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주지 않는 사랑
1974년에 오픈한 레스토랑은 허름한 외관과 달리 실내는 짙은 고동색 참나무로 꾸며져 있었고, 곳곳에 배치된 앤티크 가구와 장식들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적당히 어두운 조명 덕분에 하루 종일 호텔 컨퍼런스룸 형광등 불빛에 시달렸던 눈이 한결 편안해졌고, 잔잔하게 흐르는 클래식 음악과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 손님들의 분위기가 긴장을 풀어주는 듯했다.
나는 물을, 데비는 위스키 사워를 주문한 뒤 웨이터가 음료를 가져오는 사이 메뉴를 펼쳐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옆 테이블에서 혼자 스테이크를 즐기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그녀의 완벽한 백발은 마치 세팅을 한 듯 풍성했고, 은은한 광택이 도는 펄 그레이 실크 셔츠 밑으로 심플한 진주 목걸이가 보였다. 어깨에는 질 좋은 자홍색 캐시미어 파시미나가 무심하게 걸쳐져 있었는데, 그 색감이 그녀의 희고 고운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웨이터가 돌아왔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크랩 케이크를 주문했고, 잠깐 고민하다가 할머니가 먹고 있는 스테이크도 함께 주문했다.
그 순간, 그녀가 내가 자신의 스테이크를 턱짓으로 가리키는 걸 눈치채고는 미소를 지으며 장난스럽게 윙크를 했다. 반짝이는 파란 눈이 생기 있게 빛나 보였고, 나도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혹시 그녀도 컨퍼런스에 참가했다가 몰래 빠져나온 걸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곧 식전 샐러드가 나왔지만, 내 시선은 다른 웨이터가 밀고 나온 커다란 디저트 스테이션으로 향했다. 웨이터는 할머니의 테이블 옆에 스테이션을 세우더니, 팬에 버터를 녹이고 흑설탕과 바닐라를 넣었다. 이내 바나나를 썰어 넣고 다크 럼을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이자, 푸른 불꽃이 높이 치솟았다.
달콤한 바닐라와 럼, 그리고 바나나가 어우러진 강렬한 향이 코끝을 자극했고, 나는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데비가 황급히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멋쩍어진 나는 시선을 돌려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This is your lucky day." (오늘 운이 좋으시네요.)
옆 테이블의 웨이터가 막 만든 바나나 포스터 플람베를 접시에 담아 우리 테이블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
빅4 시절, 타지에 출장가서 동료들과 퇴근 후 바에서 놀고 있을때 낯선 남자들이 보내온 드링크는 받아본 적 있어도, 낯선 할머니가 디저트를 보내준 건 생전 처음이었다. 식전 샐러드도 다 먹지 않았건만, 데비와 나는 할머니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전한 뒤, 아직도 따뜻한 바나나와 녹기 시작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입 떴다.
천국의 맛이 이런 걸까? 저절로 눈을 감기고 속에서 탄성이 터져나오고 있는데, 그 순간 누군가 다가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Isn’t it good?" (맛있지 않아요?)
고개를 들어 보니, 그 할머니가 우리 테이블 앞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감탄을 숨기지 못하고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The best I’ve ever had. Thank you so much." (지금까지 먹어본 중 최고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자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You know what? The beauty of being a grandma is being able to feed grandchildren ice cream before dinner. Enjoy the rest of your dinner." (할머니가 되면 가장 좋은 점이 뭔지 알아요? 저녁 먹기 전에 손주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여도 된다는 거예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그녀는 다시 한번 윙크를 하고는 테이블을 떠났다. 그녀가 이곳 단골인 듯 웨이터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고, 호스트가 그녀를 배웅하며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를 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나는 할머니가 테이블에 앉아있을 때는 못 보았던 그녀의 검은 울 펜슬스커트와 꽤 높은 굽의 검은 부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는데, 데비가 갑자기 음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Do you think that lady is single?" (저 할머니도 싱글일까?)
"Excuse me?" (응?)
"She mentioned her grandchildren, so she must have been married at some point. But do you think she got divorced or became a widow? She’s having dinner alone in a place like this… She wasn’t single from the start, right?" (손주들이 있다니까 결혼은 했었을 거고, 이혼이나 사별을 한 걸까? 혼자 이런 데서 식사를 하는 걸 보면 말이야... 아예 처음부터 싱글은 아니었겠지?)
데비는 비어버린 디저트 접시를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 할머니 정도의 미모와 카리스마라면 남자들을 떼로 몰고 다녔을 거고, 결혼도 적어도 세 번은 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데비가 자기 처지를 비교하는 걸 눈치채고 마음이 가라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I was engaged once too." (나도 한때 약혼을 했었어.)
데비가 희미하게 웃으며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Really? When? With whom?" (정말? 언제? 누구랑?)
"When I was eighteen. He was a guy I served with in the Gulf War. We planned to get married after we got discharged." (열여덟 살 때. 나랑 같이 걸프전에 참전했던 남자였어. 제대하면 결혼하기로 했었지.)
순간, 설마 그가 전사한 건 아니겠지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진 못했다. 데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조용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But just as we were about to be discharged, he was diagnosed with lymphoma. I took care of him for five years. We promised that once he was cured, we would move to Bali and practice yoga." (제대할 무렵, 그가 림프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됐어. 나는 5년 동안 그를 간호했어. 그가 병이 다 나으면 결혼하고 발리에 가서 요가를 하면서 살자고 했어.)
"But when his cancer was gone, and we were about to leave, my mom injured her back." (하지만 그가 다 나은후 우리가 떠날 준비가 다 되었을때 하필 엄마가 허리를 다쳤어.)
"So?" (그래서 어떻게 됐어?)
"I told him to go first, and that I’d follow once my mom recovered. But that was just the beginning...stroke, cerebral infarction, heart attacks… She kept getting worse. My siblings were all married with kids, so as the only single one, I had to be the one to take care of her for years." (그래서 나는 그에게 먼저 가라고 하고, 엄마가 완쾌되면 따라가겠다고 했지. 하지만 엄마는 그걸 시작으로 중풍, 뇌경색, 심장 발작… 계속 아팠어. 다른 형제들은 결혼해서 애 키우느라 바빴고, 결국 독신인 내가 엄마 곁에서 몇년을 간호했어.)
"So… he didn’t wait?" (그래서… 그가 기다려주지 않았어?)
데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After five years, he got married in Bali and had kids." (그렇게 5년이 지나자, 그는 발리에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고, 아이들을 낳았어.)
"Jesus…" (세상에…)
내 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I couldn’t blame him. After all, he got a second chance at life. Why would he wait for me?" (어떻게 다시 찾은 삶인데 나를 기다릴 순 없었겠지.)
"And look at me now. Probably for the best...at least he doesn’t have to see me like this...this fat and old." (잘된 거야. 그가 내가 이렇게 늙고 뚱뚱해진 걸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지.)
데비는 자기 배를 가리키며 어색하게 웃었다. 나는 할말을 찾지 못하고 같이 그녀의 배를 내려다 보았다.
"I wasn't like this back then. I should have some photos somewhere...." (그때는 이렇지 않았어. 어디에 그 사진들이 있을텐데...)
데비는 셀폰을 꺼내 뒤적이기 시작했다.
"Found it." (찾았다.)
데비는 수줍게 웃으며 셀폰을 내밀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형광 핑크색 레깅스를 입고 바다를 배경으로 요가 포즈를 취한 18살의 데비. 곁에는 갈색 머리의 젊은 남자가 그녀의 균형을 잡아주고 있었다.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매, 햇빛에 그을린 건강한 피부, 밝은 금발. 지금처럼 앞머리는 내려와 있었으나 긴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어 그녀의 계란형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무엇보다 충격적이었던 건 자신만만하고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였다.
내가 회사를 시작한 후 내내 회사에서 봐온 데비는 늘 굳은 얼굴로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내가 아는 데비와 이 사진 속 여자가 정말 같은 사람인가? 나는 클로즈 업한 다른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사진속의 소녀가 바다와 같은 파란색 아이라이너를 하고 있다는걸 알아챘다. 데비가 맞았다.
"It was all about neon colors back then." (그땐 레깅스가 그런 색이었어.)
내가 레깅스 색갈을 보고 놀란 걸로 착각한 듯 데비가 쿡쿡 웃었다.
"I know, I grew up in that era too. But damn, you were gorgeous. Like a model." (나도 알아, 나도 그 시대 사람이니까. 근데 너, 너무 예쁘다. 모델 같아.)
"Yeah, back then, people used to mistake me for Debbie Gibson. Got me a lot of free drinks." (응, 그때 나를 가수 데비 깁슨이랑 헷갈리는 사람도 많았어. 덕분에 공짜 드링크도 꽤 받았고.)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는 그녀를 보며, 나는 갑자기 결심이 섰다.
"You know what, why not now?" (지금이라고 안될게 뭐야?)
"What?" (응?)
"Let’s bring back the 18-year-old you." (25년 전 너로 돌아가자고.)
"What do you mean? How?" (그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데비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내게 다가앉았고, 나는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엠마’가 된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First, let's do something about that goddamn blue eyeliner." (일단, 그 망할 파란 아이라이너부터 어떻게 해보자.)
그 순간부터, 나는 핏불 데비를 순백의 말티즈로 만들 작전을 세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