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질에 안맞는 파티 탈출
아침 8시에 시작한 컨퍼런스는 하루 종일 미국 의료 시스템 전반에 걸친 강의와 토론으로 꽉 채워졌고, 중간중간 10분 정도 화장실 갈 시간만 허락되었을 뿐, 쉬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점심시간도 45분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배울 것이 너무 많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대체 참석자가 몇백 명이나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빅4에서 일할때 참가했던 컨퍼런스들 참가자 대부분이 30세 이하의 젊은이들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40대인 나와 데비가 오히려 젊은 축에 속했다. 그 당시 우리 클라이언트였던 종합병원 하나가 웬만한 대기업 수준의 규모라는 걸 알고 놀란 적이 있었는데, 그런 대형 병원을 운영하는 여성 선배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무용담을 듣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의료계 종사자의 80%가 여성이고, 병원 임원진의 40%도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탑 이그제큐티브는 여성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나는 나이가 지긋한 대형 종합병원 임원 두 명, 세 명의 베테랑 의료기기 세일즈 우먼들, 그리고 꽃처럼 화려한 젊은 제약회사 세일즈 우먼 두 명과 같은 테이블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그들은 서로 이미 알고 있는 듯했고, 매년 이 컨퍼런스에 오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오늘 밤 상을 받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브로셔를 보다 깜짝 놀랐다.
오늘 밤 평생 공로상을 받을 사람은 매사추세츠에서 가장 큰 병원을 운영하는 CEO였는데, 내가 놀란 이유는 그녀가 바로 아까 비행기에서 내 옆에 앉아 특이한 색깔의 나무 구슬로 만든 로사리오를 만지며 기도하던, 바짝 쪼그라든 작은 수녀 할머니였기 때문이었다.
"Oh, she was on my plane, right next to me." (아, 그분 내 옆자리였어.)
내가 말을 하자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She flies in economy class?" (그분이 이코노미 클래스를 타?)
나는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That sounds like Sister Mary." (씨스터 메리답네.)
한 세일즈우먼이 웃으며 말했다.
그녀는 씨스터 메리라 불렸고, 그 병원에서 60년간 일했다고 한다. 메사추세츠 의료계뿐아니라 정계, 경제계에도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케네디가의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테디’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한 사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You should have seen her yelling at twenty-plus white middle-aged male executives in a full conference room. It was glorious."(너네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꽉 찬 회의실에서 중년 백인 남자 임원 스무 명 넘게 앉혀놓고 소리 지르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거든.)
또 다른 세일즈우먼이 미소를 머금고 회상했다.
그날 저녁 갈라는 씨스터 메리가 60년간 헌신했던 병원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보여주는 영상으로 시작되었다.
2차 대전 중 보스턴 근교 버려진 건물 차고에서 출발한 병원이 이제는 미국 전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형 종합병원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담긴 영상 속에서, 그녀는 보드룸에서, 건설 현장에서, 환자들 병실과 최첨단 의료 기기들이 빼곡한 검사실에서 장대 같은 키의 백인 남성 임원들을 거느리고 다니며 선두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나자 청중은 기립박수를 보냈고, 그녀는 마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손에 감긴 로사리오를 들어 올리며 “그만하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평생공로상이 수여되고, 그녀는 상을 잠시 바라보더니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당연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병원을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감상적인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의 첫마디는 예상 밖이었다.
"Running a hospital in deficit is a sin. You need money to serve." (병원을 적자로 운영하는 것은 죄입니다. 돈이 있어야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와우. 나는 입을 딱 벌렸다. 그녀의 연설은 짧았지만 단도직입 적이었고 현의료계의 문제점들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도 확실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녀가 마이크를 내려놓자 청중이 다시 기립박수를 쳤고, 그녀가 연단에서 내려가는 순간 실내악단이 연주를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갈라가 시작되었고, 샴페인과 에피타이저가 얹힌 쟁반을 들고 다니는 웨이터들이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음악 소리가 점점 커지고 사람들의 대화 소리도 점점 커졌지만, 술을 못 마시는 데다 소음 속에서 소리 질러가며 대화하는 걸 싫어하는 나는 점점 피곤해졌다. 두리번거리며 데비를 찾으니, 그녀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샴페인을 마시며 장내를 둘러보고 있었다.
나는 데비의 드레스를 보고 경악했다. 데비는 플로리다 비치에서 브런치를 먹을 때나 어울릴 법한 알록달록한 선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러지 않아도 거구인 그녀의 모습은 다른 여자들의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와 초대받은 남자 임원들의 턱시도 물결과 너무나도 확연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도 그걸 깨달았는지 점점 더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사실 나도 빅4가 잘나가던 시절, 1년에 두세 번 참가했던 갈라들이 없었다면, 갈라에 뭘 입어야 하는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I don't belong here...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있다는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나는 장내를 둘러보다 데비 쪽으로 다가갔다.
"Debbie, we still have more than an hour left for this reception. Aren’t you hungry?" (데비, 이 리셉션 한 시간도 더 남았는데, 배 안 고파?)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Dinner is scheduled for 7:30, but with the delay, it'll probably be past 8:30. But the hotel bell boy told me there is this amazing restaurant nearby that serves incredible crab cakes. What do you say we ditch this and grab dinner instead?" (저녁 식사는 7시 반에 시작될 예정인데, 일정이 밀려서 8시는 돼야 나올 것 같아. 근데 호텔 벨보이가 그러는데, 여기 크랩 케이크가 기가 막히게 맛있는 레스토랑이 있대. 나머지 일정 집어치우고 그냥 저녁 먹으러 갈래?)
데비는 찡그리고 있던 얼굴을 환하게 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스. 핏불하고도 잘 맞을때가 있구나. 나는 어제보다 조금 더 좋아진 그녀를 데리고 파티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