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지 않는다-1.

문학. 골프. 하이킹. 와인

by 곽희성

내가 이든(Ethan)을 처음 만난 건, 지인의 초대로 나간 샌프란시스코 교외의 골프 모임에서였다.

1800년대에 설립된 프라이빗한 골프 클럽 멤버들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조용하면서도 세련된

매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가끔 같이 운동을 하고 나면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이든과는 운동이 끝나고 식사자리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아 처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한 두 명을 빼고 대부분 말이 많지 않았지만 그는 특히 말이 없는 사람이었고 사교적 모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골프를 위해서만 나온다는 인상이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어느 날 골프가 끝나고 멤버들의 맥주 뒤풀이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든이 그런 자리에 얼굴을 비춘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물론 나도 정식 멤버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자리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다.

수제 맥주가 맛있다고 소문난 그 집에 들어가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때의 내 감정이 호감인지 호기심인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지만, 아마추어로서 상당히

로우 핸디캡 골퍼라는 것, 그런 모임에서는 누구나 약간의 구설수가 있기 마련인데 그에 관한

일체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나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온 것은 확실했다.

“지난달 모임에서 우승하셨죠? 그렇게 잘할 수 있는 비결이 있나요? 골프 잘하고 싶은데 정말

어렵고 골프만 생각하면 내가 지진아가 된 것 같아서 너무 슬퍼요. 혹시 그런 감정이 어떤 건지

아시나요?

나의 계속되는 질문에 그는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당황한 것인지 대답할 말을 찾고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편안한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던

그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당연히 그런 시절이 있었죠. 희망과 좌절의 양극을 오가는 시간들이 지루하게 이어졌어요.

그 반복의 끝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완벽한 스윙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나의

스윙으로 나의 플레이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단단하고 유연한

몸을 만드는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그날의 이야기는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구체적인 연습 방법이나 스윙의 원리 그런 것들을 기대했는지 아니면 그냥 답답한 마음을 누구와

나누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고작 몇 마디 만을 나누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앞으로의 시간들에서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 생겼다는 예감이 든 것은 확실했다.

그는 오랜 동부 생활을 정리하고 얼마 전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고 했다.

와인을 한 잔 마시며 분위기가 좋아지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그가 살아온 작은 위성과 궤도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로 그 혼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고, 거기에 나의 생각을

겹쳐보는 것은 이제 제삼자가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냥 너였던 사람이 너와 나로 변하는 것이고 이중적인 감정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조금은 외로운 사람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만의 비밀을 간직하며 오랜동안 과거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랑이란, 알아보고 먼저 다가가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 심장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하루 종일 아팠다.

그를 볼 때도, 보지 않을 때도.


Ethan의 이야기

그해 1월 2일,

샌프란시스코, 마켓스트리트에서 언덕을 조금 올라가니 멀리서 본사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입사 첫날이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육중한 건물들 사이로 불어왔지만, 춥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유리와 철골로 세워진 본사 건물은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세상과 타협을 하며 직장이라는 곳에 속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글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일을 하면서도

글을 쓸 수 있다고 나 스스로를 설득하기 시작했고 반년 가까이 이력서를 들고 다니다 이제

공식적인 첫 일자리를 갖게 된 것이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경제적 독립이 가능한 세계로 들어왔다는 것이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출근 한 달쯤 되었을 때, 데이터 분석팀과의 미팅이 끝나고 돌아서려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 세웠다.

“하이, 스탠퍼드 출신 맞죠?”

그는 나보다 3년 먼저 입사했고 목소리는 크고, 웃는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으며, 언제나

유쾌했다.

“기억 안 나요? 문학 동아리 연합 모임에서 만났었는데, 그때 이든님 발표가 너무 인상적이어서

기억이 생생해요.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반가운데요. “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로맹 가리 작가의 ”노르망디의 연“에 대한 발표를 했는데 제가

너무 감동 먹었어요. 물론 따로 인사를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저녁 식사 하면서 와인도 마시고 그때 그 작가 이야기도 하고, 어때요?

그 제안에는 거절할 수 없는 순수함이 보였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물론 작가나 소설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누구라도 나는 흔들린다.

피어 39 근처 시푸드 바에서 클램 차우더와 새우구이를 먹으며 캘리포니아 화이트 와인을

곁들였다.

2차는 유니언 스퀘어의 재즈 바, 3차는 마켓 스트리트 모퉁이의 작은 델리 앞 테이블.

재즈 바 사장은 ‘클로즈드’ 사인을 걸고 우리 자리에 합류했다.

누군가는 사이먼 앤 가펑클을, 누군가는 비틀스를 불렀다.

박수와 웃음소리가 샌프란시스코의 밤거리를 가르며 퍼졌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로맹 가리도 그의 작품들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내려온 느낌이었다.

이런 장면을 위해 길고 긴 청춘을 버텨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잔은 우리 집에서 하자!”

리엄(Liam) 선배의 한마디에 우리는 늦은 밤 그의 집으로 향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이었다.

무작정 찾아간 집에서, 아내 에이미(Amy)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주방에는 바게트와 치즈, 올리브와 살라미가 놓였고, 맑고 투명한 피노누아 와인이 돌기 시작했다.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폴라송”의 정신과 마틴 레이의 도전으로 만들어진 마운트

에덴 피노누아였다.

그날의 모든 장면이, 앞으로 내가 살아가야 할 삶의 첫 페이지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 그림 속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 날 아침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숙취에 절어, 이른 버스를 타고 출근했지만 도중에 두 번이나 내려 숨을 고르고 토를 해야 했다.

몸은 납덩이처럼 무겁고, 머릿속은 희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그때, 리엄(Liam) 선배가 나타났다.

“우리 방으로 가죠. 오전엔 좀 쉬고, 오후에 다시 합시다.”

그는 내 팀 리더에게 윙크했고, 팀 리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곳이—

모든 것이 시작된 곳이었다.


리엄의 분석실은 시스코 컴퓨터가 빼곡히 놓인 공간이었다.

책상 두 개와 벽을 따라 늘어선 전공서적들,

그리고 커튼이 드리워진 칸막이 뒤로는 다양한 크기의 모니터가 가득했다.

“저 안에서 한숨 자요. 점심시간에 깨울게요.”

그가 조용히 말하며 문을 닫고 나갔다.

간이침대에 몸을 눕히자마자, 눈이 감기고 의식이 몽롱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톡톡.”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몸을 일으켰다.

조심스러운 노크는, 마치 “이제 일어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천천히 열린 문 사이로, 1월의 투명한 햇살이 길게 스며들었다.

빛 속에서 먼지 입자들이 느릿하게 흩날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그 틈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햇살을 등진, 가늘고 긴 실루엣.

어깨까지 곧게 떨어지는 빛나는 검은 머릿결..

빛 속에 반쯤 잠긴 얼굴이 또렷하지 않았지만, 눈가에 스미는 미소만은 선명했다.

“리엄이 깨우라고 했어요. 점심시간 거의 끝났거든요.”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미안하다고 인사했다.

그녀, Rachel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잠깐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이, 마치 벽에 걸린 그림처럼 내 안 어딘가에 고정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우리는 그 첫 만남을 다시 이야기하게 되었다.

레이철이 말했다.

“점심시간 시작 전이었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고 바로 나왔죠.

불을 켜두면 깰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식사하러 갈 때도 여전히 자고 있더라고요.”

“잠깐 망설였어요.

방 안에 처음 보는 남자가 자고 있는데,

혼자 들어가서 깨우는 일… 쉽지 않잖아요?”

그녀는 잠시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당신의 자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어요.”

그 웃음에는 한결같은 따뜻함과 당황스러움이 함께 담겨 있었다.

“생각해 봐요.

처음 보는 누군가가 무방비 상태로 자고 있고,

그 앞에 서 있는 장면을요.

자는 모습이… 꼭 아기 같았어요.

자기 방도 아니면서 양말을 벗고 자는데, “발이 참 작고 귀엽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남자도 속눈썹이 길 수 있구나…”

레이철은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서 깨우지 못했죠.

그냥, 조금 더 그렇게 두었어요.”

그리고는 다시 나를 바라봤다.

“그날 이후엔… 당신을 보면 항상 그 자는 모습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처음 단둘이 말을 나눈 건 퇴근길 버스 안이었다.

마켓 스트리트에서 미션 디스트릭트 방향으로 가는 버스였다.

중간 창가 자리에 앉아 가방을 열고 책을 꺼내려던 순간,

누군가 다가와 물었다.

“Excuse me, is this seat taken?”

얼굴을 들자, 리엄선배 방에서 나를 깨웠던 그녀였다.

나는 얼떨결에 몸을 창가 쪽으로 바짝 붙이며 말했다.

“No, go ahead. Please.”

“또 만났네요. 레이철 송이라고 해요. 반가워요.”

“아, 저는 이든 성입니다. 이 버스에서는 처음 뵙네요.”

“저는 미션 쪽에 약속이 있어서요. 이든씨는 매일 이 버스 타세요?”

“네, 보통 그렇죠.”

나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책을 보는 척 고개를 숙였다.

지난 한 주 정신없이 J.D Salinger 평전에 빠져있었는데 지금은 페이지가 잘 너머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화 속 남자 주인공처럼 유머를 던지거나 악수를 청하며 조크를 던질 용기는 없었다.

그녀가 가방을 뒤적이며 작은 우유팩을 꺼내는가 싶더니—

“Oh my god! I’m so sorry!”

흰 액체가 내 바지 위로 흘렀다.

그녀는 허겁지겁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Here, let me help— oh no…”

“괜찮습니다. 세탁할 예정이었어요. 진짜 괜찮습니다.”

나는 정말로 괜찮았다.

놀라지도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멍청하게 “괜찮습니다”라는 말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이 어쩐지 유쾌한 사고처럼 느껴졌다.


버스가 출발한 후,

레이철이 이어폰 한쪽을 내밀었다.

“Want to listen together?”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어폰을 받았다.

귓속으로 낯선 멜로디가 흘러들었다.

나중에 알게 된 건, 그것이 마이클 부블레의 Home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대화를 하지는 않았다.

어디 사는지, 사내에서 친한 사람은 누구인지 같은 사소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날, 그녀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만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사소함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균열을 불러왔다.

그 후로 우리는,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가볍게 눈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멀리서 그녀가 웃으면,

확실히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고, 그 빛이 모두 그녀에게서 발사하는 것 같았다.

마치 나 혼자 그 햇살을 받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이 없어도,

그 자리에 그녀가 있다는 것만으로

잔잔한 기쁨이 피어났다.


우리가 조금 더 가까워진 건,

연구소 전 직원이 참석한 가을 하이킹에서였다.

샌프란시스코의 가을 끝자락, 목적지는 마린 카운티의 마운트 타말파이스.

나는 산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요세미티와 레이크 타호, 그리고 세쿼이아 국립공원을

말 그대로 숨소리조차 흩뜨리지 않고 오르내릴 만큼 산과 친했다.

하지만 레이철은 달랐다.

평소처럼 밝고 명랑했지만,

산을 오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이 가빠 보였다.

내 뒤를 따르던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졌고,

그 밝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나는 결국 조심스럽게 물었다.

“Rachel, are you okay? 힘들죠? 제가 잡아드릴게요.”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배낭 안에서 오래 쓰던 트레킹 폴을 꺼내 펼치고

손잡이 쪽을 그녀에게 건넸다.

그녀가 묵묵히 그것을 잡았고 나는 반대편 끝을 쥐었다.

그렇게 우리는 스틱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보폭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조금씩 밝아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비로소 주변의 동료들과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만 너머로 펼쳐지는

안개 낀 황금빛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날, 오래된 트레킹 폴을 통해 그녀의 손이 처음으로 내 삶에 와닿았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안의 누구보다 가까워졌다는 걸 서로 만이 알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나의 트라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