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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그동안 무너지지 않으려고 온 힘을 다했어요

이혼일기, 첫 번째 상담 episode  4.

by 검정멍멍이 Mar 12. 2025




좋아하는 코발트블루 니트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쌓여갔다.
창 밖으로 쏟아지는 새하얀 눈처럼 펑펑.



뭐가 그렇게 억울했을까? 눈물을 삼키려다 문득, 마지막으로 이렇게 누군가 앞에서 서럽게 울었던 언제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눈물을 잘 안 흘리는데 제가 많이 괴롭긴 한가 보네요.

먹물이 번지듯, 억눌렸던 감정이 퍼져나갔다.


    엄마에게 한동안 상처로 남을 말인 걸 알면서도 '절대 엄마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했는데... 그렇게 버릇없고 모질게 굴면서까지 다짐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엄마 같은 사람이랑 살고 있네요. 어쩜 운명이 참...


    옆에 휴지 있습니다.


익숙한 일인 듯, 선생님이 말을 건넸다. 그래도 그 말속엔 따뜻한 온도가 있었다. 벽에 붙은 "공감" 이란 단어가 도드라지는 순간이었다.


    휴... 인생이 어찌 이리 야속할 수 있는지...


'어찌 이리 야속할 수 있는지.' 멍하니 내가 뱉은 말을 따라 했다. 그러곤 나 혼자 있는 공간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머쓱해진 상황을 무마하려 천천히 고개를 뒤로 기울였다. 아니, 자연스럽게 움츠렸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하겠지. 




지난 3년 동안, 매일 아침 감사일기를 썼다. 딸을 제외하면, 그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일기의 마지막 줄엔 언제나 "아모르 파티" 라고 적는다. 그리고 눈을 감고 조용히 되뇐다. 그러면 하루를 온전히 시작하는 루틴이 마무리된다. 니체는 아모르 파티를 통해 삶의 고통과 어려움까지도 긍정하고, 이를 통해 더욱 강하고 숭고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고 했다. 



아모르 파티 :
내 운명을 사랑하라.



아모르 파티를 매일 빠짐없이 적게 된 건 니체 때문은 아니다. "내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을 되새기지 않으면 역설적이게도 '네 운명을 원망하라'며 자책할 것만 같았다. 어떤 날엔 딸이 먹던 롤리팝 사탕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듯, 나도 스스로를 던져버릴까 봐 무섭기도 했다. 여하튼 '시작'은 그랬다.




    근데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랑 살고 있는 게 진짜... 그리고 딸한테 훈육이라는 이유로 불현듯 엄격해지는 제 모습을 볼 때면, 어릴 적 그렇게 미워했던 아빠 모습이 지금의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너무 괴로워요.

    ─그게, 그게... 가장 힘든 것 같아요.
    만약 우리가 3년 전에 이혼을 했다면 공허함을 견디며 살 수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가끔 해봤어요. 그랬다면 지금처럼 딸이 커가는 걸 온전히 지켜보지 못했겠죠... 

    올해가 좀 중요한 변곡점인 것 같아요. 내가 이 고통을 얼마나 더 견뎌낼 수 있을까, 차라리 이쯤에서 그냥 다 그만둘까 싶기도 해요. 합의는 안 될 것 같으니, 법원 판결에 따라 제가 양육을 하든 남편이 하든 그게 차라리 속 시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생각으로 본인을 추스르고 사는 방식을 굉장히 오래 해오셨던 것 같은데, 어쩌면 지금이 한계인 거예요.

 
    맞아요. 그런 것 같아요. 그런데 할 수 있어요. 저를 알아요. 저는... 아직 , 할 수 있어요.

 
    더 하면 안 될 것 같아...

  

    돌이켜 보면, 답이 보이지 않아 막막했던 삶의 고난들도 그동안 잘 극복해 냈으니까. 지금 이 고통도 잘 극복할 수 있다고 믿어요. 그리고 사실 이렇게 상담을 하러 오는 것도 고민이 많았어요. 아직 견뎌낼 힘이 분명히 이 안에 남아 있을 텐데 괜히 설레발치는 거 아닐까 싶기도 했고...

 

    '제3자의 시선을 내가 받아들일 거야. 그래서 난 더 나를 잘 추스를 거야'라는 마음은 제가 진심인 건 알겠어요. 그러나 제가 아직 잘 모르지만, 느껴지기로는 선생님 안에 지금 많은 걸 참아내고 당면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살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들을 하고 계시고, 많은 노력을 하시기 때문에 여유가 별로 없어 보이세요.

 

    네, 그런가 봐요.
 

    오늘은 아직 선생님이 원가족에서 뭘 겪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동안 어려운 상황들을 견디느라고 스스로 굉장히 많이 노력하셨겠죠. 그러니까 어떤 다른 사람을 이렇게 받아들일 여유가 별로 없으셨을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감정 표현도 잘 어렵고, 감정표현불능증이라고 표현하셨듯이 아마 남편이 그런 부분을 자꾸 이렇게 흔드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괜찮다면 선생님한테서 여유 공간을 좀 만들어내고 꽉 짜인 어떤 머리를 좀 풀고 만나고 싶네요.

    ─지금 현재 선생님이 제일 힘든 게 뭘까요?




다른 건 다 참을 수 있다. 내가 제일 힘든 건 그 사람이 자꾸 딸 앞에서 싸우는 상황을 만드는 거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딸이 받을 스트레스를 생각하지 않는 무관심인지 모르겠지만. 아무리 싸움을 피하려 외면해도 계속 딸아이를 앞에 두고 시비를 걸어오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어제 그 싸움 이후 한숨도 못 잤어요. 앞으로 또 애 앞에서 시비를 걸어오면 그냥 집을 나가야겠다 싶고요. 어제는 아예 애를 안고 와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패턴이 너무 읽혀서 '애 앞에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라고 제가 침착하게 얘기했어요. 그렇게 '아이 앞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 얘기하지 마'라고 했는데도 멈추질 않으니까...

  

    ─남편에 대한 화가 힘드신 거죠? 미움, 화. 정확히 그게 화인가요? 괴로운 이유가 대개는 감정이거든요."
 
    ─그렇죠. 남편에 대한 미움이겠죠?

 
    ─근데 남편에 대한 얘기를 이제는 하실 수 있으실 것 같은가요?

 
    ─"의미 없는 얘기를 하는 자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의미 없는 거를 별로 하는 거를 안 좋아...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냥 감정일 뿐인데. 상담은 왜 해보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냥 원가족 얘기를 하면 남편에 대한 화가 내려갈 것 같아서?


    ─상담은 제가 왜 이러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고 싶은 건데, 저도 저를 잘 모르겠으니까요... 선생님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과연 이게 어디서부터 꼬였을까 돌아보고 싶었어요. 그 과정 속에서 '지금 남편과 억지로 살고 있는 제 환경을 차라리 빨리 벗어나는 게 좋을까?'라는 솔루션을 찾을 수도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네. 아까 보셨죠? 처음에 드린 안내 내용에 상담은 솔루션을 주는 게 아니라고...

 
    ─아... 그렇죠. 사실 솔루션은 제 스스로한테 있을 수 있고요... 아마 대화하다 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휴...


지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조차 나를 존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자각했던 날이 있었다. 하현달이 유난히 밝던 그 밤에 시작된 고민은 어느새 짙은 어둠을 밀어내며 천천히 새벽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결코 자신의 운명을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결정하게 내버려 둘 사람일 수가 없다. 스스로 삶을 개척하며 살고 싶다. 지금껏 그렇게 잘 살아왔다. 그리고 이젠 딸을 위해서라도 "전보다 더 용기를 내어 생각한 대로 사는 사람"이어야 했다.




    ─지금은 어떤 기분이 드세요?
 
    ─기분이라... '어찌할 바 모르겠어요'라는 것도 기분일까요?

 

    ─네, 그럼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숲속에서 헤매는 기분이랄까요?

   

    ─굉장히 많이 인지적인 부분, 즉 머리에 많이 의지하고 자기를 통제해 오셨는데 지금 상담에 대해서 조금 안내를 드리자면 상담은 머리보다는 가슴에 가까워요. 자기 머리가 아니라 자기 마음과 이렇게 닿는 거거든요. 그거를 자꾸 해보는 건데. 선생님 얘기를 듣고 있으면 이렇게 뱅글뱅글뱅글 굉장히 빨리 이렇게 도는, 그런 장치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어떤 얘기를 해도 어떤 제안을 해도 다 튕겨지는?"

 
    ─네...


    ─사실 조금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조금 멈추셔도 되는데 그동안 너무 버티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이걸 멈춘다는 게 지금 감도 안 오 실 테고...


    ─......


    ─멈출 수가 있는 생각에서부터 멈추면 어찌 될지도 모르겠는... 그런 상태인 것 같아요. 괜찮아요. 제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선생님이 그동안 잘못된 방향으로 해왔고 잘못됐다는 얘기가 절대로 아니에요.

    ─지금까지는 그게 먹혔고 그렇게 한 덕분에 지금까지 잘 추스르고 이만큼 살아오고, 이만큼 어른이 돼 왔잖아요? 잘하셨어요. 근데 이제는 조금 다른 방식의 어떤 흐름을 좀 타는 법을 배울 때가 돼서 아마 상담소를 찾지 않았을까. 그죠?


    ─네, 뭔가 제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생각한 대로 된다.", "통제하면 된다.", "노력하면 다 된다." 그동안 이런 비슷한 말들만 눌러 담고 수집해서 사셨는데, 잘 찾아보시면 더 많은 이야기들이 아마 또 다른 세상에 있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조금 더 다른 세계가 있다.
    ─인간은 그렇게만 될 수 없는 존재다. 뭐, 이런 것들이 또 이제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그런 쪽으로 이제는... 선생님이 스스로를 통제하는 훈련을 많이 해왔으니까 그걸 바탕으로 이제는 어떤 바운더리를 조금씩 넓혀가는, 선생님의 품을 조금씩 넓혀가는, 조금 느슨하게 돌아도 되는... 그런 방식을 한번 해볼까요?
  

    ─네. 그래야겠죠...
 



애 너무 많이 썼어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오늘 선생님이 전달해 주신 거는
'나 그동안 무지무지하게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많이 썼어요.
그렇죠? 그건 알아줘야 돼요.' 이런 게 느껴져요.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요. 애 많이 쓰셨고 되는 대로 안에서 막 폭발하는 대로 살지 않으려고 굉장히 애쓰신 건 훌륭하고 존중합니다. 잘하셨어요. 혼자서는 그게 된 거죠. 근데 이제 누구랑 같이 살면서는 나는 그렇게 통제가 되는데 누구랑 같이 살면서는 이 둘 사이에 일어나는 것들은 다른 변수가 있으니까 너무너무 통제가 안 되니까 얼마나 많이 속상하고 당황하고 화가 나고 그랬겠어요.

 

    ─맞는 말씀인 것 같아요.
 
    ─무슨 얘긴지 잘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와서 선생님이 다른 방식을 조금 이제 시도해 본다는 게 그동안의 선생님의 노력이 절대로 헛되거나 선생님 방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거를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약간 선생님이 새로운 걸 하기 위해서 굉장히 많이 긴장해 있고 낯설어하고 반면에는 아니라고 하실 수도 있지만, 어쩌면 많이 두려워하실 수 있겠다 생각이 들어요.

 

    ─맞아요.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아마 두려움을 다른 감정으로 감추려 애쓰며 살아온 것 같아요.



뭔가 마음 아픈 게 많이 느껴지네요.
그럼 어떻게 앞으로 계속 진행을 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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