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조심, 행동조심, 사람조심...
그 사건이 벌어진 게 오전 10시였는데, 12시도 되기 전에 아일린에게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오후 2시 미팅 요청. 참석자는 나일즈, 케이티, 그리고 나. 미팅 제목은 애매하게 Employee Conduct Policy (직원 행동 수칙).
아일린이 직접 본 건지, 누군가가 보고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빠른 대처였다. 이제 겨우 일한 지 일 년도 안 됐는데, 설마 이런 일로 해고를 당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손톱을 깨물었다.
그때, 나일즈가 내 큐비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Lunch?" (점심 먹으러 갈래?)
나는 황당해서 쳐다봤다.
"Did you not see the meeting request from Eileen?" (아일린한테서 온 미팅 요청 아직 못 봤어?)
"I did." (봤어.) 나일즈는 태연하게 끄덕였다.
"Then how the hell do you think I can eat right now??" (그럼 이 상황에서 내가 음식이 목에 넘어가겠냐??)
…라고 외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또 괘씸죄까지 추가될까 봐. 대신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I have some things to take care of during lunch." (점심시간에 좀 할 일이 있어서.)
"Alright, suit yourself." (그래? 알았어.) 나일즈는 순순히 돌아서더니,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내 큐비클로 돌아왔다.
"If you're worried about the meeting, don't be. It shouldn't be a big deal." (혹시 그 미팅 때문에 걱정하는 거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큰일 아닐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말 큰일이었다면, 나일즈가 이렇게 태평하게 점심 먹으러 가자는 소리를 하진 않았겠지.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배가 고픈 걸 잊을 만큼은 아니어서 나는 잠깐 나일즈를 따라 점심 먹으러 나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나는 리로이의 책상으로 가서 그의 파일 캐비닛을 열고, 그가 비치해 놓은 대용량 비프 저키, 감자칩, 땅콩을 한 움큼씩 덜어 종이 접시에 담았다. 지나가던 동료 하나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나와 리로이는 늘 간식을 서로 나눠 먹는 사이다. 내 간식이 주로 과일 종류라 그가 덜 먹기는 하지만... 설마 이것도 회사 규정 위반인가? 갑자기 불안해졌다. 하지만 이미 담은 걸 다시 돌려놓을 수도 없고,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며 내 자리로 돌아와 맹렬하게 비프 저키를 씹기 시작했다.
No big deal my ass... (큰일 아니라더니…).
나는 속으로 나일즈에게 욕을 퍼부었다. 아일린은 심각한 얼굴로 여러 장의 서류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나일즈와 케이티가 점심에서 돌아와 내 맞은편에 앉았다.
"I'm sorry we have to have this meeting. But your behavior was unprofessional and violated multiple company policies." (이런 일로 미팅을 하게 되어 유감이다. 하지만 너의 행동은 프로페셔널하지 못했고, 회사 규정 여러 가지를 위반했어.)
아일린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나는 교장실에서 야단맞는 문제아처럼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초중고등학교를 통틀어 선생님한테 야단을 맞은 일도 한번 없던 내가 나이 서른이 넘어 이런 일을 당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아일린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하게 선언했다.
"The company has decided to issue a formal censure to prevent recurrence." (회사는 재발 방지를 위해 공식적으로 Censure를 하기로 결정했어.)
Censure?
분명히 한번 외웠던 단어인 거 같은데 갑자기 뜻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분위기상 물어볼 상황이 아닌 것 같아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아일린이 늘어놓는 여러 가지 회사 전문 용어들을 흘려들었다. 그런데 그녀가 한 문장을 읽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췄다.
"Sexual Harassment." (성적 희롱.)
… 뭐라고?
내 머리가 확 들렸다.
성적 희롱? 내가?
100파운드 간신히 나가는 동양 여자인 내가 300파운드가 넘는 흑인 남자인 나일즈를?
순간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동시에 나일즈가 녹슨 새시 창문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웃음을 참느라 목에 울대가 불거졌다. 케이티는 테이블 밑으로 그를 걷어찼고, 나일즈는 "Ouch!" (아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정강이를 어루만졌다. 아일린은 서류를 읽다가 입술을 깨물었고, 테이블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간신히 웃음을 참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케이티는 아예 어깨를 들썩이며 손으로 입을 막고 웃었고, 유일하게 심각했던 건 고개를 떨군 채 바닥만 바라보고 있던 나뿐이었던 듯싶었다. 아일린은 다행히 내가 꼭 그랬다는게 아니라 내가 한 행동이 받을 수 있는 혐의들 중 하나라고 다시 설명을 해주고 다른 온갖 조항으로 넘어갔다.
아일린이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간신히 나머지를 다 읽어주고 서류를 내쪽으로 밀었다.
"Sign here if you understood everything." (다 이해했으면 여기 서명해.)
나는 펜을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 나일즈가 내 손을 막았다.
"Eileen." (아일린.) 그는 평소보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I trust you, so I'll let Junsu sign this. But just to be clear—as you said, this is purely procedural, right? No pay cut, no impact on future promotions?" (난 너를 믿으니까 준수가 사인하게 놔두긴 할 건데, 네 말대로 이건 그냥 형식적인 거지? 감봉도 없고, 앞으로 승진에도 지장 없는 거 맞아?)
아일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일즈는 내 손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서명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조용히 서명하고, 케이티와 함께 아일린의 오피스를 나왔다. 나일즈는 아일린과 할 얘기가 있다며 남았다.
아무리 형식적인 것이라고는 하나, 그리고 모두 웃고 있었지만, 기분이 더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표정이 어두워 보였는지 케이티가 조용히 설명을 덧붙였다.
"Look, I get that this feels like overkill, but the company had to cover their bases. And… Niles's divorce has been finalized recently, so I think they were extra careful." (좀 오버같이 보이겠지만, 회사 입장에서 조심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리고… 나일즈가 이혼한 지 얼마 안 돼서 더 조심했던 것 같아.)
이혼?
나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나일즈가 결혼반지를 끼고 있지 않았고, 책상 위에 세 명의 딸 사진이 있었던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 싱글이었는지는 몰랐다.
"How recent?" (얼마나 됐는데?)
"A couple of months? He married his high school sweetheart at 20, went to college with her. If they hadn't divorced, this year would've been their 30th anniversary."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 고등학교 첫사랑이랑 스무 살 때 결혼해서 같이 대학도 다녔거든. 이혼 안 했으면 올해가 결혼 30주년이었을 거야.)
나는 말없이 내 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30년…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한 사람과도 결국 헤어질 수 있는 거구나.
나일즈가 새삼 달리 보였다. 늘 시끄럽고 장난기 많던 상사가 아니라, 긴 세월을 함께한 사람과의 관계가 끝나버린 한 남자로. 왠지 모르게, 그가 조금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