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지 않는다-3

짝사랑.미래.약속

by 곽희성

늦가을의 따뜻한 햇살 때문은 아니었다.

출근한다는 사실 자체가 행복이었다.

일에 대한 지나친 욕심도 없었고, 회사 내의 지위에 대한 큰 기대도 없었다.

그저 하루에 한 번, 웃는 얼굴의 레이철을 마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하이킹 이후 다시 손을 잡은 적은 없었지만,

그 어두운 바위 위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자석을 품고 내려온 듯했다.

자석처럼 끌리는 기운이 느껴질 때면

어디선가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때는 행복을 거저 얻은 듯했다.


하이킹 이후,

우리 넷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서는 희망의 빛이 반짝이고,

누군가의 미소는 조금 더 밝아지고 있었다.

David, Sarah, Rachel 그리고 나.

우리의 시간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누군가 말했다.

“한 사람이 온다는 건, 그 사람의 인생 전체가 오는 것이다.”

나에게 그는 처음 온 그 모습, 그것이 전부였다.

노력이나 시간의 흐름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출근 전, 회사 옆 테니스 코트를 지날 때마다 그를 보게 된다.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잘 치는 것도 아니었고, 공을 제대로 넘기지도 못했다.

어설픈 동작이 우습기도, 안쓰럽기도 했지만…

언제나 그는 쉬지 않고 달렸다.

가끔 성공적인 스트로크가 나오면

행복한 비명을 지르며 코트를 가로지르는 그의 얼굴은,

내 근심까지 잊게 만들었다.

동료 영양사인 Grace에게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매일 아침 7시부터 입사 동기 Mike와 테니스를 치고,

8시 반쯤 카페테리아로 내려온 두 남자가

배가 고프다며 조심스럽게 자신의 눈치를 본다고 했다.

마이크에 대한 Grace의 호기심이 때문에 그들에게 커피를 내려주고, 샌드위치를

챙겨주고, 가끔은 오트밀까지 만들어 줬다는 얘기도 했다.

코트에서 뛰는 그의 모습은, 가끔 진지하게 앉아 있던 얼굴과는 전혀 달랐다.

빠르고 멋진 운동선수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어딘가 만화 영화의 조연처럼

그저 빠르기기만 해서, 조금은 귀엽기도 했다.

그리고,

테니스공이 바닥을 튀길 때마다

그가 내뱉는 낮고 리드미컬한 숨소리—

그게 참 좋았다.

내 짝사랑은 그렇게,

아무 예고 없이 시작되었다.


샌프란시스코의 저녁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Market Street의 네온사인이 하나둘 불을 밝히고, 케이블카의 금속 마찰음이 건물 사이를 울리며

흘러갔다. 작은 펍의 문을 열자, 축축한 안개 냄새 대신 따뜻한 맥주 향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밀려들었다.

Mount Tamalpais에 올랐던 그날 이후, 오랜만에 모인 얼굴들이었다. 맥주잔이 몇 번 부딪히자,

우리는 어느새 다시 숲 속에 서 있는 듯했다. 푸른 능선과 바람 소리가 겹쳐 떠올랐고, 그날의

흥분이 잔 안에서 다시 피어났다.

나는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내 안의 웃음은 바깥의 웃음만큼 자유롭지 않았다.

레이철을 바라보며 보여준 마음—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몸짓들—그것이

내게는 즐겁지만 동시에 무거운 짐이었다.

에밀리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우리는 2년을 만났지만, 미래를 약속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나 스스로 신의를 저버리는 일처럼 느껴졌다.

잊힌 사랑은 추억할 어떤 흔적도 남아있지 않는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인가?

에밀리와 두세 번 데이트를 하고 우리가 보통의 친구보다는 조금 더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학교 생활은 적응이 어려웠고 전공 수업을 따라가는 것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시간은 흘렀고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기 전 나의 불안한 마음은 극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창문에 기대어 멍하니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보던 어느 날, 정류장에 걸린 작은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눈 덮인 텔레스코프 피크 트레일 27마일, 당일 종주 참가자 모집”

순간, 심장이 요동쳤다. 종이에 적힌 연락처를 메모하는 손끝이 떨렸다.

겨울 트레킹 경험도, 장비도, 시간도 없었다. 출발까지 남은 건 고작 다섯 시간. 하지만 묘하게도

망설임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극한의 체험, 불안과 정면으로 맞서는 도전이었다.

에밀리는 그때 친구들과 데스밸리 국립공원에 포토 트레킹을 떠나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선택을 하려는 걸까. 아마도 그녀와의 관계 역시 더는 미뤄둘 수 없는 결단을

요구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밤을 달려 새벽 다섯 시, 버스는 공원 입구에 도착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는 매서워졌고, 무릎까지 쌓인 눈은 발을 붙잡았다.

급하게 챙긴 장갑은 금세 젖었고, 청바지는 얼어붙어 바위 위를 기어오를 때마다 뻣뻣하게

갈라졌다. 하지만 추위는 내게 닿지 못했다.

머릿속은 오직 불확실한 미래와의 싸움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왕복 여덟 시간. 산은 무자비했고, 불확실성을 숨기지 않았다.

숨이 거칠어질수록 오히려 나 자신이 뚜렷이 보였다. 정상을 밟고 내려올 때, 나는 확신했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다고.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너희들이 산을 아니? 인생을 아니?”

그 오만한 속삭임조차, 당시의 나에겐 당연했다. 막연하지만 강력한 자신감이 몸을 감쌌다.


산에서 내려온 직후, 나는 메시지를 보냈다.

“에밀리, 텔레스코프 피크 트레일 돌고 막 내려왔어요. 3시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는 버스를

타요. 지금 친구들과 함께 있는 거 알지만, Greyhound 정류장으로 와서 같이 돌아가면 어때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시간이 빠듯하지만… 갈게요.”

그 순간, 우리의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느꼈다.


Greyhound 버스는 끝없는 어둠 속을 달렸다. 창밖에 흘러가는 불빛들이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강물처럼 이어졌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의 삶에 대해 깊이 이야기했다.

그녀는 건강하고 현명했다.

나는 내 모든 열정을 보여주고 싶었다.

새벽 한 시, 버스가 샌프란시스코 터미널에 멈췄을 때, 우리는 손을 꼭 잡고 내렸다.

그 순간만큼은, 함께 걸어갈 길이 분명해 보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그날을 떠올리면, 나는 안다.

모든 시작은 언제나 뜨겁다는 것을...

하지만 열정이 식는 것, 열정이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건 쉽지 않다.

그것이 본능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 알 수 없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 마치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숨은 문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닫힌다. 그때는 몰랐다. 그 상실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 몰랐다.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건 당연할 수도 있다는 것, 중요한 건 그 순간에 솔직해지는

용기라는 것을.

자신에게도,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David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분, 잔에 술을 가득 채우시고… 지금부터 집중하세요.”

모두 고개를 들었다.

“오늘 저녁은 제가 쏘겠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마음만은 늘 한결같았다는 걸 믿어주세요. “

하하.” “브라보! 대박 브라보!” Rachel이 소리쳤다.

그녀답지 않은 과한 반응이었다.

나도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혹시 승진? 아니면 퇴사? 설마…

“저는 다음 달 말일부로 회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였어요.

이번에 Lowell High School에 자리가 나와서, 다음 학기부터 학교에 나갑니다.”

나와 Rachel은 놀라서 소리를 질렀지만, Sophia는 조용히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Rachel, Ethan. 두 분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직감했다.

‘아… 그렇게 되는구나.’

“저와 Sophia는 내년 봄에 결혼합니다.”

박수와 건배, “브라보!”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처음부터 나와 레이철이 주연이고 그들은 영원한 조연이라 생각했는데

내가 어리석은 명분 찾기와 철 지난 도덕적 갈등에 빠져있는 사이

주연과 조연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스물일곱 나이에.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정말 명분이 필요했을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를 했다면 모든 것들이 봄바람에 날리는 체리 블로섬처럼 자유롭게 날 수

있었을까?

나는 ‘의리’와 ‘사랑’이라는 외줄 위에서 흔들리는 꼭두각시가 되었다.

분위기는 점점 뜨거워졌다. 그들은 산속에서 함께 고생했던 날을 이야기했다.

나와 Rachel이 길을 찾으러 사라진 동안, David와 Sophia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이 순진한 남자가요, 그 등산 목적이 사실은 Rachel이랑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고

고백하더라니까요. 얼마나 황당했는지.”

“처음엔 실망했죠. 근데 티를 낼 수 없으니까 그냥 듣기만 했어요. 그런데 산속을 걷다가 어느

순간부터 제가 눈에 들어왔다고… 가까이서 보니까 자기 눈엔 제가 더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다고…

자기 학교, 고향 이야기까지 하는데…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아, 우리가 서로를 알아보았구나. 드디어!’라고 생각했죠.”

Sophia가 웃으며 말을 잇는다.

“그래서 제가 뭐라 했는지 알아요? ‘내가 같이 안 왔으면 혼자 드라마 찍었겠네요.’”

“사실… Rachel, Ethan 두 분 서로 좋아하잖아요. 아는 사람은 다 알아요.

두 사람 서로 좋아하는 거 100%라고 그냥 말해버렸죠.”

그날 그렇게 웃고 떠들다 손을 잡았고, 결국 첫 키스를 했다고 했다.

Sophia는 술이 올라 기분이 좋은지 흥에 겨워 술술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를 듣는 Rachel의 표정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중간중간 나를 힐끗 바라봤지만, 그 표정 속 의미를 읽을 수 없었다.

잠깐 단둘이 있을 때, Rachel이 물었다.

”오늘 이 모임 끝나고 시간 어때요?

할 말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길 건너 와인 바에서 볼까요. 내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기다릴게요.” 나는 짧게 잘랐다.

그녀를 대하는 내 표정은 어땠을까.

나는 표정을 감출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얼굴에서 눈빛에서…

그때는 몰랐다.

이윽고 Sophia의 이야기가 끝나자, Rachel이 잔을 들고 취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말이야… 사내 결혼은 절대 안 해.

무슨 캠퍼스 커플도 아니고..

결혼하고도 같은 직장에서 계속 만나야 하고

너무 빨리 익숙해져서 두근거림 그런 거 금방 사라지지 않겠어 “

라며 웃었다.

술김이어서 그랬을까?

그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됐다.

어린 나에게는,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몰랐던 그때의 나는

레이철의 그 말이, 마치 나에게 날아와 꿈도 꾸지 말라고 소리치며 박혀버린 화살촉 같았다.

외줄 위에 올라선 나의 갈등도, Emily와의 고민도,

결론을 낼 수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와인바로 들어오는 레이철의 모습에서 그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호기심을 넘어선 것은 분명하다고

그녀가 나에게 “이제 그만 나에게 오라고” 충분한 신호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지금 그녀는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려한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나는 뒷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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