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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15. 2024

바라지 말고
그냥 믿자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나를 해체한 후 중심이 되는 명제 가운데 오늘은 명제10.'바라지 말고 바라는 형상을 믿는다'와 명제 13.'관심두는 쪽이 커진다'의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바란다', '믿는다.' 이 둘의 차이를 내 머리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온몸에 체화시켜 바라는 쪽이 아닌, 믿는 쪽으로 집중하는 훈련을 나의 일상에 접목시키기도 여간 어렵지 않았으나 이제 구분이 명확한 이상, 조금이라도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나는 그 '원하는' 것을 '믿음'으로 대체시켜 집중한다. 


바라는 것, 소망하는 것, 구하는 것, 흔히 기도하는 것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있다. 아픈 이는 아프지 않도록, 가난한 이는 넉넉하도록, 시간이 없는 이는 자유롭기를.. 우리는 모두가 무언가를 바란다. 집에서 집근처 카페로 가는 이 짧은 거리에도 나는 바라는 것들이 내 가슴에 가득 찼다. 카페에 가면 내 능력을, 내 의지를 초월한 글이 나를 통해 나와주길 바라고 또 바라며 걸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믿으며 걸었다. 


'마땅히 되어야 할 어떤 모습'

으로 나를 규정짓고 그 모습으로 날 만들기 위해 신이 허락한 하루를 온전히 바친다면 그 '마땅히 되어야 할 어떤 모습'이 되는 것에 있어 신에게 요구하고 내게 허락되어 있음을 믿을 권리가 있지 않을까? 

물론, '마땅히 되어야 할 어떤 모습'이 올바른 것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게 부여된 의무이기에 순종하는 마음가짐이 충분하다면 말이다. 


그 모습을 갖기 위해 우리는 목표라는 것을 세운다. 될 것 같고 안되면 어쩌나 싶지만 늘 자신의 능력보다 조금 더 높여서 목표를 세운다. 나폴레온힐부터 성공학의 대가들이 여러가지 성공요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1가지가 있다면 '목표'라고 했다. 흔히 알고 있듯이 목표는 SMART하게 세운다. 


S - Specific (구체적으로)
M - Measufable (정량적으로) 

A - Action Oriented (행동에 근거하여) 
R - Realistic (현실적으로) /Resonant (공명하도록)
T - Time bounded  (기간제한적으로) / Thrill (가슴떨리도록)


가장 기본적으로 목표설정에 대해 흔히 알고 있는 SMART만 보더라도 

목표란 내 가슴을 진동하게 하는 그것을 기간내에 이루기 위해 내 행동을 우선하여 아주 구체적인 루틴을 짜서 움직인다. 바보가 아닌 이상 될 것 같지 않은데, 길이 막혔는데, 가봤자 없는데, 저리 가는 것만 못한데 움직이겠는가? 


나의 이성은 저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계속 외쳐대지만 나는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저렇게 움직이고 저기로 가고 있다. 무의식은 전체가 되고 완전해지고 큰 나를 깨닫고자 하는 선천적 충동이 있어 무의식이 설사 의식적인 마음에 상처를 준다 해도 충동을 실현할 방법과 수단을 고안한다(주1)'는 것을 이미 칼융이 충분히 증명했기 때문에 나는 무의식이 이끄는 길을 따른다. 


그렇다면, '바라는' 것은 이미 자체에 방법과 수단을 모두 내재하고 내게  것이다. 

그러니, 내 의지와 의식, 의도보다 더 강력하게 믿어도 되는, 아니, 믿음이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라는' 즉, '없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다'고 '믿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SMART를 기준으로 목표를 위해 시간과 행동과 모든 에너지를 투자하는 것이다. 

믿지 않으면 왜 하겠는가? 

믿으니까 하는 것이다. 


바란다는 것은 없기 때문이고 바라는 바가 많거나 강하다는 것은 '없는'것이 강하고 많아진다는 이다. 

반면, 믿는 것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여 진짜 있어지는 이다. 

바라는 것은 감정이고 감정이 오는 길은 무의식적인 욕구로부터다. 즉, 무의식이 내게 무언가를 느끼게 전해준다. 지금의 나보다 나인 나의 무의식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나의 의식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고의 동기는 무의식(주2)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두려워도, 하는 것이다. 한다는 것은 내가 느끼든 못 느끼든간에 될 것 같고, 볼 것 같고, 잡힐 것 같고, 있을 것 같고, 손에 쥘 것 같으니까, 믿어지니까이다. 목적을 지닌 무의식은 내게 그런 감정을 계속 느끼게 함으로써 나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야만 할 '목표'를 창조한다. 그렇게 자기 일을 한다.


점점 간절함이, 갈구가, 욕구가, 소원이 강해지고 구체화되고.. 그렇게 열망과 열정과 의지와 투지가 나를 휘감아 아직 상상이지만 그 정체가 현시(顯示)화될 것을 믿고 나의 온 몸은 그 '바라는' 바를 향해, 흔히 말하듯 '꽂혀 있게', '미치게' 만들어 그것밖에 모르는, 목표에 매진하는 방향으로 내 온 에너지를 쏟아내게 한다.  이 때 나의 무의식과 교신하는 우주는 내가 보내는 강력한 진동에 반응하여 그 '바라는' 바를 형상화시킬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인간적으로 자신의 파멸을 알면서도 가능성을 믿는 것, 그 때 신도 그를 돕는다(주3).


만약 당신이 꿈꾸는 방향을 향해 확신에 차서 나아가고, 그렇게 상상한 삶 속에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예기치 못한 성공을 마주하게 될 것(주4)이라는 소로우의 글도, 그들이 남의 입에서나 지혜를 얻고, 자신의 감각보다는 오히려 들은 것에 의지해서 목표를 쫓는 한, 그것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전에 그랬던 것보다 더 잘 되지는 않으리라(주5) 루크레티우스의 한탄도 모두 '무의식에서 바라는 바'는 이미 '증명된 현실'이니 현재의 인식을 외면하고 믿으라는 말이 아닌가?



내 안에 바라는 그것이 이뤄졌다는 믿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이성을, 관념을, 관성을 파괴시키면서까지 나아갈까? 

우리는 어쩌면 너무 우리 두뇌를 믿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판단한다는 똑똑한 사람일수록 어쩌면 더 어리석다. 

이 세상에 인간의 두뇌를 뛰어넘는 그 이상의 현명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의심스러운가? 

이는 진리가 아닌가? 


우리 인생을 움직이는 커다란 힘, 주요한 단계에 이르렀을 때 '감'을 믿고 움직이게 하는, 인식의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본성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서 솟아오르는 내면적 충동(주6)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그 힘말이다. 그 힘은 인식이 알아채지 못해도 무의식이 이미 믿고, 밀고 있는 힘이기에 인식을 파괴시키는, 인식보다 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그 강력함으로 '없던' 것을 '있게' 한다. 이것이 창조가 아닌가? 진화가 아닌가? 성장이고 성공이 아닌가?


따라서, 

바라니까 간청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바라는 바를 이미 허락받았고, 이미 가졌으니, 그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진정한 기도다.  

보이는 것을 보며 걷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믿음을 따라 걷는 것이다.

믿음이란 것이 당신에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주7) 



그러니 우리는 

'바라는' 감정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믿어지는, 믿는' 감각에 집중해야 한다. 


무조건 관심갖고 집중하는 곳이 커진다. 

초점을 맞추는 곳이, 관심받는 곳이, 계속 먹이를 주는 곳이 무조건 확장, 증식한다. 

바라는 바에 집중하면 바라는 간절함이 계속 커진다. 감정만 계속 커진다. 그러니 계속 없는 상태가 유지된다.

하지만 이뤄졌음을 감사함에 집중하면 감사가 몸집을 키운다. 그래서 더 빠르게 바라는 바를 현실로 당겨온다.


예술을 잘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는 앤디워홀 역시 자신의 경험으로 무언가 소망하기를 멈추는 순간, 당신은 그것을 갖게 된다. 나는 이 명제가 절대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주8)고 했다. 바라는 바를 멈추는 순간, 갖게 된다. 이 말 역시 바라지 말고 그것이 되었다고 믿었을 때, 즉, 내 안에 믿음이라는 씨앗이 심겼을 때 그 일이 현실이 된다는 의미이다. 제 아무리 가능성이 희박한 목표라 해도 반복과 훈련이 거듭되면, 즉 양이 쌓이면 가능지수는 높아지게 되어 있다. 사실 가능성이 희박하니 목표인 것이다.


결국, 나를 해체하여 내 감각과 정신과 감정과 신체를 움직이는 것에 가한 훈련이란 

너무나 단순한 것이었다.


가슴떨리게 원하는 것이 있으면

구체적이고 정량적으로 목표를 잡고

그 결과를 바라는 감정이 들 때마다

구체화된 결과를 상상하는 믿음에 더 강하게 집중하여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목표를 위해 해야할 행동의 양을 쌓는다.

감정이 아닌, 감각을 믿고 행동을 반복하는, 그렇게 내 몸을 사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원하는 바는 

나를 통해 구현해내야 할 우주의 일이며 

그 일은 나의 무의식과 교신하여 나를 움직이게 하는 더 크고 강력한 힘에 의해 가동되는 것이기에 

나의 인식과 의지와 능력이 제 아무리 미진하다 해도 그 일 속에 자체의 방법과 수단을 지니고 있으니

나는 그저 내 무의식이, 더 큰 내가 보내는 소리의 감각을 믿고 가면 되는 것이다.


그대들이 보이지 않는 사원을 찾는다면, 황홀한 마음으로 달콤한 만남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그대들이 그저 구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들이 스스로를 낮추기 위해 사원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일으켜 세움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들이 다른 이의 행복을 기도하기 위해 사원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그 기도는 어떤 답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대들이 보이지 않는 사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족한 것입니다.

-기도에 대하여(주9)


주1> 놓아버림, 데이빗호킨스, 2013, 판미동

주2> 몸은 알고 있다. 뤼디거달케, 2006, 이지앤

주3> 키에르케고르선집, 키에르케고르, 1989, 집문당 

주4> 소로우의 일기, 헨리데이빗소로우, 2003, 도솔 

주5>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루크레티우스, 2012, 아카넷 

주6> 쇼펜하우어 인생론, 쇼펜하우어, 2010, 나래북 

주7>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2008, 범우사 

주8> 앤디워홀이야기, 아서단토, 2010, 명진출판 

주9> 예언자, 칼릴지브란, 2020, 더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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