째 상담 episode 3.

by 검정멍멍이 Mar 06. 2025




   ─집 계약이 2년 뒤에 끝나서요...

 

   ─그럼 그냥 한 분이 나가 계시면 되잖아요. 한 분만 사시면 되잖아요. 명의 때문인가요?
 
   ─그럴 수 있었다면 아마 3년 전에 이혼했겠죠. 근데 딸 때문에 안 했고요. 이런 표현이 약간 이기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딸 때문에"라는 의미는... 만약 우리가 정말 심하게 싸우지만 않는다면, 그냥 엄마와 아빠로서 각자의 역할을 하며 지금처럼 버티는 것만으로도 딸에게 미칠 수 있는 긍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아직 우리 관계를 이해하거나 용서해 주길 바라기에는 아이가 너무 어리니까요. 미안하잖아요...




오래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밑줄을 긋지 않으면 뭔가 큰일이 날 것만 같은 을 발견했다. 


    어떻게 하면 사랑을 항상 새롭게 유지할 수 있을까? 사랑의 즐거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복합적인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복합적인 관계가 되려면 두 사람이 자신과 상대의 잠재력을 개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해서 상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어떤 감정과 꿈을 지니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이 자체가 끊임없는 과정이며, 평생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과제이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되면 함께 즐길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여행을 다니고, 같은 책을 읽고, 아이를 키우며, 계획을 세우고 실현해 나가는 모든 일이 즐거워진다. 구체적인 세부사항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각자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조절해 가면 된다. 가장 중요한 건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이다.


뭐라 반박할 여지가 없는 아주 완벽하고 이상적인 표현이라, 한 치수 작은 신발을 신은 것처럼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상대에게 주의를 집중했다. 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꽤 많은 밤을 지새웠고 나름대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데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이해되지 않는 역설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우리의 꿈이 같지 않다고 느낀 언젠가부터, 좌절이란 감정이 그의 꿈을 알아보고 싶은 호기심을 압도했다. 그래서 책에 밑줄은 쳤지만 "평생을 통해 이루어야 하는 과제"라 '적어도 나는' 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부부가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파트 청약을 넣는 계획, 돈을 모으는 계획, 우리만의 집을 짓고 행복한 일상을 만들기 위한 계획 따위를 함께 나눌 때마다 결국 대화를 파뿌리처럼 뽑아버려야 끝을 봤던 우리가? 드라마를 보거나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기도 힘든 우리가? "기본 원칙" 따위를 지키기는커녕 만들기조차 어려운 우리가?!  




   ─올해 초부터 정말 아예 한마디도 안 하고 살게 됐어요. 그래도 전에는 밥 먹자거나 주말에 애 데리고 저기 놀이동산 같이 가자거나 하면 그냥 같이 갔었죠. 그때도 우리 둘 관계에 대한 말은 안 했지만, 최소한 아이를 위한 대화는 억지로라도 했고 아이가 해달라는 거는 같이 했어요. 어쨌든, 딱 그 정도의 관계를 유지하며 버텼고 그렇게 3년을 살아왔어요.


나도 모르게 떨어지는 고개를 애써 붙잡았다.


   ─제가 지금 남편 얘기를 하는 이유는 '남편하고 다시 잘해보세요.'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라, 선생님 잘못을 캐려는 그런 것도 전혀 아니라... 지금 선생님이 남편 이야기하시는데, 완전히 막 터지기 일보 직전에 그런 스트레스가 느껴져서 그래요. 여기다 초점을 두지 말라고 하시는데, 이걸 바람을 안 빼고는 지금...


선생님이 창문을 한번 쓱 바라보더니 난로를 껐다.


으악! 하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 답답하고 멍울진 마음에 누구라도 나 대신, 우리 사이에 있던 모든 일들을 1.5배속으로 재생해 주면 속 시원하겠다 싶었다. 자막도 꼭 달아서...
 



   ─지금 제 문제의 초점이 원가족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좀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아니 글쎄 하는데, 지금 참는 게 너무 힘든데?



참는 것도 어느 정도는 무시하며 버틸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그 선을 넘은 건 이미 3년 전이었다. 물론, 그래도 조금만 참으라면 그럴  있다. 아직 그럴 힘이 가슴 깊숙한 우물 속에 여전히 찰랑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인내심은 남편의 어리석음보다 더 크다고 믿으니까... 온 힘을 다해 참고 또 참고 한번 더 참으면 된다.

 


   ─그럼 원가족 얘기만 하고 싶으신 거예요?

 
   ─남편의 얘기를 해봤자 의미도 없고요. 남편과 왜 그렇게 됐을까를...

 

   ─아니요. 그 얘기가 아니라... 그래요 그럼. 뭐 아무 얘기나 해도 좋아요. 말조차 하고 싶지 않은 거죠?  

 

   ─'회피' 아닐까요? 왜냐하면 제가 3년 동안, 아니 그냥 결혼 후 거의 대부분을 참고 살고 있잖아요. 근데 여기에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고 느꼈으면...

 
   ─개선을 하시라는 게 아니에요. 그냥 화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말씀해 보시는 것이 필요하니까...

 
   ─화난 마음을 바라보는 것조차 화가 나게 만드니까 회피하는 거예요. 거의 그런 지경에 이르는 것 같아요.

 
   ─그럼 엄마 얘기하시겠어요 어떻게 할까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도저히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서 온 거예요.


   ─일단 지금 엄마랑 같이 사시는 게 아니잖아요. 남편이랑 같이 사시는데... 지금 화가 여기까지 찬 남편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세요...

 
   ─맞아요.

 
   ─어떻게 해야 될까요? 화를 다루고 싶어서 오셨는데 나를 가장 화나게 만들고, 매일매일 자극하는 남편에 대해서는 얘기할 의미가 없다고 하시니까...

 
   ─무시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 것 같은데 저는...

 
   ─방법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요. 그냥 선생님 마음을 얘기하자는 거죠. 그러니까 의미 없는 걸 하자는 거예요. 저는...

   ─저는 선생님 표현대로 하면 '의미 없는 얘기를 한번 해보시겠습니까?' 이렇게 얘기했는데, 의미 없으니 안 하겠다고 하시는 거니까... 그 의미 없는 얘기를 여기서 좀 하게 되면 어떨 것 같으세요? 남편에 대해서 그동안 너무너무 참아왔던 얘기를 좀 하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답답함만 늘어갈 것 같습니다.


   ─그럴까요?


   ─네. 답답함만 쌓이고...

 
   ─더 답답해질까 봐 걱정이 되시는군요.

 
 


   ─네. 감정을 알아채고 이해하고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지금 이... 상담의 핵심이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피하겠다고 하셨잖아요.

 
   ─감정을 피하진 않죠. 이미 제가 느끼는 감정은 괴로움이죠. 불쾌함, 짜증, 힘들고, 어려움...

 
   ─그걸 느끼는 걸 피하시는 거죠... 네, 감정을 피한다는 건 감정을 느끼는 걸 피한다는 얘기거든요. 분노는 느껴도 괜찮거든요.

 
   ─......

 
   ─제가 선생님 얘기를 좀 들어보니까, 뭔가 어렵게 자라셨나 봐요. 그걸 극복하려고 자기를 막 가다듬고 바로 세우려고 애를 쓰면서 이렇게 사셨는데... 지금 오늘 이야기하시는 걸 보면 굉장히 그런 걸로 인해서 도움을 받고 많이 성장하신 부분이 있으신 거 같아요. 변화하고...

   ─근데 그런 에너지를 너무너무 많이 쓰셔서...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게 머리의 부분이거든요. 머리로 굉장히 많이 이렇게 자기를 통제를 해 오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거를 조금 더 흩트리면 내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르시는 그런 느낌이 조금 들어요. 근데 중요한 건, 우리는 머리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최근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개념을 알게 됐어요.

 
   ─네, 저도 그 얘기를 조금... 근데 표현 불능증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거부하신다?


감정표현불능증(Alexithymia)은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심리적 상태를 말합니다. 이 증상을 가진 사람들은 감정을 명확히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워하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거나 공감하는 데도 어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표현불능증은 정신 건강 문제나 스트레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등과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참 얄밉다. 딱히 검색한 적도 없는데 이혼변호사, 가정불화, 부부 갈등 같은 콘텐츠가 어떻게 계속 뜨는지... 그리고 환승연애랑 솔로지옥은 이렇게 개판이 돼버린 내 인생하고 대체 무슨 상관인지... 그렇게 유튜브 알고리즘의 파도에 휩쓸려 떠다니다 우연히, 바닷가에 밀려온 유리병처럼 한 프로그램을 마주했다.


사연 속 주인공이 어릴 적,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학교에서 늘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거 같다. 그리고 그렇게 잘 자라준 고마운 청년이, 성인이 된 지금. 불 꺼진 방에 웅크린 채 서럽게 우는 장면이 나왔다. 

지난날 자신에게 따뜻하지 못했던 엄마에 대한 원망과 서러운 감정이 깊은 상처로 남아 아직도 괴로워하는 사연이었다. 가슴 찡하게 공감됐다. 누군가 '다 큰 어른이 돼서도 그렇게 서러울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면, 그 사람의 공감 능력을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에게는 저 사연이 '이제 막 아물어가던 상처가 다시 찢어지는 듯한 아픔처럼' 다가왔다.


조심스레 사연을 지켜보던 오은영 박사가 어머니에게 "감정표현불능증"에 대해 말했다. 그걸 보자마자 나도 그런 걸까 싶어 한참을 찾아봤다. 그리고 나도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문득, '감정표현불능증'이라는 단어를 알게 해 준 알고리즘이 새삼 고마웠다.




   ─화라는 감정도 저고 기쁨이라는 감정도 인데, 화라는 감정을 무시하고 괴롭다는 감정을 억누르고 사는 패턴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이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까요. 그동안 무지하게 노력하신 거죠.

 

   ─솔직히 세상에 안 힘든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그렇게 견디며 사는 건데. 하지만 또 그렇게 일반화하기에는 너무 저마다 주어진 인생이 다르잖아요. 어쨌든 그동안 제가 '노력했다'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무지무지무지 지금 통제하려고 노력하신 거 같아요. 그걸 조금만 낮추면 뭐가 혹시 걱정되세요?

 
   ─걱정되는 것도 없고 이렇게 잘 살아왔듯이 앞으로도 잘 살 자신이 있어요. 근데 모르겠어요.

 

   ─그런데 화가 팍! 나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거죠.


   ─......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읽어요.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먹기에 따라 극복하지 못할 일은 없다’는 말을 더욱 깊이 믿게 됐어요.

 

   ─근데 사실, 마음먹는다고 모든 걸 다 할 수 없어요.


   ─......


   ─지금 상황은, '도저히 이건 불가항력이다.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되지' 싶어요.

   ─길을 잃은 것 같아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되지? 결국 여기까지 왔지만, 그러니까 이 상황을 인정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겠어 그래서 나 혼자 방법을 좀 빨리 찾고 싶어. 방황을 덜 하고 싶어.' 그런 심정이에요.

   ─요즘 예전에 썼던 일기장을 꺼내서 보고 있어요. 지금 근데 변한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일기를 어느 새부터 안 써요. 너무 자아비판적인 내용만 계속 있으니까 별로 도움 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러니까 이런...

 



   ─......


   ─가만히 있어 보시겠어요. 생각은 좀 그만하고... 자기를 추스르려는 노력도 지금은 잠깐만 멈춰보세요. 머리가 아니라 선생님 몸에서 느껴지는 것들이 뭔지 귀를 기울여 보세요."


   ─후...

 

   ─그걸 막지 말고 그냥 말로 하시면 돼요.
 
   ─어제 딸한테 그렇게 화를 내고 나서 사과를 했어요... 그리고 얘기했어요. 



   너무 힘들어.
내가 너무 힘들어서,
   우리 딸이 나를 좀 도와줘야 해...

 


   ─......


   ─뭐가 그렇게 힘든 걸까요? 원 가족일까요?


   ─그런 것 같아요. 


   ─......


   ─그럼 원 가족 얘기를 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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