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이 건넨 델리만쥬에 경계를 풀기로 했다

by 오색경단

용산에서 조치원으로 가는 기차, 정확히는 무궁화호 안이었다.


이 기차는 늘 만석이다. 일주일 전쯤에 미리 예매하지 않으면 하루 종일 마음을 졸이다가 결국 기차역에서 입석표를 사야 한다. 그마저도 있으면 다행이지.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엔 남몰래 무임승차를 해야 하나 나답지 않은 간 큰 고민을 서슴지 않을 정도다.


그날은 부지런을 떨어 미리 예매해 둔 복도 쪽 자리에 당당히 앉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출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아무도 내 옆자리에 앉지 않는 것이다. 다음 역에서 누군가 탈 수도 있겠지만, 그 짧은 시간이라도 혼자 앉아 갈 수 있는 게 기차 안에서는 꽤나 큰 행운처럼 느껴졌다.


나는 짐도 없었고 좌석도 내 몸에 꼭 맞는 크기여서 충분히 편했지만 내가 원했던 건 넓은 자리가 아니었다. 그저 사람들과 잠시라도 부딪히고 싶지 않았다. 다 같이 사는 세상에서 이런 마음이 너무 이기적인 걸까. 1시간 40분 동안 누군가를 의식해야 한다는 게 그날따라 유난히 버겁게 다가왔다.


그렇게 출발하고 9분 정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즈음 영등포역에 기차가 잠시 정차했다. 여러 사람이 기차에 오르는 가운데, 한 할머니가 어깨의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을 건네셨다. 이어폰을 끼고 있어서 정확히 듣진 못했지만, 맥락 상 '잠시만요'가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안쪽 좌석에 들어가실 수 있도록 다리를 복도로 쭉 뻗었다.




할머니는 자리에 앉자마자 나를 톡톡 치셨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낯선 사람의 이유 모를 부름에 깜짝 놀라서 이어폰을 뺐다.


"이거 먹어봐요."


아래를 내려다보니 델리만쥬가 종이봉투 넘치게 담겨 있었다. 내 안의 예민함을 누그러뜨리는 달콤한 냄새가 어디서 나나 했더니 바로 여기였다. 문제는 델리만쥬는 너무 맛있어 보이지만 할머니는 처음 보는 분이라는 것. 어릴 적부터 '모르는 사람이 주는 음식은 절-대 먹지 말라'는 교육을 철저히 흡수한 나는 뭐든 의심하고 보는 뾰족한 가시를 장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먹어도 될까? 정중히 거절해야 하나? 찰나의 순간 델리만쥬를 먹고 싶었던 마음이 훨씬 컸던 건지 때마침 창밖의 델리만쥬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기차역, 따뜻한 델리만쥬. 음식의 출처도 확인됐겠다. 그래, 감사히 먹자.


감출 수 없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헉, 정말요? 감사합니다! 그럼 하나만..."

"많이 먹어요. 너무 많이 사서 그래."



할머니의 무심한 말투가 나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는 걸 증명하는 듯해 의심이 조금씩 사라졌다. 델리만쥬 하나를 입에 넣었다. 평소엔 맛이 강렬한 냄새를 못 따라오는 것 같아 잘 사 먹지 않았는데 나의 착각이었나 보다. 이 한 입은 냄새만큼이나 달고 부드러웠다. 할머니는 봉투를 내 쪽으로 가까이 밀며 계속해서 먹으라고 하셨다.


안양역쯤에서는 바닥이 보일 때까지 눈치 보지 말고 먹으라고, 수원역에선 호두과자가 더 맛있다고 하시더니 평택역에 도착했을 땐 봉투 자체를 넘겨주셨다.



"아휴, 난 더 못 먹겠다. 그냥 다 먹어요."

나는 충청도 사람답게 세 번 정도 가볍게 손사래를 친 후, 델리만쥬 봉투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봉투를 무릎 위에 두고 하나씩 꺼내 먹었다. 할머니는 다시 창밖을 봤고 나는 델리만쥬를 먹었다. 마지막 하나까지 꼭꼭 씹어서.


조치원역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에 손을 얹으며 말씀하셨다.



"괜히 귀찮은 거 아닌가 몰라. 난 여기서 내리니까 내가 버릴게요."

"아니에요! 저도 여기서 내려요."



공짜로 델리만쥬 한 봉지를 얻어먹은 것도 모자라 쓰레기까지 버려주시는 걸 가만 보고 있을 순 없었다. 처음에 의심했던 순간이 자꾸만 떠올라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채 어쩔 줄 몰랐다. 봉투를 꼭 쥐고 있는 수밖에.


할머니와 나는 기차 밖으로 나왔다. 덕분에 잘 먹었다는 감사 인사와 함께 그렇게 헤어졌다.






이 일을 가족들에게 말했더니 모두 다른 반응을 보였다.


동생은 "언니만 운이 좋다"며 혼자 델리만쥬 한 봉지를 다 먹은 걸 부러워했고,

아빠는 "배고픈데 좋았겠네"라며 내 속마음을 짚어내셨다.

엄마는 "거기에 뭐가 들었는지 알고 받아먹냐"며 다음부턴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2년 전쯤인가.

기차 좌석을 구하지 못해 칸과 칸 사이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입석으로 가는데 그때 함께 있던 할머니께서 과자 한 봉지를 주셨다. 뜯지도 않은 새 거였다. 가방에 넣어 두었다가 집에 가서 고민 끝에 그 과자를 버렸다. 분명 친절이었고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어딘가 마음 한편에서 의심의 끈을 놓지 못했던 나는, 결국 죄책감을 가득 안은 채 과자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언제부터 나와 타인의 거리가 이렇게 멀었는가? 너무 험난한 세상이니까 이 정도 경계는 당연한 거라 다독여봐도 나 같은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더욱 차가워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적어도 델리만쥬를 주셨던 순간만큼은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다행히 아무 일 없었고, 그보다 더 다행인 건 내가 조금 더 사람다워졌고, 다음에 또 누군가가 말을 걸어온다면 오늘보다 더 부드럽게 대답할 여유가 생겼고, 언젠가는 나도 옆자리 사람에게 델리만쥬를 건네 보겠다는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날 생각했다.


갓 구운 델리만쥬처럼,

마음껏 따뜻할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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