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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01. 2024

내 안의 광활함을
드러내는 것은 의무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내 안의 광활한 세계를 믿고

끄집어내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의무다.


나를 해체한 후 중심이 되는 명제 가운데 오늘은 다들 알지만 믿지 않는, 행하지 않는, 그러나 늘 갖고 싶고 부러운 명제를 나의 사고체계에 재정리를 시킨 '내 안의 광활한 세계를 믿고 끄집어내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의무'로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나의 이력가운데 내가 가장 잘 쓰이고 있음을 느끼는 분야는 '코치'로서다. 

코치는 인간의 성장을 돕는 위대한 업(業)이며

위대하다는 의미는

인간은 누구나 하나의 창조물로서

우주와 일치, 일체되는 광활한 세계를 내면에 품고 있음을 전제하고

자기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자신을 찾도록 이끈다.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뿐

나도 너도 그도 그녀도 모두가 위대한 존재다.

아마 '인간은 위대한 존재'라는 명제에 이견을 내세우는 이는 없을 듯하다.

그렇다면 '위대하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모르는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있음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모른다고 없는 것이 아니며

내가 외면한다고 사라지지도 않으며

내가 무시한다고 어디로 가지도 않는,

나는 위대한 존재다.

이를 더욱 확고한 명제로서 인정하기 위해 2개의 단어가 필요하다.

잠재력과 창의.


우리는 아주 어릴때부터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하여'라는 표현을 수천, 수만번도 더 들었고 더 말했고 여전히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잠재(潛在)'되어 있다는 것은 '드러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 모두의 안에 무언가가 있다. 창의(創意). 보이지 않는 뜻(意)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비로소(創)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니까 여기저기서 창의창의창의, 창의가 이 시대의 필수능력이라고까지 하지 않는가!


이 2단어만으로도 

우리 안에는 지금 내가 알지 못하는 더 큰 나, 더 위대한 내가 

큰 뜻을 품고 자신을 꺼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명제는 

참이 된다. 진실이 되고 사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내 안에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큰 내가, 광활한 내가 존재한다.


이것을 끄집어내서 세상에 드러내는 것만이 내가 내 인생 전체를 걸고 해야 할 유일한 의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제발 알아들으라며 내가 경외해마지 않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날 일깨웠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다른 이들이 어떤 말을 하고 무엇을 행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 관심갖지 마라(중략) 누가 사기꾼인지 찾아내려 두리번거리지 마라. 자기자신만 똑바로 걸으면 된다.'고, 


헨리데이빗 소로우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사람 한사람의 욕구를 위해서다. 따라서, 세계의 주민은 개인이다.'라고, 


랄프왈도 에머슨은 '한 사람의 사적인 생활은 역사상 어떤 왕국보다 더욱 광채있는 왕국이 되고' / '인간에 대한 자연의 진정한 위치를-모든 올바른 교육이 인간을 거기에 놓는 경향이 있는 자연의 진정한 위치를,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 즉 인간과 자연과의 결합의 목적인 자리(自利)라고 지시하고자 할 뿐'이라고, 


키케로는 '자신이 먼저 선한 인간이 되고, 그런 다음에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마땅하다.' / '사람은 자기를 믿고 의지하는 마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누구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고, 


애담스미스는 '자기(自起)'를 강조하며 '조물주가 인간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이 그 자신의 존재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정력(精力)을 불러 일으키고 모든 신경을 집중해야 한다는 것과, 인간이 실제로 그 목적들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의 행위에 결코 만족할 수 없고 또한 그 행위에 무조건 박수갈채를 보낼 수 없다.'고, 


몽테뉴는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생각을 제안받기를 거절'하라고, 


사우엘 스마일즈는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할 건강한 이념은 '자조(自助, 스스로 자신을 돕는)'여야 한다.(중략) 자조가 영웅보다 강한 것'이라고, 


벤자민프랭클린은 '부모나 젊은이들이 삶의 합리적인 진로를 평가하고 준비할 다른 정당한 수단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모든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개인적인 힘'이라고, 


장자크루소는 '원숭이나 늑대가 동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도움을 더 필요로 할 이유가 무엇일지는 이해할 수 없다(중략) 자연상태란 우리의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이 타인의 보존에 가장 해를 끼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결과적으로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니체는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동정하는 감동이나 행위보다 인간을 훨씬 더 진보시켜준다.'고 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야고보서 2장)'라며 나를 가르쳤다. 


문제는,

아는데 믿기에 참 어려운 명제라는 것이다.

지금의 나...

좌절감에 꺾인 날개는 바닥에서 파닥거리고 두려움에 떠는 혀는 상대의 비위를 맞추느라 아첨에 쩔어 있고 튼튼하던 내 위장은 온갖 정보의 홍수들을 소화해내느라 꺼억꺼억거리기 일쑤이니 이런 나에게 어찌 '위대한', '광활한'이란 단어가 어울리겠는가?


믿지 못하겠으니 안 믿고 사는 것이 편하지

믿어지지 않는데 믿으려는 의지는 오히려 날 힘겹게 한다.


그러니, '의무'로 규정해버려야 한다. 


인간은 참 이상하게 

'자유'가 주어지더라도 '익숙한' 곳에서 두 다리를 편다. 

'원하는' 곳이 아니라 '익숙한' 곳으로 말이다. 

'익숙한' 곳은 '유혹'으로 이미 날 '현혹'시킨 곳이라

새로움을 기부하는 나의 '의무'를 죄책감없이 거부하고 방해할 수 있는 적합한 곳일테다.


원하는 곳은 잠재력을 끌어내어 진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을 향해 당당히 펼쳐보는 삶이지만 

'익숙한' 곳은 적당한 구속이 있고 적당히 가난하고 적당히 강요된 삶인데도 익숙해서 편하다. 

늘 투덜대지만 인간은 '익숙한' 곳이 '편하'기에 '필요'하다고 착각한다. 


광활한 자기내면을 꺼내어 위대한 내가 된다는 것은

불편한 의무를 견뎌내는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 가능하다.

어떤 위대함이라도 고난과 역경, 불편한 변화를 피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통해서 위대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자신안에 광활한 우주가 있음을 믿는다면 

이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무'화시키면 된다. 

인간의 본성대로 적당한 강제와 적당한 구속이 오히려 '편하니까.' 말이다. 

신의 의지대로 인간에게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의 이치에 날 쓰려하니 말이다.


'의무'란 

나보다 더 큰 의지가 내 의지를 거부하도록 스스로 가한 구속이자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며

유혹을 넘어섬으로서 다른 무언가가 될 것에 대한 기대인 것이며

보다 더 확실한 것을 위하여 지금의 확실한 것을 내려놓는 것이며

내가 온전히 나로써 세상에 쓰이려 자기존재 위로 자신을 데려가는 동력인 것이다.


진정 자신만의, 자기안의, 자기다운 본성을 끄집어내는 것이 불편한 자여, 낯선 자여, 힘겨운 자여...

온갖 먼지 배에 묻혀가며 가야할 곳을 향해 바닥을 기는 지네도

삭막한 사막 한가운데서 두 무릎굽혀 순수히 자기 등을 내어주는 낙타도

아무런 도약판도 없이 첫 거미줄을 잇기 위해 바람에 몸을 맡긴 거미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도 씨앗을 퍼뜨리려는 본성 붙잡고 단단한 돌틈을 뚫고 나오는 들꽃도

오로지 알을 부화시켜 데리고 떠날 목적으로 저 멀리 아프리카로부터 수만킬로미터 날아온 뻐꾸기도

한번도 펴보지 못한 날개믿고 앞서 뛰어내린 형제보며 공중에서 몸을 날려 첫 이소하는 아가새도


온갖 생명은 모두 자기 본성에 순종하며 낯섦에 자신을 내던지는데 나의 삶이 무엇을 위해 어디로 향하는지에 관심두지 않는다면 


도대체 내가 지네보다 거미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나의 본성을 누가 대신 찾아주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면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남의 삶에 한쪽 다리 얹어 살아도 될 정도로 귀하디 귀한, 아니 어쩌면 비겁해도 괜찮은 존재란 말인가? 

내 삶이 남의 동정을 기웃거리는 것을 내버려둘 정도로 하찮다는 말인가?

나의 의지를 거부나 외면하는 것이 죄악이 내 손을 이끌며 나를 치욕에 빠뜨리려는 짓인지도 모르는 지성의 소유자인 것인가?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이도저도 아니라면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의 표현대로 그저 우주에 떠돌다가 어디든지 들러붙은

'우주의 종양(주)'이 되겠다는 말인가?


내 안에 있다.

지금 내가 아는 나보다 훨씬 큰 내가 있다.

그러니 진실이자 사실이 될 이 명제를 믿고

나는 나에게 의무를 강제한다.

나의 나약함에 적당한 구속을 가하는 것이

광활한 우주와 나를 만나게 해줄 동력이 될 듯하여.....


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2004), 황제의 철학, 세종서적

발췌도서>

* 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 명상록, 박문재역, 2018, 현대지성

* 헨리데이빗소로우, 소로우의 일기, 윤규상역, 1996, 도솔

* 랄프왈도에머슨, 에머슨수상록, 이창배역, 1984, 서문당

* 키케로, 키케로인생론, 김성숙역, 2009, 동서문화사

* 애담스미스, 도덕감정론, 박세일역, 2009, 비봉출판사

* 몽테뉴, 에쎄나는 무엇을 아는가, 손우성역, 2005, 동서문화사

* 새무얼스마일즈, 자조론, 공병호, 2006, 비즈니스북스

* 벤자민프랭클린, 프랭클린자서전, 이계영역, 2001, 김영사

* 장자크루소, 인간불평등기원론, 주경복 고봉만역, 2003, 책세상

* 니체,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김미기역, 2001, 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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