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킹. 약속. 비밀
하이킹이 끝난 뒤,
동료들 몇몇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누군가는 웃으며 물었다.
“연구소에 레이철 좋아하는 사람 많은 거 알죠?”
나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리엄(Liam 선배) 덕분에 자주 마주치니까요. 그냥 반가운 사이예요.”
그 말은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먼저 아는 체를 할 만큼 가까워졌다.
휴게실에서 마주치면
레이철이 종이컵에 커피를 담아 내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태연한 척, 하지만 시선을 고정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곤 했다.
그녀는 들뜬 목소리로 지난 주말 넷플릭스에서 본 드라마 장면을 흉내 내거나,
새로 데뷔한 K-팝 그룹 이야기를 하곤 했다.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아주 조금씩—
서로의 일상으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겨울도 봄도 묵묵히 제 길을 가고,
다시 여름이 왔다.
이번엔 회사 규정이 아닌, 사적인 하이킹이었다.
시작은 후배 David의 부탁에서 비롯되었다.
“선배, 듣자 하니 레이철 씨와 친하다면서요?”
그는 레이철에게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다고 했다.
지난번 전 직원 하이킹 때,
내가 레이철과 앞뒤로 나란히 걷는 걸 봤다며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주말에 가까운 산에 같이 가면 어떨까요?
마운트 디아블로 어때요? 전에 선배가 얘기했잖아요.
정상에서 보는 샌프란시스코 전경이 끝내준다고.”
나는 속으로 당황했지만,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아침,
출근 전 휴게실에서 레이철을 만났다.
“다음 주말에 David이랑 마운트 디아블로 가려는데…
시간 어때요?”
그녀의 대답은 놀랍도록 빨랐다.
“좋아요! 사진으로만 봤지, 가보지는 못했거든요.”
“산악 가이드, 이든씨만 믿으면 되는 거죠?”
망설임 없이 환하게 웃는 그녀를 보고 있으면
그녀가 실제 세계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믿기 어려웠다.
그런데 바로 이어진 말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우리 팀의 Sarah도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아요.
사라가 David한테 관심 있다는 얘기를 들었거든요.”
순간, 모든 퍼즐이 뒤엉키는 듯했지만
오히려 안도의 숨이 나왔다.
David은 레이철에게 관심이 있고,
Sarah는 David을 좋아하고,
내가 레이철을 생각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도 드러낼 수 없는 두근거림이었다.
레이철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고 싶지 않았다.
모두의 마음이 조금씩 어긋나 있었지만,
나는 그 하이킹을 막지 않았다.
어쩌면, 그렇게 비틀린 채로 흘러가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늦은 오후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등산화 밑으로 전해지는 흙길의 감촉이 우리를 자연의 일부로 착각하게 했고,
계곡물소리에 섞인 웃음소리는 나무 그늘에 갇혀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치 무의식처럼—서로 원하는 것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고개를 흔들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고, 다시 웃었다.
토요일 근무를 마치고 출발했기에 어둠은 예상보다 빨리 내려왔다.
눈 감고도 오를 수 있었던 길이 낯설고 음침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깜빡이기 시작했다.
그리고—어느 순간 나는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오늘 중으로… 내려갈 수 있는 거 맞죠?”
Sarah가 먼저 불안을 드러냈다.
David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리더였다.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 산에는 오래된 로지가 몇 군데 있어요.
거기까지 가면 불빛도 있고, 도로와 연결돼 있을 겁니다.
제가 높은 바위에 올라가 방향을 보고 올게요.”
말이 끝나자마자 배낭을 내려놓고 방향을 잡았다.
그때, 레이철이 낮은 목소리를 내며 따라나섰다.
“저도 같이 갈래요.”
나는 억지로 말리지는 않았다.
아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단호함 때문이었다.
바위 언덕을 오르는 길은 가팔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면서도 나를 따라왔고 중간쯤에서 나는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처음으로, 직접.
그 손은 가늘고 길었으며,
손바닥 위로 불규칙하고 빠른 맥박이 뛰고 있었다.
그게 나의 것인지,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둘 다였는지 알 수 없었다.
바위 꼭대기에 오르자,
멀리 산 중턱에 작은 불빛이 보였다.
“저기 보이죠?
이 시간에 저렇게 환하게 불이 켜져 있다면 분명 로지일 거예요.”
그녀는 그 불빛을 바라보다가, 확인이라도 하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밤벌레의 울음소리,
그리고 우리의 서툴고 성급한 심장박동—
모든 소리가 밤의 정적 속에서 하나가 되었다.
“레이철, 어때요? 밤에 산 정상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 특별하죠?”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대답했다.
“깜빡이는 불빛은 호수 위에서 춤추는 요정 같고,
고층 빌딩들은 고요한 바다 위의 등대처럼 보여요.
여기서 보니… 아무 일도 없는 동화 속 나라 같지만…
하지만 다시 내려가면,
우리는 현실의 파도 속으로 돌아가야겠죠.”
그녀의 말은 혼잣말 같았다.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우리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내려왔다.
그날 밤, 우리는 불빛을 향해 서로의 손을 잡고 걸었다.
경사는 가팔랐고, 지난가을의 낙엽이 무릎까지 쌓여 있었다.
누군가는 미끄러져 넘어지고,
누군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우리는 진짜 한 팀이 되었다.
작은 로지에 도착했을 때,
관리자는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작은 벤치와 간단한 식사를 내주며
하룻밤을 머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날 밤, 우리는 처음으로 직장 동료 이상의 끈끈 함을 느꼈다.
같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진짜 ‘식구’가 된 것 같았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는 건 약속이자 신뢰였다.
그리고 그날, 나는 그 경계선을 처음 넘어섰다.
산을 다녀온 다음 날, David이 깊은 눈빛으로 말했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의미 있었던 것 같아요.
다시 가고 싶을 만큼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와 레이철 사이에 특별한 무언가가 생기지 않았음에도,
그는 진심으로 기쁜 표정이었다.
나는 미안함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 후, 우리는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그날의 이야기는 누구 앞에서도 꺼내지 않았다.
비밀을 공유한다는 것은, 손을 잡는 것과 또 다른 내면의 에너지를 공유하는 방식이었다.
다행히 David은 더 이상 레이철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나의 미안한 마음도 빠르게 옅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