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박자 쉬고
크랭크인은 언제나 밀리게 되어있다. 이전에도 으레 그렇듯이 보통 한 달 정도는 밀린다고 생각했다. 업계의 생리가 그러했다. 여느 일이나 마찬가지듯이 들어갈 때까지 들어간 게 아니었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었다. 코로나 19 사태가 아니었어도 예정된 작품은 밀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 비상사태는 말 그대로 ‘비상’이었으며, 특수했고, 이전보다 기다림을 더 고단하게 만들었다. 2월에 크랭크인이 예정되었던 작품은 결국 4월 초순으로 밀렸다. 사태가 심상찮다고 예상했음에도 헛헛한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까.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비상금으론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 고정지출을 메꾸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기초생활을 영위할 수단을 찾아내야 했다. 내가 속한 부서의 카카오톡 단체방, 네이버 밴드 등을 뒤지는 것으로 시작했다. 인맥에 따른 구인구직은 별개로 생각하고(애시당초 주변 인맥들마저 구직난에 허덕이는 실정이었기에) 다른 다양한 경로를 뒤지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보니 기간이 어느 정도 되는 장편은 드문드문 있어도 내 직급을 구하는 게 아니었고, 구인과 관련된 연락을 받아도 내 직급이 아닌 주변 사람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어찌어찌 일자리를 구하긴 했으나, 하루짜리 뮤직비디오나 광고 뿐이었다.
뮤직비디오, 광고를 하는 팀에 속하지 않았기에, 하루 일이 끝나면 다음 일을 구해야 했다. 당시 영상과 관련된 모든 업종에서 프로덕션이 정체된 관계로 연이어 일하기 어려웠다. 또한 날 일감과 연결할 수 있는 인맥 또한 없었다. 이전 작품에서 만났던 사람들, 연락하지 않았던 사람들, 한 다리 건너야 했던 사람들에게까지 연락을 돌렸다. 연락했던 모두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내 육신에게까지 미안할 순 없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닿을 수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연락을 돌렸던 것 같다. 그래야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생기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급작스럽게 돌아가는 제한된 상황에서 난 내 직업을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왜 그런 전공을 택해서, 왜 이런 일을 하게 돼서, 왜 잘나가지 못해서. 불안정한 고용형태는 몸과 마음을 더욱 졸랐다. 이전까진 가끔 원망하고, 간혹 욕했지만 차원이 다른 고난이 닥쳐온 뒤, 머릿속에서 자가발전하는 욕을 어찌할 수 없었다. 어느새부턴가 익숙해졌다고 느꼈던 각자도생은 코로나 이후 또 다른 차원의 어려움을 선사했다. 그럼에도 종국엔 고정지출에 대비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었다. 천운이었다.
자영업자들은 조금씩 가게를 닫기 시작했다. 양성 반응이 뜬 사람들은 직장을 잃기도 했다. 어떤 회사는 집단 감염을 빌미로 하청 용역업체 소속인 노동자들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종료했으며, 판데믹을 빌미로 영업을 종료하는 사업체들도 나타났다. 반면에 스트리밍 서비스들은 구독자 수를 날로 늘려나갔으며, 배달 전문 요식업 업장들이 생겨났고, 배달을 하는 라이더들이 늘어났다. 3월 말에 정말로 바닥을 찍었던 주식시장은 급격하게 반등 곡선을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