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리추얼의 종말

인간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by struldbrug

**책을 모두 읽은 뒤 읽으시길 추천드립니다!


본격적 팬데믹 이후, 물리적 접촉이 갖는 힘은 약해지고, 배제되었다.

대신 비대면, 비접촉의 방식으로 보다 깊고 치밀한 형식의 접촉이 진행되고 있다.


팬데믹 이전에는 외부에서 다가오는 힘에 나를 구성하는 물리적 신체가 대응했다.

팬데믹 이후 비접촉의 세계에서 물리적 신체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다.

외부의 모든 것은 비접촉의 방식을 통해 물리적 신체를 통과해 나를 구성하는 세계로 침투한다.

그림에서, 팬데믹 이후 몸에 생긴 구멍은 단순한 비접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의 상실을 의미한다.

단순하게는 개인의 내밀한 영역(privacy)에 해당한다.

더 깊게는, 책에서 말하는 '자기관련'에의 심화이다.


인간은 세계와 관련하며 타인과 유대하고 공감하며 살아왔다.

온전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자신의 영역에 몰두하는 일(자기관련)은 필수적이다.

동시에 자신의 외부를 구성하는 세계와도 관련해야 한다.

타인과 접촉하고, 유대하고, 공감하고, 함께해야 한다.

과거는 공동체의 소통을 위한 리추얼이 존재하는 연극의 사회였다.

그러나 작가는 작금의 사회는 '극장이 아닌 시장'이라고 표현한다.


지금, 개인이 '세계관련'을 하게 하는 세계는 없다.

모두 자기 관련에 몰두해있는 군중만이 있을 뿐이다.

문화, 도덕, 개성, 가치관, 사상, 그 밖의 모든 것은 '개인'을 나타내는 특색이 된다.

'개인'을 나타내는 특색은 개인의 성취를 위한 도구로 작용한다.

'극장이 아닌 시장'이 된 사회에서 개인의 성취는 결국 자본이다.


물리적 접촉성, 물리적 경계를 상실한 개인은 자기 관련이 숭배되는 군중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개인이 성과를 이룩해내는 신화를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드러내야 하며, 다른 누군가의 신화를 쉽게 소비하는 곳으로 내던져진다.


연극적 형식을 상실한 인간은 물리적 형식(신체)의 갑옷마저 상실해가고 있다.

끝없이 흘러나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조차 어려운 '기의'의 세계만이 존재하고 있다.

'기의'만이 넘쳐흐르는 세계에서 '기표'는 지위를 상실했다.

인간은 더 이상 시의 아름다움을 칭송하지 않는다.



또 하나 재미있었던 부분은 휴식에 관한 고찰이다.

본래 휴식은 물리적 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나 보다 영적인 가치와 맞닿기 위한 의식(ritual)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휴식은 미래에 다가올 노동을 더욱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휴식을 더 나은 노동을 위한 발판쯤으로 삼는 것이다.


'삶에 머물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포기하기'

많은 이들이 '삶에 머물기'에만 치우쳐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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