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첫 번째 상담 episode 2.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되셨어요?"
─음... 결혼은요...
─소개팅으로 만났고 연애를 짧게 했어요. 그게 실수였죠.
─몇 달 하셨는데요?"
─세 달이요. 많이 짧았죠...
─결혼을 결심하게 된 어떤 점이 있으셨을까요?"
소개팅 첫날. 그와 카페에서 만났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보랏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밖으로 나왔다. 점심도 아니고 저녁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에 커피를 마시고 나오니 다음 동선이 애매했다. 그래도 부드럽게 흘러가는 예쁜 구름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다.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아 식당을 가기도 그렇고 또 그냥 이대로 헤어지기도 아쉬웠다. 나는 그랬는데 다행히 그도 그랬다. 몽글몽글과 간질간질의 사이 어디쯤이었을까?! 애써 들뜬 내색을 감추며 뭘 할까 고민하다 길 건너 떡볶이집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떡볶이는 내 소울푸드다. 그래서 우리가 취향이 맞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무심코 그냥 저기 보이는 대로 가는 건 어떠냐는 나의 제안에, 자기도 떡볶이 진짜 좋아한다며 흔쾌히 답하는 그의 취향이 반가웠다. 빨간 간판이 예뻤던 동네 떡볶이 집에서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스쳐 지나갔고, 우리 둘은 마치 무대 위 핀조명 아래 앉아 대사를 주고받는 주연 배우가 된 기분이었다.
─저는 "용기를 내어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이 말을 참 좋아해요.
헤어지는 지하철로 가는 길. 퇴근 후 의자에 툭 던져놓은 카디건처럼 그에게 무심코 한마디를 흘렸다.
─우와!!! 정말요?! 저도 그 말을 참 좋아해요. 매 순간 우리가 진짜 원하는 삶을 탐구하고 추구하려 노력하는 게 어렵지만 너무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언뜻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인데,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탐구"와 "추구"라고?... 그 남자는 어울리지 않을 법한 두 단어를 센스 있게 조합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을 묘사했다. 나직한 목소리는 묘하게 끌리는 힘이 있어, 진취적이고 책임감 있는 사람인지 더 알고 싶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데이트 첫날 소박하게 떡볶이를 먹는 행복을 이해하는 사람이라 좋았다. 그리고 생각한 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라니...
그렇게 세 번째 만남에서, 우리는 깍지를 끼고 함께 걸어가 보자고 약속했다.
─남편이 살아왔던 배경을 들어봤어요. 중학생 때 부모님이 이혼하셨고 방황을 좀 했던 것 같아요. 딸 둘에 아들 하나. 그렇게 자식 셋을 어머니 혼자서 키워내셨죠. 첫째가 공부를 좀 했는지 부족한 형편에도 힘들게 뒷바라지를 하셨는데 수능을 망쳐서 재수를 했나 봐요. 자연스레 한 살 터울이고 둘째인 그 사람은 집에 돈이 없다는 이유로 대학을 못 갔대요. 그리고 막내 때는 집안 형편이 좀 나아져서 대학교 학비를 지원해 주셨다고 하더군요."
─여하튼 자기만 학비를 못 받은 게 영 서운했나 봐요. 혼자 돈 벌어서 학점은행제로 수업 듣고 대학 졸업장을 땄다고 말할 때 그간 내색하지 않고 참아왔던 서러움이 느껴졌어요. 남편이 사회생활도 가장 먼저 했어요. 오래 일을 했으니 용돈도 어머니께 제일 많이 드린 것 같고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살았더라고요."
─왠지 토닥여주고 싶었어요. 그간 모질었을 삶을 잘 견뎌온 그 사람이 대견했고요. 결혼을 결심한 건 그런 삶의 사연들로 미뤄 짐작했기 때문이죠. '어렵고 힘든 배경 속에서 잘 살아왔고 그래도 씩씩하게 잘 견뎌왔구나.' 싶었으니까...
씩씩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있는 사람.
모진 시련들을 모두 견디고 이겨낸 용기가 있는 사람이라면
앞으로 살면서 부딪힐 수많은 역경도 함께 헤쳐나갈 수 있겠구나' 싶었어요.
...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았겠어요. 제가 남편을 서른둘에 만났고 고작 3개월 연애하고 결혼을 했으니 뭘 얼마나 알았을까요. 물론 그땐, 아직 잘 모르는 나머지는 살면서 알아가보자 싶었죠. 그리고 어른들 중에, 이혼한 가정은 조심해라 또 대학은 어디를 나왔으며, 회사는 어디를 다니는지 등 모든 걸 다 알아보고 따져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잖아요. 저는 그런 거 딱 질색이었거든요. '이런저런 배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잘못된 거다'라고 굳게 믿었고, 당당하게 잘 성장해 온 그 사람이 왠지 더 멋지고 좋았던 거죠.
─네, 그랬군요.
─근데 뭐... 아마 아시겠지만 결혼하면 또 다르잖아요. 막상 결혼하면 많은 일들이 생각과는 다르잖아요...
물론 당연히 제가 몰랐던 부분이었겠죠. 결혼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어떤 부분을 몰랐었다고 생각이 드세요?
─그런 표면적으로 연애할 때 얘기했던 내용들이요. 그때 들었던 것과 살면서 느꼈던 것들이 서로 밀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순탄치 않은 가정환경을 잘 극복해 내면서... 아무튼 그렇게 선인장처럼 버티면서, 마음속에 따뜻한 수분을 머금고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남편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매력을 느꼈던 거고...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뿌리가 깊어 든든한 대나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갈대처럼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리고 하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약한... 사람?
─네... 직업 특성상 항상 냉정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생긴 직업병일까요? 어느 순간부터는 남편은 내가 그토록 믿고 함께하고 싶었던 '깊이 있고 밀도가 높은 사람'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만...
─뭐,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또 실패할 수 있잖아요? 결과적으로 제가 성급히 결정한 결혼이 실수 혹은 실패였다고 결론을 내리는 게 맞는 거겠죠. 아마... 그게 맞겠죠.
말을 안 하고 산지 1년 차였던가? 한밤 중 건너편 아파트 곳곳에서 드문드문 새어 나온 TV 불빛이 창문을 뚫고 흘러들었다. 평소엔 신경도 안 쓰던 빛이, 그날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덕분에(?) 잠이 오지 않아서 뭐라도 집중하려고 틀었던 드라마에서 한 대사가 가슴에 꽂혔다.
"후회는 현실에서 겪는 가장 큰 지옥이다"
야심한 그 밤, 담담하고 차분한 대사가 나에게는 찢어지는 울부짖음으로 들렸다. 펑펑 눈물을 흘렸다. 심지어 뭔가 누아르적인 씬(Scene)에서 나온 대사였기에 나도 내 눈물의 의미가 뭔지 몰라 당황했다. 거지 같은 기분이었다. 행여나 혼자 흘리는 격한 공감의 눈물 소리를 그가 들을까 이불을 뒤집어썼다.
문득 생각했다. 후회?! 그래, 그냥 이대로 이렇게 사는 게 오히려 땅을 치고 후회할 일 아닌가? 할까 말까 하는 일은 그냥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요즘 세상에, 이혼한다고 해서 세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아이를 책임지고 잘 키우면 되는 거지. 이렇게 남편이랑 맞지 않는데 지금처럼 사는 것만큼 괴로운 건 없으니 차라리 갈라서고 잘 살면 되지 않나 싶었다. 남편도 나 없이 더 잘 살 거고, 나도 혼자 더 잘 살 자신 있고 그렇게 저마다의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면 진짜 후회없이 더 잘 사는 거 아닌가? 그게 모두에게 좋은 거 아닌가?
근데 문득 언젠가부터 가정의 문제가
남편이 포커스가 아니라
저의 원가족에 대한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최근 들어서 그런 생각이 많이 올라오는 거 같으세요?
─엄마한테 예전에 남편 만나기 훨씬 전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엄마 같은 사람하고 절대 결혼하지 않을 거라고요. 사실 저희 남편이 엄마랑 똑같거든요. 거기서 제가 많은 좌절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원가족 이슈를 자꾸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고...
─사실은 애가 뱃속에 있을 때 처음 이혼하기로 했었어요. 그때 정말 갈라서자고 했을 때가 결혼한 지 한 6개월이 채 안 됐을 신혼 때였을 거예요. 그때 이미 양가 부모님께 이혼한다고 말씀을 드리고 신혼집에서 짐도 다 빼서 나왔었죠.
─그렇게 한 달 반인가를 따로 살았는데... 도저히 뱃속에 애를 생각하니 이혼은 못하겠더라고요.
─아... 그러셨군요.
─그래서 결국 어찌어찌 애 때문에라도 다시 잘 살아보는 거로 이야기를 했죠. 그리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부부 상담도 받았어요. 한 10회기 넘게 받았을거예요 아마...
─그 부부 상담에서 혹시 두 분 관계에 대해서 좀 알게 된 거나 통찰하게 된 게 있으실까요? 뭐, 도움이 됐던 부분이나...
─도움이 됐던 부분?!
─......
─사실 저는 별로 도움 안 됐어요. 왜냐하면 그 상담 선생님이 그 사람한테 감정 이입을 했다고 느꼈거든요. 그리고 핵심은, 상담 이후에도 서로 예민하게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상담 선생님이 너는 이랬어, 너는 그렇데' 이렇게 말하면서 저를 긁는 거예요."
─정말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왔죠. 우리가 회복하고 치유해 다시 잘 살아보자고 상담을 시작한 건데 그걸 무기 삼아서 저런식으로 말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그때마다 더 큰 싸움으로 번지면 행여나 애기한테 안 좋은 영향이 갈까 봐 그냥 참고 넘어갔던 날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나중에 저 혼자 상담할 때 그 선생님한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상담 때 선생님이 해주셨던 이야기를 우리 부부가 다툴 때면 남편이 언급하는데 그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상담 선생님도 배우자와 그런 괴로운 적이 많이 있었다며 남편에게 공감한다는 이유로 말씀해 주시는 것 같은데, 남편이 자꾸 상담 때 선생님과 대화했던 사례를 언급하면서 저에게 말하는 상황으로 문제가 자꾸 생기고 있어요. 그럼 선생님조차 상담 때 중립을 지키지 않고 배우자는 약간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네가 참고 살아라 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주신 거 아니냐? 그래서 우리 부부 관계에 오히려 역효과가 난 것 같다." 뭐... 이런 얘기를 했었죠.
─그래서 그 상담에 대한 좀 신뢰가 많이 깨지셨군요. 그러면 혹시 남편이 선생님한테서 힘들어하는 부분은 뭘까요?
─저한테요?! 말투라고 맨날 얘기하는데, 주로 그게 트리거예요.
─지금 말씀하시는 거 봐서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어떤 말투가 나오는 거예요?
그 순간...
"가슴속의 부질없는 희망이
컵에 담긴 물마냥 출렁였다"
이 말로 "어떤 말투"를 대신하고 싶었다.
말투를 재연하는 게 적잖이 곤혹스러웠다. '차라리 녹음을 해둘걸' 하는 생각이 사방으로 튀는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어쨌든 어젯밤 사건을 '재현'하며 동시에 선생님이 알고 싶은 말투를 '재연'하기 위해 노력했다. 맥락은 이렇다.
1. 남편이 애를 안고 방으로 왔다.
2. '내일 애 누가 보냐, 어떻게 할 거냐' 물어보길래, 어떻게 할 거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일 하나도 못 했고 지금 9시인데 지금부터 못한 일 시작해야 한다고 상황을 설명해주다 순간 짜증이 너무 많이 났다.
3. "어떻게 할 거냐"라고 나한테 물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 거냐? 그럼 또 나보고 해결하라는 거냐고 물었더니 싸움이 커졌다. 애초에 그냥 애를 유치원에 보내는 방법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는데 눈치가 없는 건지 모르는 척 하는 건지... 뭔가 저 질문으로 나를 압박하는 느낌이 너무 스트레스였다.
4. 결국 '너는 니 말투를 좀 돌아봐라' 하며 서로 막 말로 이어졌고 눈 앞에 보이는 딸에게 너무 미안했다.
5. 불쌍한 우리 딸이 상처받을까 봐 더 이상 아무 말 안 하고 그냥 고개를 떨궜다.
재연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루아침 쌓인 응어리가 아닐텐데 남편도 아닌 남 앞에서 서슬퍼런 '말투와 목소리는' 나올 수가 없는 거였다. 아무렴 내 말투가 처음부터 괴로움에 울부짖는 xxx 같았을까...
─음... 들어보니 뭐 그렇게 세지는 않은데요... 어쨌든 이미 마음을 닫은 건 느껴진다. 그렇죠? 남편에 대해서 선생님이 마음을 완전히 닫았고요.
─네. 그러니까 거기서 더 얘기를 하면 이제 싸움이 커져서 애가 듣기 때문에...
─결국 애가 슬퍼서 울거나, '엄마랑 아빠 싸우지 말랬지?' 하고 다그칠 정도니까요... 그래서 그 지경이 되면 결국 제가 그냥 말을 멈추고 참아요. 그리고 심호흡하면서 명상해요. 그냥 눈 감고.
─근데 그... 어제 사연이 지금 말씀해 주신 그게 다라면, 지금 뭐가 느껴지냐면 선생님 안에 지금 꽉 꽉 꽉 꽉 채워진 에너지가 굉장히 느껴지거든요. 참고 또 참고 얘기를 하시는 그런 느낌이 드네요. 벽도 쌓고..."
─그런 말투를 얘기하는 걸까요 남편이? 어쨌든 그런 걸 본다면 남편은 뭔가 매번 선생님한테 그래도 새로운 기대를 하시는구나. 아..."
─네, 모르죠.
─애기는 유치원을 가나요?
─네. 휴...
...
─너무너무 화가 나 계시네 남편에게...
─그래서 저는... 남편이 지금 제가 처한 문제의 원인은 맞지만, 어차피 결론은 났고 또 계획이 있으니까요...
─언제쯤 이혼하실 생각이에요?
─2년 뒤예요.
─아... 2년을 살아야 되네?!
그래서 많이 괴로워요.
벌써 이렇게 참고 산지 3년이에요.
이제 3년 참았어요.
앞으로 2년만 더 참으면 돼요.
─그런데 굳이 왜 2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