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이 되어야 최선은 현실로 돌아온다.
업무를 시작하기 직전의 차분하면서도 미세하게 어수선한 분위기, 예전처럼 웃으며 큰 소리로 인사를 하지 않고, 할 말이 있다면 카톡 메시지로 전달하는 달라진 업무 환경이 싫지도 좋지도 않다.
긴 통로를 지나는 동안 몇몇 직원들과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목례를 하고 서둘러 혼자만의 공간인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작은 회사의 자금 담당이라는 직책,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직원 채용도 광고 마케팅도 그리고 신규 사업 진출도 자금 부분이 먼저 검토되어야 언제나 정확해야 한다.
팀원도 없이 혼자 결정과 선택을 해야 하는 최선이었다.
복잡한 출근 시간에 2호선 전철을 타고 삼성역에서 내리는 것, 밖으로 나와 몇 걸음만 걸어가면 스타벅스에 들어가 뜨거운 아메리카노 커피를 들고 나올 수 있다는 것, 퇴근 후 친구들을 만나거나 가끔 들어오는 소개팅 자리에 나갈 때도 삼성역과 테헤란로 주변에 넘쳐나도록 많은 식당들이 있다는 것, 백화점과 코엑스 몰은 물론이고 특급호텔이 즐비하게 서있는 거리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다.
최선은 그날도 평소와 똑같이 사무실이 있는 고층 건물 로비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올라갔다.
카드키를 터치하고 사무실로 들어가서 긴 복도를 지나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대표이사 외에 유일하게 자신만의 공간을 사용하는 특권을 누리는 최선이다.
그것은 대표이사가 자신의 방에 들어와서 어려운 결정을 하기 전 그의 의견을 묻고 판단에 참고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출근한 직원들이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수군거리는 분위기와 긴장된 표정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최선 씨, 연말에 사무실 하남으로 이사한다는 말이 있던데, 혹시 들은 거 있어요?”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수연이 말을 걸어온다.
그녀는 진급을 거부하는 입사 동기 수연이다.
평사원으로 큰 책임감 없이 무탈하게 오래 다니는 것이 그녀의 바람이다.
최선도 그러고 싶지만 현실성 없는 바람이라는 사실에 우울했다.
최선은 문을 열다 말고 수연을 바라보며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사무실 이사한다고, 어디서 들었어요?”
“대표이사가 직접 총무팀장에게 지시했다고 들었어요. 미사지구 지식산업단지에 공실이 많아서 임대료가 현재와 비교하면 최소 60% 이상 저렴하다고, 어쩌면 지산의 사무실을 매입해서 들어갈 가능성도 있다고…“
강남 테헤란로의 부동산 열풍과 대로변 임대료 상승은 지난 수년간 가장 큰 이슈 가운데 하나였다.
금융 위기나 경제 침체와는 따로 노는 지역이었다.
대표이사의 가장 큰 바람도 테헤란로 이면 도로의 작은 빌딩을 매입해서 사옥으로 만드는 꿈이 있었지만, 부동산 상승폭이 너무 커서 회사의 성장 속도가 그것을 따라갈 수 없었고 이제 그 오랜 꿈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30명 남짓한 직원 전체가 벌어들이는 수익의 30%를 임대료로 지급해야 하는 현실은 씁쓸했다.
회사가 실리를 선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사무실을 옮기는 것이 최선을 포함한 대다수의 직원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들에게는 회사가 테헤란로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서울 시내 대부분의 지역에서 전철로 접근이 가능하고,
길을 건너면 백화점과 코엑스가 있고 사무실 창 밖으로 5성급 호텔과 고층 건물이 즐비하게 서 있는 풍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었다.
친구들에게 저녁을 먹으러 삼성역으로 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특별한 날에 길만 건너면 백화점에 갈 수 있는 것 그리고 시간이 남고 딱히 할 일이 없으면 코엑스 지하에 내려가 별마당에서 책을 꺼내 볼 수 있고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중요했다.
그곳에 들어서면 지난 십 수년간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너무 넓어서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지하 상업시설에는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과 비즈니스 맨들이 넘쳐났고, 필요한 어떤 물건도 살 수 있었고 먹고 싶은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었다.
그것이 최선을 포함한 대부분 직원들의 정체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