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프롤로그
입술이 터졌다. 왼쪽 아래 부분. 입술은 언제나 같은 자리가 터진다.
입술포진은 터진 자국이 번지지 않게 서둘러 약을 바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실 입술이 터져서 보기 흉한 것도 싫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었다.
입술이 터지면 면역력이 바닥을 쳤다는 뜻이니까. 더 이상 견뎌낼 힘이 없으니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고 몸이 먼저 말하는 거다. 면역력이 바닥을 쳤으니 이제 회복할 일만 남았다고 몸이 알려주는 게 오히려 고마울 다름이었다.
띵동!
찌이익.
"방금 들으신 곡은 비발디의 네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 B단조, RV 580입니다. 이 곡은 아폴로스 파이어(Apollo’s Fire)의 연주로 감상하셨습니다. 아폴로스 파이어는 작곡 당시의 악기와 연주 스타일을 최대한 살려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 앙상블입니다."
"이어서 오늘 비발디의 작품을 마지막으로 감상하며 클래식 음악의 다채로운 매력을 느껴보셨을 텐데요. 내일 목요일 방송에서도 엄선된 명곡들을 준비하고 있으니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내일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저는 여기서 인사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클래식 음악이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을 넘어 나지막이 대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상담하고 있나 보네..."
나는 버튼으로 열어준 문을 밀고 들어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현관 혹은 작은 방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할 구역을 구분하는 데크 안으로 넘어갔다. 클래식 음악이 문 앞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던 나를 잘 왔다고 토닥여 주는 것만 같았다.
10분을 넘게 들어갈까 고민하던 문 밖의 나를 생각하니 괜스레 머쓱해졌다.
"잠깐 기다리세요."
"네!"
잔잔하게 흐르던 클래식 선율이 시끄러운 광고로 바뀌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한 채 대답이 툭 튀어나왔다.
벗어나고 극복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그것에 가까이 다가가서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좋은 말이었다. 아직은 내가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는 좋은 말...
"들어오세요."
"피곤하셨나 봐요"
"아니요. 원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이렇게 입술이 터지고 또다시 이렇게 되면 이제 다시 괜찮아져요."
그리고 마음도 괜찮아져요. 이렇게 한번 완전 곪아 터지면요. 원래 그래요."
"어떻게 지내셨어요?"
"음... 그냥 그냥 지냈어요. 저번 주보다는 평온한 상태로 지내려고 노력을 했었던 것 같아요."
"부부 사이에는 별일 없었고?"
"제가 별일이 생기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회피하니까... 무시하고 회피하니까 별일이 없죠."
"별일이 항상 생길 건덕지는 많은데 제가 그냥 참죠."
"흐음... 생길뻔한 일은 뭐가 있었어요?"
"그가 갑자기 안방에 커튼을 달았어요."
"그는 자꾸 가리는 걸 선호하는데, 가리는 것도 뭔가 어떤... 그 본래의 목적을 훼손하고 가리는 거를 선호해서... 커튼으로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를 막았더라고요. 안 그래도 살짝 서향이라 해가 잘 안 들어오거든요."
"근데 그게 자꾸 떨어지는 커튼봉이라 많이 불편하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아침에 햇살이 들어오면 애한테 밝은 햇살을, 해가 떠 아침이 시작된 기운을 느끼게 해주고 싶어서 저는 커튼을 열어젖히고 환기도 하고 이렇게 나름의 루틴이 있거든요."
"근데 커튼을 쳐놔서 아침이 됐는지도 모르게 그렇게 해놨길래..."
"암막이에요?"
"아뇨 암막 커튼은 아니고 흰색이요."
"근데 어쨌든, 주말 아침에 딸이 커튼을 열어젖히다가 바닥에 떨어졌고 굳이 애써 커튼을 달아놔서 일거리를 늘리네 하고 못마땅했던 터라 커튼을 다시 달아놓지 않고 뒀어요."
"근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저한테 오더니 커튼 자꾸 치지 마! 이러는 거예요."
"화가 났지만 내가 안 쳤어! 그냥 그러고 더 이상 아무 말도 안 했죠."
"거기서 할 말이 많았는데 그냥 꾹 참았어요. 그리고 딸이 눈치가 빨라서 그러고 쪼르르 달려오더니 커튼을 치면 불편하잖아! 하면서 자기가 떨어뜨렸다고 먼저 얘기를 하더라고요."
"아휴. 애가 두 분 사이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을 거 같아요."
"그렇죠. 많이 받겠죠. 그러니까 거기서 만약에 제가 한마디라도 더 하면 애가 알기 때문에 제가 그냥 멈추는 거예요."
"멈춰도 부부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되게 크죠."
"그래요? 음... 긴장은... 없겠죠?!. 거기서 뭔가 대화가 핑퐁이 더 되면 아이가 긴장된다고 느낄 텐데, 제가 거기서 대화가 일방으로 흐르고 받아쳐주지 않으니까 애는 그냥 말을 했나 보다 라고 느끼고 끝나는 상황이죠."
"예전에는 이렇게 핑퐁 하면서 싸우면 유리 깨지듯이 쨍그랑 쨍그랑하는 걸 아이가 느꼈을 건데 그걸 제가 없애는 거니까요..."
"지난 시간에 원가족 얘기를 하셨는데 근데 원가족 얘기를 한번 해 주시겠어요?"
"원가족... 음... 원가족, 이걸 어떻게 해야 되지?"
"떠오르는 장면 장면을 저한테 얘기해 주시면 돼요."
"제가 이렇게 영화를 보듯이 이렇게 볼 수 있게 구체적으로 얘기해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아! 그리고 제가 지난번에 선생님께 드렸던 종이를 나중에 다시 가져가도 될까요? 상담하는 동안에 선생님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고요."
"네, 지금 드릴까요?"
"아, 아니요! 음... 떠오르는 장면이요?"
"네, 어떤 기억이 있으세요?"
"기억?!"
"지금 떠오른 거 지금."
"기억이 떠올랐다기보다는..."
"저는 그런 그냥 제 생각을 그냥 말씀드려도 될까요? 뭐... 기억이 떠오르진 않았고요."
"그냥 기억을, 장면을 얘기해 주시는 게 도움이 돼요.
"기억? 장면?..."
"네, 살아오신 장면. 기억나는 장면."
"어떤 장면이 기억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