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태어날 때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엄청난 소심쟁이었다.
물론 남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쉬지 않고 여기저기 쏘아다니는 활발했던 아이였기에 그 누구도 나를 소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떠올려도 왜 그랬을까..? 잘 모르겠다. 자기 전 자꾸만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가슴이 답답해지는 불편한 마음들이 나의 몸과 마음을 지배했던 시절이 있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심장이 벌렁벌렁한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보다. 쥐구멍을 직접 파서 숨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나의 소심했던 과거들을 차례차례 털어놓고 2025년, 더 당당히 살아보겠다.
그리고 이 글이 브런치 스토리 '부모들'에게 아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길이 되었으면 한다. 이번 에피소드는 이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구준표 다이어리
2009년, 나는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8살 여자아이다. 2시쯤 학교를 마친 후 교문 앞에 서있는 버스를 타고 학원에 가 6시까지 공부하는 게 종일 스케줄인. 5월 4일도 어느 때와 같이 하교 후 학원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께선 큰 박스에서 무언가를 꺼내 친구들에게 나누어주고 계셨다. 눈이 마주친 선생님은 나의 이름을 부르며 어린이날 선물을 가져가라고 말을 건넨다. 맞다! 어린이날! 성숙한 어린이로 활동하지만 어린이날만큼은 설렘은 숨길 수 없다.
"(내 이름을 부르며) OO아~ 와서 선물 가져가"
차분한 발걸음으로 선생님께 다가갔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건네주는 선물
"자... 여기!"
선생님의 손에는 핑크색 다이어리가 들려있다. 가운데에는 뽀글 머리를 하고 긴 검정 코트를 입은 남자의 사진이 떡하니 붙어있다. 구준표 다이어리다. 심장이 뛴다. 설레서? 멋있어서? 내가 갖고 싶었던 거라서? 아니! 부끄러워서!!!
(기억할지 모르겠다. 2009년 방영한 드라마 "꽃보다 남자"는 '대'히트를 치며 당시 대한민국은 구준표 열풍에 사로잡혔다. 촌스러운 듯 시크한 뽀글 머리, 느끼한 듯 여심을 울리는 주옥같은 대사. 전국 어디에서나 올모스트 패러다이스가 울려 퍼졌다.)
다시 돌아와 박스 속 잔뜩 쌓인 구준표 다이어리를 확인한 나는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 더 이상 스스로를 말릴 수 없다. 선생님께서 다이어리를 손에 쥐어주시려 하자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침을 삼키고 말했다.
"선생님, 저는 안 가져도 돼요. 필요 없어요."
"OO아 그래도 하나 가져가~"
"아니에요. 저 진짜 없어도 돼요."
방어전이 시작되었다.
"그래도 OO이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데 받아~"
"아니에요."
"왜? 이거 싫어?"
"네"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결국 마지못해 구준표 다이어리를 받아버렸다. 그리고 바로 신발주머니 앞에 있는 찍찍이를 열어 다이어리를 넣었다. 극한의 고비가 찾아왔다. 학교에서 신을 실내화가 담긴 신발주머니를 매일 들고 다니면서 친구든 선생님이든 누군가가 열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극도의 불안감이 밀려왔다. 사실, 가장 큰 두려움은 엄마였다. 신발주머니를 세탁할 때 엄마에게 아직 깨끗하다고 얼마나 설득했는지 모른다. 지금 같으면 버리기라도 했겠지. 나는 그 다이어리를 1년 동안 신발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엄마에게 결국 들켰지만, 그때의 마음은 말하지 않아도 비슷하다... 심장, 불안, 떨림
이 일이 창피하지 않게 된 건 2018년 고등학교를 올라가면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9년간 내가 왜 그랬는지 고민했다.
나는 남자가 어색했고, 그래서 내외했고, 꽃보다 남자 다이어리를 받아오면 남자를 막 밝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아 두려웠고, 엄마에게 보여주는 순간 마치 WHY 시리즈 '사춘기와 성' 편을 보다 들킨 것과 같았고, 일요일 저녁 개그콘서트를 보다 '발레리노' 코너가 나와 잠시 채널을 돌리는 느낌이 들었고. 끝없이 나열할 수도 있는 순수한 아이의 지나친 부끄러움이 1년 동안 꺼내지 못한 신발주머니 속 구준표 다이어리를 만든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가족끼리 드라마 "보스를 지켜라"를 보다가 엄마가 주인공인 지성과 김재중 중 누가 더 잘생겼냐고 물어보길래 둘 다 별로라고 했다. 엄마는 자꾸 한 명만 골라보라고 했고 동생은 대답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엄마의 집요함과 나의 고집이 합쳐져 말싸움으로 번졌고 TV를 끄고 각자 방에 들어가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사실, 나는 지성이 더 좋았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마음이 있다. 어렸을 때 뜬금없이 눈물을 흘리면 엄마는 내게 물었다. "왜 울어??!" 그럼 나는 모르겠고 그냥 눈물이 난다며 잡아뗐다. 엄마는 다시 "잘 생각해 봐.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말했다. 따뜻한 말투로 나를 안아주시며 하는 말씀이었지만 그땐 이 말이 어찌 그리 듣기 싫었던지. 나는 내가 왜 우는지, 무엇 때문에 마음이 불편한지 백번 천 번 알고 있었다. 다만 죽기보다 이야기하기 싫었을 뿐.
아마 대부분의 어른들도 같은 감정을 겪으며 자랐겠지만 그 마음이 시간이 지나며 잊혔는지, 아니면 나만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는건지 가끔 아이들을 몰라준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보다 더 큰 감정체계가 있는 듯하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부모님의 감정 캐릭터보다 아이의 감정 캐릭터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여전히 그때의 감정들은 생각보다 자주 불쑥 찾아온다. 계속 그래왔지만 이제는 글로 적을 용기도 함께 찾아온다.
지금은 말할 수 있다.
1) 구준표 다이어리 대환영
2) 상속자들 - 이민호 vs. 김우빈
도깨비 - 공유 vs. 이동욱
사랑의 불시착 - 현빈 vs. 김정현
태양의 후예 - 송중기 vs. 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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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물어보면 다 답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