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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2. 키세스와 반달곰

얼떨결에 정규직이 되었다.

by 다소니

"Why haven't you applied yet?" (왜 아직 지원 안 했어?)

에드워드는 커피 테이블 옆의 의자를 내어주며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Well, it's common knowledge that I'm loyal to the direct report you fired, and it's obvious I won't get your support, so why would I apply for that position? You're only coming to me now because you're desperate and can't find a suitable candidate. Otherwise, why would you approach me three weeks after posting the job? Do you think I'm an idiot?" (그야 내가 네가 자른 직속 부하의 심복이라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고, 네 서포트도 받지 못할 게 뻔한데 뭣 때문에 그 자리에 지원을 하겠어? 지금도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네가 급해서 나한테 온 거지. 아니면 왜 그 자리 포스팅한 지 3주나 지나서야 나한테 왔겠냐고. 내가 바본 줄 아냐?)


…라고는 차마 못 하고,

"Yes, I'll do it soon."(네, 곧 하겠습니다.)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에드워드는 언제나 따뜻하고 장난기 어린 소년 같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50이 다 되어가는데도 풍성한 헤이즐넛 색 머리카락, 부드러운 미소, 고르고 흰 이가 가지런했고, 키는 크지 않아도 탐 크루즈 못지않게 잘생긴, 참으로 운 좋은 개자식이다. 처음 내가 일을 시작하고 불과 2주 만에 그가 부임했을 때, 나는 이 좋은 인상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서 거의 6개월 동안이나 그에게 잘 보이려 얼마나 애썼던가.


그에 비하면, 키가 6피트 5인치에 300파운드는 가뿐히 넘는 거구의 전직 대학 풋볼 선수였던 나일즈는 첫인상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나는 어카운팅 디렉터 아담 밑에서 스페셜 프로젝트를 6주 계약으로 맡고 있었다. 주당 20 시간으로 계약을 했건만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일거리를 찾아내서 하는 스타일이라 주당 40시간을 넘어 오버타임까지 하고 있었다. 이렇게 할 거면 차라리 풀타임으로 일자리를 찾는 게 낫지 막내가 유치원에 갈 때까지 파트타임으로 일하겠다는 본래의 취지는 뭐가 되냐는 남편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런 프로젝트는 단기간 끝나는 것이고 풀타임은 기약이 없으니 그게 다른 거라고 나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날도 밤늦게까지 작은 컨퍼런스 룸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는데, 문 입구를 꽉 메우고 소리도 없이 서 있는 반달곰을 보고 기겁했다.


아, 이런 환영을 보다니… 저녁도 안 먹고 일하다 드디어 과로사로 죽는구나. 나는 빅 4 시절 아침 일찍 출근한 내 동료가 밤새 일하고 책상 위에 심장마비로 죽어있던 30세의 매니저를 발견하고 아직도 떼라피를 받고 있다는 걸 기억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토끼 같은 내 아이들이 졸지에 홀아비가 된 남편에게 매달려 우는 장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펼쳐졌다.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컨퍼런스 룸 테이블에 놓여 있던 캔디 볼에서 캔디를 하나 집어 들어, 천천히 포장을 깠다. 내가 좋아하는 아몬드 키세스였다. 그 순간, 반달곰이 문지방을 넘으며 씨익 웃었다.

나는 키세스를 힘껏 깨물었다. 딱 소리가 나자 정신이 돌아왔다.


그제야 열린 문 뒤로 불빛이 들어오면서, 검은 얼굴에 눈동자가 안보일정도로 두꺼운 안경알에 역시 두꺼운 검은 플라스틱 테 안경을 쓴 거구의 흑인이 비싸 보이는 진회색 정장을 입고 서있는 것이 보였다.

"Hi, I'm Niles Brown, VP of Finance. I didn't mean to bother you but I've talked to Adam and he said your contract is ending soon. I have an open position in my team. Would you be interested in FP&A?"(안녕하세요, 저는 나일즈고, 재무 부사장입니다. 방해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담과 얘기해 봤더니 당신 계약이 곧 끝난다고 하더군요. 제 팀에 빈자리가 있는데, FP&A에 관심 있으세요?)


그는 큼직큼직한 새하얀 이를 한가득 드러내고 미소를 지으며 수줍게 두 손을 모아 잡고 공손히 물었다.

앞니 사이의 틈 때문이었을까. 그의 미소에는 묘한 친근함이 있었다.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나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던졌다.

"What's FP&A?"(FP&A가 뭔가요?)

"Oh, let me explain."(아, 설명해 드릴게요.)

나일즈는 내 곁으로 가까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벽시계를 올려다보았고 시간은 이미 9시를 지나고 있었다.


"Just a moment."(잠깐만요.)

나는 내 옆자리 의자를 발로 빼주며 내 플립폰을 꺼내 들었다. 나일즈는 내 폰을 보며 흠칫했다. 요즘도 이런 걸 쓰는 사람이 있나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집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벨이 다섯 번이나 울린 다음 마이크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선 뒤로 애들이 소리를 지르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애들 목욕시키는 중이라고 했다.

"I'll be late, put the kids to bed first. I'll be home in about an hour."(나 늦어, 애들 먼저 재워. 한 시간 정도 있다 갈게.)

나는 미안함을 담아 한껏 다정하게 말했다. 나일즈는 묵묵히 안경을 벗고 깨끗하게 다려진 손수건을 꺼내 닦기 시작했다.


"So you were saying?"(그래서 뭐라고 하셨죠?)

나는 전화를 끊고 나일즈 쪽으로 돌아 앉았다.

"FP&A stands for Financial Planning and Analysis. What we do actually..." (FP&A는 재무 계획 및 분석의 약자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하는 일은...)

나일즈는 내 옆에 자리 잡고 앉아 키세스를 까먹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나일즈는 이미 어카운팅 디렉터인 아담하고 많은 얘기를 나누었고 내가 빅 4 백그라운드에 걸맞게 일을 아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했다. 연봉은 내가 예상하던 것보다 30%가 더 많았다.


"I don't know anything about that field..." (제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는데...)

내가 자신 없어 하자 나일즈는 손을 저었다.

"You know more than you think. We'll teach you. No worries."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어요. 우리가 가르쳐 드릴게요. 걱정 마세요.)

그는 무슨 근거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만만했고 나는 공인회계사 말고 다른 커리어 트랙은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에, 일단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출근하자마자 내 리크루터인 캐리에게 전화를 했고 내가 이 오퍼를 받아들여야 하는지 물었다.

"Heck, yeah!! Of course!! That's crazy good." (당연하지! 말도 안 되게 좋은 제안이야!)

그녀는 나보다 더 흥분해서 삼십 분간 이 자리가 왜 좋은 기회인지를 설명했다.


결국 나는 나일즈의 오피스로 찾아가 그의 오퍼를 받아들이겠노라 했다. 그는 기뻐하며 내 직속 상사가 될 케이티를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내 포지션인 Senior Financial Analyst에서 막 매니저로 승진한 상태였다. 풍성하고 반짝이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여배우 케이트 베킨세일을 닮은 케이티는 초록색 눈을 반짝이며 손을 내밀었다.

"Welcome to the team." (팀에 온 걸 환영해요.)

그리 큰 키는 아니지만, 케이트 모스처럼 마른 몸매에 꽤 풍만한 가슴을 지니고 있었고, 본인도 그것이 큰 무기라고 생각하는 듯 가슴골이 훤히 보이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Thank you." (고마워요.)

나는 눈길이 그녀의 가슴으로 가는 걸 의식적으로 막고,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쳐다보며 악수를 했다. 하지만 그녀의 입은 환히 웃고 있었음에도 눈은 왠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순간, 이 오퍼를 받아들이는 게 과연 맞는 선택인지 의문이 들었다. 내가 그녀에게 보고를 하는 지위라면 왜 그녀와 인터뷰를 하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어쨌건 그날 오후 그녀는 자기가 하던 일을 인수인계해 줬고 다행히 그 일들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첫날이니 그랬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정도의 일로 내가 왜 이렇게 많은 연봉을 받는 건지 캐리에게 다시 전화를 해 물었고 캐리는 한마디로 그게 업계 기준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자 새삼 빅 4에서 그 개고생을 하며 별로 많지도 않은 연봉을 받으면서 일한 게 억울해졌다. 캐리는 내 푸념을 듣고 한마디 덧붙였다.


"Listen, no offence, but new college graduates are useless. Big 4 actually lose money on them in the beginning because they need so much training. You feel this job is easy because of the Big 4 training." (기분 나쁘게 듣지 마, 하지만 신입사원들은 솔직히 아무런 도움이 안 돼. 빅 4는 신입들 교육하느라 초반에는 오히려 손해를 본다고. 네가 지금 일이 쉽다고 느끼는 건 빅 4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이야.)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녀 말이 맞긴 했다. 학교에서 최상위권으로 졸업했다고 해도, 신입사원 시절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똥멍청이 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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