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친구.명절.남자
어떤 일들이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기억으로 남게 되는 원리는 무엇일까?
고화질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 색이 바래지도 않고 희미하게 내 안에 계속 존재하는 그런 기억들 말이다.
나의 가장 오랜 기억은 3살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가지붕을 올린 시골집에서 할머니 고모와 함께 살던 시절이었다.
밥상에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하얀 쌀밥이 있었고, 그 위에 간장 한 스푼과 참기름을 몇 방울 떨어트리고 깨소금을 한 줌 뿌리면 맛과 향의 마법이 시작되었다.
그 맛과 향의 비밀이 참기름에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고, 아무도 없는 어느 날 부엌에 들어간 나는 솥에서 밥을 한 공기 뜨고 그 위에 참기름을 가득 따르고 맛을 보았는데 어린 나에게도 할머니가 비벼주었던 그 고소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일로 할머니나 고모에게 혼이 나지는 않았지만 오랜 웃음거리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때의 희미한 기억이 나에게 “과유불급”이라는 의미를 깨닫게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그 사소함이 나에게 음식을 선택하는 기준을 만들어준 것은 인정한다.
5살 무렵으로 올라가서 나는 인생 최초의 두려움을 만나게 된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옛날 드라마에 나오는 것 같은 좁은 골목의 끝에 우리 집이 있었다.
골목의 양 옆으로 식료품을 파는 구멍가게도 있었고 철물점도 있었고 행상을 하는 할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정면에 하늘을 가릴 만큼 높은 바위로 만들어진 벼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벼랑 바로 아래 단칸의 방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고 그 가운데 하나가 우리 네 식구가 사는 집이었다.
그곳은 아마도 가파른 바위산을 수직으로 잘라내어 주거지를 만들었고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늘 가상의 두려움에, 그 벼랑 위에 있는 어떤 정체 모를 바위가 우리 집으로 굴러 떨어져서 지붕을 부수고 우리 가족을 다치게 하는 그런 공포에 떨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 동네를 떠난 지 30년 이상이 지나서도 그곳을 지날 때면 어김없이 그때의 두려움이 몰려오곤 했다.
정말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그 두 장소를 정확하게 기억한다.
참기름 사건이 있었던 그곳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가 있는 곳으로 일 년에 몇 번은 찾아간다.
지금은 얼마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를 만든 곳이어서 더 자주 찾아간다.
그 초가지붕 집이 있던 자리에는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은 다른 집이 자리 잡고 있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문득 그 기억이 되살아 난다.
사실은 내가 실제 있었던 것을 기억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할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나에게, 혹은 사람들을 만나면 무용담처럼 그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내 기억에 남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두 번째 장소는 서울의 남산 아래 버티고개역에서 남산 쪽으로 오르는 골목 안쪽의 동네다.
강남에서 한남대교를 건너고 한남오거리를 지나 남산으로 올라가면 정체 모를 향수와 추억이 떠올라서 나 스스로 어리둥절한다.
아마도 그 시절 부모님의 손을 잡고 골목을 오르내리고 버스를 타고 어딘가로 가곤 했던 추억 때문일 것이다.
친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소하게 연락하면 반갑게 맞아주는 친구가 그 근처에서 정형외과 병원을 운영하기 때문에 어딘가 문제가 생기면 찾아가는 동네다.
어쩌면 점점 더 그곳을 찾을 일이 많아질지도 모를 일이다.
10대 중반, 중학생이 되었고 승빈과 나는 집이 가깝다는 이유로 친하게 지냈다.
그는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을 만큼 큰 아이였고 달리기를 잘해서 육상반에 들어갔고 누구와 싸우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아무도 그 아이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우리는 사소한 의견 충돌이 있었고 나는 그에게 주먹으로 결정하자는 도전장을 던졌다.
다만, 당장은 아니고 나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까지 누구와도 싸워본 적이 없었고 신체조건도 내가 절대적으로 불리하니 나에게는 연습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승빈은 웃으며 그러자고 했고 주변의 친구들도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바로 다음 날, 엄마를 졸라 가벼운 운동화를 구입하고 학교 근처의 권투 도장에 등록했다.
싸움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는데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도록 줄넘기만 했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 겨우 주먹을 앞으로 뻗는 정도만 익히고 승빈과의 결투에 나섰다.
더 이상 뒤로 미루는 것은 패배나 다름없었다.
학교 뒤의 공터에서 그와 마주했고 아이들이 우리를 빙 둘러 서있었고 나는 두려움이 몰려왔고 아마도 눈을 감고 주먹을 휘둘렀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에게 주먹을 날릴 수 없었다. 내가 타격을 가하기에 그는 빨라도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도 나에게 타격을 가하지 않았다.
그냥 웃으면서 피하기만 했다.
어쩌다 엉겨 붙게 되었고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잡으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사이의 빈 공간에 헛 주먹을 날리는 것뿐이었다.
애초에 그는 나와 싸울 생각도 나를 때릴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혼자 지치기만을 기다렸고 우리의, 아니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싸움은 그렇게 코미디처럼 끝나버렸다.
그 일로 인해 어쩌면 우리는 더 친해졌을 것이다.
그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이 통학을 하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집에서 학교 까지는 2킬로의 거리였고 더우나 추우나 같은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고 싶으면 자전거 전문점에서 1시간씩 빌려서 탈 수 있었는데, 우리는 자전거를 가명으로 빌리고 반납하지 말자는 의견에 합의했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전거 두 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한 우리는 기쁨도 잠시 당일 저녁부터 두려움이 몰려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방구에서 락카 페인트를 구입하여 다른 칼라로 도장을 했지만 걸릴지 모른다는 원론적인 두려움과 당장 저녁이 되니 자전거를 보관할 곳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밤늦도록 골목을 헤매며 숨길 곳을 찾던 우리는 결국, 우리가 그 자전거를 훔친 자전거 가게 바로 앞에 그 자전거 두대를 세워두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어린 날의 자전거 꿈은 그렇게 하루 만에 끝나고 말았지만, 나는 그 일로 인해 남의 물건을 탐하는 것이 득 보다 실이 많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고 다시는 그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금까지 잘 지키며 살고 있다.
다시 추석이 되었다.
이번 추석은 비와 함께 보내야 하나 보다.
어머님을 모시고 나의 가장 오랜 추억의 장소,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가는 날이다.
달리는 차 안에서 어머님이 뜬금없이 버티고개의 그 집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때도 비가 엄청 내렸어. 저녁에 집에 들어왔더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니?”
“집 뒤의 벼랑에서 바위가 굴러 떨어져서 지붕을 부수고 우리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거든. 난리가 났지.”
“너무 무서워서 집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고 할머니 집으로 피신했었지. 그 집에서 네 여동생을 낳았는데 말이다.”
그 집은 단칸방이었고 부모님과 두 살 터울인 바로 아래 동생과 나, 네 명이 살았는데 그 열 악한 환경에서 또 아이를 만든 부모님의 능력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1968년의 일이다.
아버지가 서른한 살 어머니가 28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그분들도 너무 젊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도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그 일이 있고 우리는 그 집에서 나와 평지에 있는 동네로 이사를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나이가 들어가며 내 마음에 자리 잡은 가장 큰 삶의 방향은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려는 생각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그럼에도 가끔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후회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오늘,
남자들에게도 그다지 즐겁지 않을 듯한 명절날 그 모든 바탕에 나도 모르는 기억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여자들에게는 노동의 양이 급격하게 증가하는 날이고 남자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날이다.
구 세대와 현재를 살아가는 배우자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그런 날이다.
세 살 무렵 시작된 나의 모든 기억들, 나를 떠나지 않는 그 무수한 기억들이 트라우마라는 이름으로 나를 흔들고 있다.
어마무시하게 큰일이 아니어도, 반복되는 작은 상처와 아픔들이 지금의 나를, 내 맘에도 들지 않는 나를 만들어 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시 그 추억의 시간으로 돌아가 나를 바라보고 상처와 아픔을 토닥이며 위로해 주면 나는 내가 바라는 더 좋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