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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5년, 말 안 하고 산 지 3년

이혼일기, 첫 번째 상담 episode 1.

by 검정멍멍이 Feb 27. 2025




저녁을 먹고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것.

영화를 보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생각을 공유하는 것.

카페에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다 깔깔대며 웃는 것.

햇살 좋은 날 두 손 꼭 잡고 가볍게 걸으며 산책하는 것.


여느 연인들의 당연한 일상이, 나에게는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행복한 순간들을 누렸던 사치스러운 날도 벌써 3년 전.



"주말에는 뭐 했어?"

"뭐... 그냥 별거 없었어."

누군가가 대수롭지 않은 일들로 채워진 삶의 여백이라며 푸념하듯 물어오면, '나도 똑같았지 뭐'라고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거짓 답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행복.

이제는 더 이상 저따위 사치스러운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피식 하고 넘겨버릴 무덤덤한 일상의 나열이었다.



너무 많이 바랐던 걸까?

행복은 이룬 것에서 바란 것을 빼는 거라고 했는데,
분명 내가 이룬 것보다 바란 게 적은데...

난 왜 행복하지 못할까?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다. 결혼을 결심했던 순간, 지난날 삶을 돌아보니 그간 열심히 살아오며 이뤄낸 것들은 몹시 작고 초라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어쩌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시게 되셨나요?"
 

"음...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여기... 종이를 좀 봐주시겠어요?"
  


"뭐, 생각나는 대로 말씀해 주세요."




나는 굉장히 목표 지향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불현듯 이런 나의 성향과 태도가 스스로를 아주 괴롭게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 살면서 한 두 번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소중한 삶에도 분명한 목표와 의미가 마땅히 있어야 하듯이 상담 또한 그래야만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특정 회기 안에 내가 당면한 삶의 이슈에 대해 잘 극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첫 상담 예약시간은 목요일 오후 5시.

그날 아침, 도서관에 빼곡히 들어찬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구석자리에 앉았다. 접어뒀던 A4용지 한 장을 펴고 무작정 나에 대한 것들을 써 내려갔다. 그냥 생각나는 모든 걸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마인드 맵으로 나를 둘러싼 환경,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주변 사람들 그리고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들과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등...

상담을 하는 동안 주저리주저리 설명을 하겠지만 종이에 정리한 내용을 선생님에게 보여주면 내 삶이 더 명쾌하게 정리되지 않을까 싶었다. 무엇보다 말하다 보면 삼천포로 빠지는 내 정신줄을 저 종이 한 장이 잡아줄 수 있을 것도 같았고... 뭐 그랬다. 


 


 "네, 참고할게요. 그래도 말로 해주시겠어요? 지금 가장 어려운 게 뭐예요?"
 

"가장 어려운 거는 사실은 남편과의 관계죠. 근데  관계를 회복할 생각은 없고요." 음... 딸아이 때문에 같이 살고 있는데 몇 해 전에 이곳에 이사를 와서 지금까지 그냥저냥 살고 있어요."

"여러 가지 경제적 요인도 있고요. 딸아이에 대한 어떤 정서적 지지를 부모 둘 다 있는 상태에서 해야 된다는 그런 책임감 같은 것도 저한테는 좀 있는 것 같고요."
 

"무슨 일 하세요?"  
 
"사무직이요."


"어떤 회사를 다니시나요?"


"그냥 스타트업이고요. 옷을 파는 패션회사예요. 조만간에 퇴사를 할 예정이고요."


"아, 그러세요?"


"네. 육아휴직을 써서 시간을 좀 벌어볼까 싶기도 하고요. 아무튼! 사실 하루이틀 괴로워한 게 아니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름의 방법을 찾고 그럴 이유를 항상 만들어 가면서 잘 버텨 왔어요."

"근데 최근에 제가 가장 괴로운 거는 '딸아이가 받는 그런 스트레스 상황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라는 거. 그러니까 '통제할 수 없다'라는 게 어떤 말이냐면요."

"남편에게 딸아이 앞에서 싸우지 말자고 몇 번을 말했는데도 자꾸 딸아이 앞에서 계속 언성을 높이고 싸울 일을 일부러 만든다는 느낌을 최근에 받았어요. 어제 저녁에도 그런 일이 있어서 하루빨리 상담을 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고요."


"네. 그러셨군요."


"그리고 주말에는 보통 제가 다 육아를 하고 저번 주 같은 경우에는 토, 일 주말 내내 독박 육아를 했어요. 월요일은 남편이 쉬는 날이어서 남편이 봤고요. 화, 수요일에는 애가 아파서 제가 계속 봤었어야 됐던 상황이었죠."

"저번 주말부터 이번 주 내내 아이가 감기로 많이 아프거든요."
"그런데 어젯밤에 불쑥 오더니 '내일은 어떻게 할 거야?' 물어보는 거예요. 근데 대게 이런 상황에서 하는 말 속에는 어떤 의도가 숨어있어요. '답은 정해져 있는데 나는 모르겠으니 네가 알아서 해결해 줘.' 같은 뉘앙스랄까요. 어제도 그런 패턴이 반복되니 스트레스를 받았죠."
"이제는 다 알아요. 그러니까 그런 패턴들을 다 알고..."

"사실, 말 안 하고 산 지도 오래됐어요."
 
"얼마나 됐어요? 언제부터 틀어진 것 같아요?"



그랬다. 남들한테 얘기하면
'미쳤다 그냥 이혼하지 도대체 왜 그렇게 살고 있니'
라고 할 사연이 나에게는 현실이었다.



연애 3개월 차에 결혼을 결심했고, 그 해 바로 같이 살기 시작했다. 돌이켜보니 벌써 결혼한 지 5년. 그중 싸워서 대면대면 하며 살던 날을 빼고, 딸과 관련된 말이 아니면 서로 외면하고 살기 시작한 게 3년째.

사실상 1년도 안 되는 신혼 기간 이후부터 우리는 싸워서 문제가 있거나 남보다 못한 사이처럼 살고 있었다. 물론 결혼을 해 함께 살았던 모든 순간이 지옥같이 괴롭고 답답하지는 않았을 거다. 하지만 '딸을 위한 희생' 이라는 명분이 없었다면, 내 소중한 인생이 그렇게 낭비되게 내버려 둘 이유가 1도 없었다.  


그리고 남들은 참 쉽게 말할 수 있겠지만, 내가 언제나 그들에게 강조해 말하고 싶었던 사실 한 가지.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 지옥 같은 상황을
당장 벗어던지고 싶지 않았을까요?




"사실 배 속에 아기가 없었으면 아마 바로 이혼했을 거 같아요. 그랬다면 오히려 지금보다 잘 살았을 것 같아요. 근데 그게 안 됐으니까 여기까지 흘러왔고... 아이 덕분에 그나마 이렇게 잘 버티고 살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제일 괴로운 건..."


"네. 말씀하세요."  


"누군가 아이에게 부모의 싸움은 전쟁이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괴로움이라고 그러더라고요. 그걸 알기 때문에 제가 예전부터 남편에게 애를 생각해서라도 웬만하면 애 앞에서 싸우지 말자고 했는데 '내일 애 누가 볼 거냐?' 물으면서 싸움이 시작된 거죠. 하필이면 왜 굳이 애를 안고 와서 묻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틀째 연차에, 재택근무에 일을 거의 못해서 내일은 못 본다'라고 말하니까 그럼 어떡하냐고 저에게 되묻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지 않냐, 유치원 보내야 된다.' 말 하니까 갑자기 '애가 아픈데 어떻게 유치원에 보내냐고 저에게 따지기 시작했어요."

"아기 감기가 거의 끝물이라 열도 떨어졌고 콧물만 좀 나오는 상황이었거든요. 애 앞에서 싸우는 모습은커녕 아무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서 '애가 아직 아픈 건 나도 안다. 그럼 어떡하냐 우리 둘 다 일해야 되는데 방법이 없다. 나도 일해야 된다. 화요일 연차 쓰고 어제도 재택 한다는 이유로 집에서 했는데 애가 계속 요구하는 게 많아서 이틀째 일을 하나도 못 했다고 말했죠."

"그러니까 갑자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하냐면서 흥분을 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애를 본가에 맡겨야 하는데 이렇게 늦게 얘기해 주면 어떻게 하냐고 막 따지더라고요. 애는 유치원에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굳이 맡기겠다는 게 참 이해 안 됐어요. 그래도 말을 더하면 싸움이 커지니까 그냥 참았어요."


"아이고..."


"스스로 좀 심각하다고 느낀 건 어제였어요. 어제는 도저히 애를 볼 사람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제가 재택근무를 했어요. 남편은 사무직이 아니거든요. 사실 아이를 케어해야 하는 상황은 제가 어찌 통제할 수 없잖아요. 당연히 그걸 알지만 막상 아침부터 아이가 자꾸 놀아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일에 집중을 하나도 못했어요. 시간을 보니까 어느새 12시더라고요. 결국 오전까지 꼭 했어야 했던 일을 못했어요. 어린애니까 놀아달라고 보채는 게 당연한데, 갑자기 그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아이가 옆에 있는데도 눈물이 터지더라고요. 도저히 눈물이 멈추질 않아서 잠시 화장실에 갔는데 결국 참을 수 없이 비명이 터져 나왔어요."


"그때 남편은 옆에 안 계셨고?"


"네, 출근했죠. 새해 첫날 남편이랑 사건이 좀 있었어요. 그때 이후로 뭔가 심하게 불안하고 심장이 빨리 뛰는 그런 이상한 증상이 시작된 것 같아요."

"사실 애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이혼을 하려고 했었어요. 우리 애가 오른쪽 귀가 안들리는데, 저는 그게 저랑 남편 탓이라고 생각해요. 행여나 아이가 뱃속에 있었을 때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에 잘못되진 않았을까..."
 

"아... 임신 때도 많이 싸우시고? 나이 차이는 어떻게 되세요?"
 

"저보다 한 살 연상이에요. 도대체 남편에 대한 비난과 이런 상황들이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았을 텐데... 사랑했으니까 결혼해서 애도 낳았을 거고 근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됐지 하는 생각을... 꽤 오랜 시간을 스스로 어디서부터가 문제인지를 계속 혼자 찾아보려고 노력을 했는데요. 결국에는 이게 저의 원가족에 대한 뭔가가 있지 않나 싶은 생각에 이르렀어요."


"네, 그럼 선생님 자신에 대한 부분도 보고 싶으신 거예요?"


"예. 그런가봐요."

"저는 '용기를 내어서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 지금까지는 그렇게 잘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나름 이런 신념을 갖고 열심히 잘..." 
"지금까지 이런 저의 긍정적인 모습과 삶의 배경들이 제가 원가정을 의도적으로 멀리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결국 여기까지 와서 보니까 남편과의 불화나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의 근원이 결국에는 엄마와 아빠로 인해 받았던 상처들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거 같아요."

...




"저는 남 탓을 하는 거를 정말 싫어하는데요... 어찌 보면 방금 말씀드린 생각 자체가, 제가 그렇게 싫어하는 남 탓을 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튼 정답을 알았으면 여기까지 안 왔을 거고 혼자 잘 해결했을 텐데 이거는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을 것 같다 싶었어요."

"또 이런 얘기를 친한 친구들에게 하지 않고 부모님께는 더욱 할 수 없고요... 그냥 혼자 삭혀야 되는데 그게 조금 딸아이를 키우면서 받는 스트레스 같은 것들이 쌓이니까 도저히 감당을 할 수 없어 결국 이렇게 상담을 받으러 왔습니다. 저는 무슨수를 쓰더라도, 우리 딸은 제가 어릴적 부모님과 살면서 겪었던 일을 겪지 않게 하고 싶은데 행여나 그렇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큰 것 같기도 하고요..."


"음..."


"부모님과 다르게 살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제 상황이 예전에 제가 겪던 모습과 자꾸 비슷해지는 거 같아서 속상해요. 어릴때부터 목숨걸고 다짐한 게 하나 있어요. '나중에 커서 부모가 되면, 내 자식은 절대로 내가 느낀 감정과 상처를 받지 않고 잘 크게 만들거야'라고요...

  

"아휴 저런..."






태어나 처음 남에게 이런 얘기를 해봤다.
이 가슴 아픈 사연을 다 끄집어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싶었던 걱정과 달리
씩씩한 척, 잘한 척하며 말하는 내가 나도 많이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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