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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니뇨 Apr 04. 2022

첫번째 계약

난 어떤 과정을 거쳐 첫 계약서를 쓰게 되었나.

 나의 첫 영화는 예산이 100억 정도 되는 상업영화였는데, 위의 형들은 내게 첫 작품부터 큰 작품에 참여한다며 부러움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말들을 장난스레 했다. 그러나 저러나 난 처음으로 상업영화에 참여한다는 것에 두근거렸을 뿐 예산이 얼마인지는 관심도 없었다. 큰 희망에 부풀었고, 조금 위축됐으며, 살짝 도취된 상태였다. 

 작품 준비를 하는 동안, 형들은 작품의 예산 규모가 크다는 이유로 페이에 대해 긍정적인 전망을 내비치곤 했다. 안 좋은 소문이 있는 제작사이긴 하지만 급여를 갖고 장난치는 곳은 아니라고 했고, 기본 보장시간을 비롯한 계약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따금 말을 나눴다. 난 계약이란 걸 당최 해본 적이 없었기에 그들이 말하는 보장시간이니, 4대보험이니 하는 것들이 굉장히 낯설었다. 왜 난 여태까지 제대로 된 계약서 한 장 받을 수 없었는가. 

 처음에 친구의 소개로 드라마 현장에 투입됐을 때 난 그저 막연하게 생각했다. 막내지만 월급 100만원은(당시 대기업에서 신입사원으로 일하던 친구들은 본봉만 따져도 세후 최소 월 200만원 이상 받았다) 주겠지 싶었다. 예상은 무참히 깨졌고, 감독은 처음이고 하니 인턴으로 생각하라며 첫 달 월급 60만원을 줬다. 당연히 계약서는 없었다. 

 당시 드라마 계약 시스템은 방송사 혹은 제작사에서 각 팀에 할당된 예산을 책정하고(물론 후려쳤다) 그걸 감독들에게 보내면 내가 속한 팀의 감독이 그걸 자기 임의대로 조수들에게 나눠주는 속칭 ‘통계약’이었다. 조수들에겐 계약에 대한 권리, 자신의 임금을 협상할 권리가 없었고, 그저 감독이 주는대로 받는 게 관행이었다. 감독들 역시도 방송사가 팀에게 책정한 보수를 협상할 권리는 없었다.

 방송사에서 직접 제작하는 드라마가 아닌 외주 제작사를 낀 상태면 팀별 예산은 더 적었다. 방송사에서 예산을 책정해서 제작사에게 통보하고, 제작사는 그 돈을 받아 각 팀에 예산을 통보했다. 그리고 감독들은 조수들에게 페이를 통보했다. 방송사가 직접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그나마 중간 단계가 없었기에 조금 낫다고 볼 수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조수들이 받는 액수는 똑같았다. 

 나 같은 막내를 비롯한 조수들은 서면계약을 할 수 없었다. 물론 페이에 대한 협상 또한 전무했다. 감독들이 팀별 예산에 대한 협상권한을 갖고있다고 볼 수도 없었지만 서면계약을 할 수 있다는 것만 따져봤을 땐 조수들 보다 낫다고 볼 수 있었다. 

 종종 임금체불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계약서가 없어 노동청에 가서 진정을 넣을 수 없었다. 노동청에 가서 촬영 스태프라고 하면 프리랜서니 노동청에서 할 수 있는 건 없다며 법률구조공단으로 가라고 했다. 법률구조공단으로 가서 이런저런 사정을 설명하면 무슨 가압류인지 뭔지 하라고 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기다릴 수 없으면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을 진행하라고 했다. 

 조수들은 자신이 피고용인이란 걸 증명할 수 있는 서류 쪼가리 하나 받을 수 없었으며, 고용에 대한 증거가 없으니 노동자성을 입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방송 스태프들은 ‘프리랜서’라는 허울 좋은 말로 노동자성을 부정당한 채 ‘노동’했던 것이다. 

 난 그것을 첫 영화를 하면서 깨달았다. 근로표준계약을 접하며 내가 노동자이고, 그에 걸맞게 계약서를 쓰고, 그 종이 한 장으로 나의 권리를 보장받고 하는 것들을. 힘없는 막내 스탭이지만 계약을 놓고 사측과 입씨름할 여지 정도는 티끌만큼이라도 있다는 것을. 

 제작사 사무실에 가서 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는 것에 대한 계약서를 썼다. 형들이 다 알아서 얘기했지만 계약서를 한 번쯤 제대로 읽어보고 사인하라는 팀 선배들과 제작실장의 말을 듣고 계약 조항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리곤 도장을 찍었다. 식사 시간을 제외한 순수 촬영시간은 하루 최대 12시간이었고, 그 이상은 협의를 통해 진행한다고 쓰여있었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서면계약을 진행했고, 처음으로 영화판의 ‘표준계약’이란 걸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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