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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08. 2024

보이는 모든 현상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증상이다.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나를 해체한 후 중심이 되는 명제 가운데 오늘은 명제9, '정신의 물질화, 모든 근원물질은 형상화된다'와 결을 같이 하는 명제15.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상이다.'의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이 명제가 내 인생의 중심맥이 되기까지는 책공부를 시작한 후 한참이 걸려서였다. 근원물질에서 '근원'을 알고 '물질'이 무엇인지 개념화한 후 '형상', 즉 실체로 드러나는 과정에서 논리가 생겨야만 명제로 성립되기에 공부중 어느 한순간 이 명제가 내게 잘 맞는 옷처럼 딱. 입력이 되었을 때


그간 내 정신안에서 엉켜있던, 꿈이 현실이 되는 논리, 창조의 과정, 창의의 개념, 개체로서의 사람은 전체로서의 우주라는 언어들이 내 사고안에서 체계적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탐구의 밑바닥까지 연역해서 사고를 끌고 내려가 정신이 바닥을 수없이 기어다닌 후 내게 투입되어 정리된 정말 내 삶의 소중한 명제이다. 


우선 2가지를 전제한다.

첫째, 나는 '생각'이라는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생각의 주체는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참고 : 생각). 그래서 생각이 아닌 '의식'이란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여기나 여기서는 보편적인 단어로 이해를 돕고자 '생각'이란 단어를 사용하도록 하겠다.


둘째, 생각의 범주는 자발과 비자발적 모두를 전제한다. 생각은 내게로 침입하는 것이다. 그렇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침입한다. 침입이 아닌 내가 의도하여 주입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의식의 영역이다. 단, 이 지면을 통해서는 침입과 주입의 과정으로 들어온 모든 영혼의 자극을 생각으로 규정하겠다.


자, 본격적인 얘기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생각은 무형이다. 생각에 깊이 빠지는, 흔히 말해 고민, 고뇌하는 정신작용은 알지 못하는 무지가 동기이기 때문이며 알아낸 것조차 없는, 그저 의지만 있는 무형의 것일 확률이 높다. 따라서 처음 느껴진, 의식된 것이기에 근원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무방하다. 


갓 이유식을 뗀 아이가 처음 아이스크림을 맛볼 때, 그 놀란 두 눈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자극을 온몸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때부터 아이는 아이스크림만 보면 사달라고 조르는 '탐닉'에 빠진다. 아이스크림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탐닉하고 요구, 욕구한다. 

모든 첫번째 자극은 그렇게 진화한다. 

즉 

근원은 처음, 시작을 의미하고 

욕구를 내게 투입, 날 진화시킨다.

하지만, 처음이 다 근원은 아니다. 나만 몰랐을 뿐 남들은 다 알고 있다면 내가 연역하여 근원을 찾아야 한다. 세상에 내가 모르는데 남이 아는 것이 수억만개일 것이며 남은 모르고 나만 아는 것은 글쎄.. 있을까? 

있다! 

분명히 '남은 모르는데 나만 아는 것!' 

유일하게 하나가 있다!


바로 '나'다. 

단, 날 창조한 주체로서의 신을 제외하고 말이다. 

즉 근원이란 지극히 개체적인 독창성을 띈 것이면서도 보편적인 것이다. 


한 인간의 자기 자신으로서의 모습, 홀로 남아도 끝까지 따라다니며 그 누구에게 받을 수도 없으며 빼앗기지도 않는 것이야말로 그 인간이 혹시 소유하게 될지도 모를 그 어떤 것,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보다 본인에게는 가장 본질적이라는 명백한 사실 때문이다(주1). 


그렇다면, 지금 내 정신 속에 들어있는 모든 인지된 사고의 대부분은 근원일까? 바로 정답이 나올 것이다. 결코 아니다. 인지된 사고의 대부분은 '인지하는 순간' 나의 관념이 손톱만큼이라도 개입될 수밖에 없기에 더 깊은 탐구의 의미로서 근원이라 할 수 없으며 진정한 근원은 나의 인식마저 배제된 것을 찾는 것일테니 어쩌면 진정한 근원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근원을 찾는 탐구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왜냐면, 더 이상 파고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연역으로 내 사고를 매고 끌고 갔을 때 그 사고는 근원이라 불리어도 괜찮다고 데카르트(주2)가 알려줬기 때문에 무지한 나는 천재철학자를 따라보기로 했다. 

이렇게 근원에서 내가 의식한 덩어리들을 나열해 보자. 아무도 모르는 나의 꿈, 나의 가치, 나의 미래, 나의 사상, 나의 영감(spitituality) 등을 대표적으로 거론할 수 있겠다. 80억 인구중에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도 부지기수로 많을테니 나의 꿈은 보편적이다. 하지만 독창성이다. 세상의 나는 유일하니까. 수천만가지의 변수 가운데 단 하나만 달라도 독창성에 위배되지는 않으니까. 꿈이라는 무형의 근원이 내 안에 의식의 덩어리로 자리잡힌 것이 근원물질의 하나의 예가 되겠다. 


이제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에 '물질'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무방할까? 

비물질이라는 표현이 적합하지 않을까? 

나는 둘 다 적합한 표현이라 여긴다. 

비물질은 물질로, 물질은 비물질로 서로 인과적 연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영감이나 꿈과 같은 추상성이 비물질이겠지만 분명 나의 영혼이 그것을 가져와 내 신체의 그 두터운 관념과 단단한 뼈를 뚫고 세포 깊숙하게 심어놓았을 때는 영혼이 그것을 이동시킨 수단이 존재했을 것이고 이동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에 '물질'이라는 표현에는 추상성과 초월성이 모두 담겨 있다고 전제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논리를 펼 수 있겠다. 인간의 탄생과정에서 처음엔 정자와 난자의 결합이 있다. 그 두 물질의 결합안에서 정신이라는, 영혼이라는 비물질은 함께 존재했다. 그러니 '정신을 함유한 인간의 신체'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때 물질과 비물질이 연합과 융합으로 결합된 하나의 개체로서 '물질'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방하다고 하겠다. 


자, 모든 형상은 가장 근원이 원자이듯이 근원이 되는 물질은 알든 모르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형상화되어 세상에 존재한다. 존재시킬 수 있다. 존재하여 진화되어 왔다. 다시 말하지만,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근원물질은 형상화된다. 


오랜 탐구끝에 내 삶의 명제리스트에 각인된

'근원물질의 형상화'는 단순한 논리에서 명제로, 명제에서 진리로 내게 인식되있다. 

논리에서 진리로 승화되었다는 것은 보편타당하다는 말이다. 

누구에게든 적용되고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현상이란 말이다. 

쉽게 말해서 꿈은 이루어진다. 믿는대로 현실이 된다. 생각대로 된다. 말이 씨가 된다. 류와 같이 보편적인 표현은 무서우리만큼 타당한 근거를 가진, 바로 '근원물질의 형상화'인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여기 이 자리에 이런 모양새로 서 있는가? 

이는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과정에서 

'사고가 형상화'

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자극에 의해 나는 이리 하려 했고 그 명령에 따라 이리 움직여 이리 서 있는 것이다. 저리 생각했다면 저리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근원물질은 내 생각대로 움직인다. 모든 과정으로 이뤄진 형상은 추상적인 생각이 구체화된, 이상이 현실화된, 무형이 유형화된 창조다. 

창조의 원리 자체가 '없던 것이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인류는 진화하고 있다고 말들을 하는데 '진화'의 전단계, 전제에는 '창조'가 필요하다.

창조되어야 진화되고 진화의 모든 과정에 인간의 '사고'가 개입된다.


따라서, 

인간의 사고는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연결해주는 고리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연결을 더욱 우주적이면서 보편적으로 해내는 기능이 의식의 작용이다. 

'사고'자체가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에너지를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 논리의 탄탄함과 유연함, 연결의 강도는 분명 다를 것이며 당연히 사고의 차이에 따라 형상화된 결과, 즉 유형화된 현실도 다를 것이다.


이렇게 모든 근원물질에 가해지는 사고의 역동성과 유연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눈에 보이는 객관적 세계로 차등, 차원, 차이를 지니고 등장시킨다. 이것이 창조와 진화의 원리인 것이다. 오늘의 내 모습,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나는 나의 사고의 결과, 창조다. 무형의 나의 의식적 사고가 유형의 오늘의 나를 창조한 것이다. 전진이든 퇴보든 어쨌든 새롭게 창조된 나로서 오늘은 사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에 따라 내일, 1년, 5년, 10년뒤의 나의 모습을 만드는 주체자도 나다. 우주의 참된 가치는 한가지 한가지의 모든 점에 가치 그 자체를 쏟아넣으려 한다. (중략) 우리 내부에는 하나의 감정에 속하는 저 영혼도, 밖으로 드러내면 율법이 된다. 우리는 안으로 그 영감을 느끼고, 밖으로 역사에서 그 크나큰 위력을 볼 수 있는(주3) 것이다. 내 안에 있는 그것이 내 인생의, 나아가 작은 점으로라도 우주의 역사가 되니 내 안에 무엇을 품고 있는지를 주체적인 나로서 의식하고 행하는 것에 나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증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창조해낸다

는 명제(15번)와 의미를 같이 한다고 하겠다.


그러니, 내 현실을 바꾸고 싶으면 내 안의 사고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언급하지만, 사고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연결고리다. 

다리가 없는데 어찌 강을 건널 것인가? 

씨앗을 물어 옮겨줄 새가 없는데 어찌 여기 뿌린 씨앗이 저기서 열매를 맺을 것인가? 

여기서 이리 움직였을 뿐인데 저기서 뜻밖의 결과가 주어지는 '운'은 또 어찌 설명할 것인가?


세상 모든 것은 완전하게 채워져 있다.

우주 속 진공상태로 존재하는 공간은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 무언가로 채워져 있다. 

지난 시간들을 나는 무언가로 채우면서 지내왔고 그 결과가 지금의 나다. 

지난 사고들을 나는 무언가로 진화시켰고 그 판단의 결과가 지금의 나다. 

지난 내 행적들은 시간에 사고를 어찌 연결하여 결정했는지로 채워졌고 그 증거가 지금의 나다. 

그러니, 

'그것은 세상안에 들어 있고, 세상은 그것으로써 만들어졌다(주4)'는 성경말씀 그대로인 것이다.


내 세상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내 세상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내 세상이 무엇으로 채워지길 바라는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강력한 근원물질은 자체의 강도와 탁도, 순도로서 나를 통해 드러난다.

그것이 내 세상이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은 월등하게 강하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제대로 채우지 못한다면

'보이는 결과'로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가령, 

인격이 부실한데 결과가 좋다면 그것은 일시적일 뿐, 반드시 그 대가는 치르게 되어 있고

자격이 갖춰지지 않았는데 한순간 기회가 주어졌다면 그 기회는 자신의 실수를 빠르게 인정할 것이며

품격이 저렴한데 제 아무리 명품으로 휘감은들 눈빛과 말투와 손짓은 거짓된 품격을 입증할 것이며

성격이 못난데 제 아무리 혀를 굴린 들 그 뾰족한 모서리는 타인에게 가해졌다 자신에게 되돌아오니

보이는 모든 것에 있어 

보이지 않는 '격'을 갖춰야 할 이치에 나는 합당, 타당, 지당한 인간으로 나를 키워내야 한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정신은 물질로 환원되며

보이지 않는 무형은 유형으로 전이되며

보이지 않는 진리는 일상으로 드러나며

보이지 않는 이상은 현실로 증명되며

보이지 않는 관념은 결과로 현시되며

보이지 않는 추상은 구체로서 입증되니

내가 힘을 쏟고 진정을 퍼부어야 할 곳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다.


내 사고는 현실이 된다.

다 자란 열매를 생각했다고 해서 곧바로 열매를 맺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얻고자 하는 열매를 생각한다면

그 열매를 맺고자 하는 동기가 내 안에서 발동되고

동기는 행위의 강도와 속도와 밀도를 순차적으로 이끌어내어

반드시 원하는 열매를 맺게 한다.

근원물질은 이렇게 형상화되는 것이다. 

사고가 내 안에 진입하면 '시도'하고자 하는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동기가 행위의 강도와 속도, 밀도를 이어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오물을 묻힐 수도 오류에 빠질 수도 함정에 걸려 넘어질 수도 있다. 이것이 '결과'가 가는 길이라면 그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이라 그렇다. 


하지만 이 결과는 이런 길을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아는 혜안과 지성의 소유자라면 어쩌다 바지에 똥을 수는 있지만 똥을 싼채로 돌아다니지는 않는다(주5). 


이것이 

훈련이다. 

삶이 날 키우기 위해 사랑으로 가하는 시련. 

신이 내 인생에 개입하여 나를 제대로 쓰려 부여하는 숙제. 

내가 증명해내야 할 결과가 나를 통해 나오려고 겪는 창조의 진통.

내가 해야할 몫은 그저 훈련뿐이다. 


주1> 쇼펜하우어, 쇼펜하우어인생론, 나래북

주2> 데카르트, 방법서설, 문예출판사

주3> 랄프왈도에머슨, 자기신뢰철학, 동서문화사

주4> 요한복음 제1장 제1절~5절 

주5> 스캇펙, 아직도 가야할 길, 열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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