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레모사와 채식주의자

나무가 되는 사람들과 폭력 사회

by struldbrug

**본 글은 스포일러 요소를 포함하는 서평입니다.



김초엽 작가의 소설 므레모사를 읽고 나면, 자연스레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가 떠오른다.

나무(혹은 그에 가까운 형태)로 변하는 인물이라는 아이디어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사건이 개인의 일탈 서사인 반면, 므레모사에서는 집단의 이야기로, 보다 확장된 범위에서 묘사된다.

주인공(영혜, 유안)들에게 식물의 세계는 일종의 유토피아다.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도처에서 날아드는 폭력에 대항함과 동시에 도피하고자 나무가 되는 길을 택한다.

폭력의 대표적 모티프는 육식이다.

인간이 육식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육식이 육식 산업이 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살육을 위해 탄생되는 생명.

도축 과정의 잔학한 이미지는 지워진 채, 깔끔한 포장재에 담겨 나오는 고깃덩어리.

오랜 시간 육식 산업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육식 산업의 기형적 과정을 돌아볼 기회도, 여유도 없다.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채 폭력의 공모자가 된다.


반면 유안은 사회가 자신에게 불어넣는 '무한한 가능성'에 환멸을 느낀 채 므레모사에 편입되려 한다.

춤을 추던 유안은 춤을 추는 데에 핵심이 되는 신체 기능을 거의 상실했으나, 사회는 그녀에게 안식을 허하지 않는다.

모든 개인이 영웅 서사를 이룩할 수 있다는 신화, 어쩌면 미신에 사로잡힌 현대 사회는 그녀가 성치 못한 다리를 이끌고 계속 춤추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치 포르노처럼 소비하고 숭배한다.


재미있는 점은, 두 작품의 주인공 모두 능동적으로 수동적 존재가 되고자 했다는 점이다.

영혜는 사회를 지배해버린 정신적,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려는 인물이다.

살육으로 귀결되는 폭력을 거부하고 그에 저항하기 위해 그녀는 육식을 자행하는 주체(인간)에서 벗어나 폭력의 주체가 되지 않아도 되는 나무가 되기를 자처한다.

기존에 주어졌던 인간의 삶을 거부하고 식물의 세계로 편입하는 모습은 한 개인의 일탈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잔인한 폭력으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적극적 저항으로 느껴진다.


유안이 므레모사에 속하고자 하는 이유는 조금 다르다.

그녀의 서사는 '무한한 가능성'을 긍정하는 현대 사회의 일면을 강조한다.

므레모사에서 묘사하는 사회의 일면은 채식주의자만큼 선명하게 잔인하지 않다.

그렇기에 더 교묘하고 섬뜩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할 수 있음'을 강요하는 일이 결국 개인을 조금씩 갉아먹다 파괴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묘사하며, 결국 므레모사도 보이지 않기에 알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인간과 대비되고 가해자 역할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의 나무와 달리 므레모사의 나무는 사실 원래(본질적으로)는 인간이며, 가해자이기도 하다.

폭력을 행하고 싶지 않기에 나무가 되고자 하는 영혜와는 달리 유안은 레오에게 물리적 폭력을 행하는 가해자가 된 뒤 므레모사의 세계에 들어가려 한다.

채식주의자에서 나무는 가만히 있음으로써 주위를 해치지 않는 긍정적 가치를 상징한다.

반면 므레모사에서 나무는 긍정적 가치를 상징한다기보다는 수동적 존재라는 그 특질 자체가 중요하다.

신체와 정신을 작동시켜 어떤 액션을 하지 않아도 되는 존재인 것이다.


유안이 선택한 유토피아를 희망적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별로 없다는 점에서, 폭력으로 점철된 세계를 거부하고 보다 선한 무언가로 거듭나려 한 영혜의 선택은 미약하나마 혁명적이었다는 점에서, 므레모사의 결말은 독자의 마음을 좀 더 무겁게 한다.


그러나 유안의 선택은 결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 대부분의 현대인이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