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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Jun 22. 2024

초월적 지식인가 무지한 발광인가

이기론(利己論) - Ch3.  해체, 그리고 脈!

나를 해체한 후 삶의 중심으로 삼은 명제 가운데 오늘은 명제11.'감각이 나의 주인이니 판단정지, 그냥 행동'과 명제 14.'인식의 문을 잠그고 의식의 문을 연다'의 썰을 풀어보고자 한다. 사실 이와 관련된 글은 '이기론'의 서두에서 자세하게 풀어놓은지라 ([생각차단,감각오픈] / [감각ON, 이성OFF])  여기서는 간단한 부연(敷衍) 정도로 정리하겠다.


감각이 나의 주인이니

과거기억덩어리인 인식의 방, 이성을 정지시키고

무한의 세계, 의식의 문을 향해

그저 해야할 행동에 집중한다. 


이 간단하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명제를, 해체된 내게 제대로 주입시켜 어떤 경우에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어맨 이유 역시 아주아주 단순하다.

우선, 왜 감각이 나의 주인인가?

우리는 정신과 신체,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떤 느낌이 올 때 우리는 '아! 그건가?' 하며 심장이 떨리고 감정에 순간 환한 기운이 돌면서 이성에 전달, '그렇게 해볼까?'판단하며 행동에 명령한다. 인간이 상당히 이성적으로 사는 것 같지만 그 이성에게 맡겨진 판단이라는 거대한 의무를 인지하기까지는 감각과 감정의 연동이 전제되어야 한다.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는 일을 우리가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싶다. 쓰고 싶다. 만지고 싶다. 보고 싶다. 갖고 싶다. 가고 싶다. 하고 싶다, 되고 싶다. 등등 모든 인간의 욕구는 느낌이 감정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 '느낌'의 범주는 무한이다. 무한의 영역은 인간의 구성요소에서 영혼이 활동하는 곳이고 영혼의 자극, 즉 느낌이 나의 심장을 진동시켜 이 진동이 파동을 일으켜 피가 돌고 열이 나고 기운이 솟으며 정신이 맑아지면서 당장 시작하게 하는 행동과의 간격을 좁히고 시간을 앞당긴다. 주인이 시키면 머슴이 맡은 역할대로 일을 하듯 영혼이 내 몸의 주인인 감각에게 자극을 주면 수많은 기능들이 연결, 연동, 연쇄, 연계되면서 내 삶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감각을 훼방놓는 정체가 있으니

바로 합리적, 논리적, 이성적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정신이다.

자신의 인식속에 있는 사고덩어리, 다시 말해 관념덩어리가 이성적인 사고인 것마냥 습관화된 정신을 말한다.

인식은 이미 일반적으로 알려진바대로 '인지부조화', '인지편향'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오류를 품고 있다. 이러한 오류는 당연하다. 왜냐면. 인식은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경험이란 것이 사실과 진실에 시간과 행동이 보태어 형성된 것인데 우리의 기억은 그 경험에서 사실적 맥락과 시간이 애매하게 뒤섞이며 오류를 낳는다.


즉, 인식을 구성하는 경험의 축적인 기억자체가 지닌 오류로 인해 우리의 인지는 부조화와 편향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이 그 무한의 우주를 떠돌며 내게 전해주는 감각을 '단순한 느낌', '경험없음', '근거없음'이라 판단하고 자신의 인식으로 배제시키는 더.큰.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당연히 더 큰 오류는 더 큰 위험을 만든다.


감각이 주인이라는 정의에 있어 우리는 경험상 2가지만으로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첫째, '뜻밖에', '예상밖의', '말도 안되는', '상상을 초월한'과 같은 표현으로 어떤 결과를 얻는 경우가 숱하게 많다. 기적처럼 하필 그 때 그런 일이 벌어져서 내가 계획한 것이 성사되거나 또 그 반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인식이 배제된 상태에서 벌어지는 경우다. 둘째, 21세기 최고의 능력은 '초민감성'이라 불린다. 초민감성. 무엇인가? 감각이 초고도로 발달된 사람이 직관적이고 통찰있는 창의적인 사람이란 말이 아닌가? 자, 거부나 무시할 수 없는 이 2가지의 현상만으로도 우리는 감각이 나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겠다.


그러니 나의 주인인 감각을 따라 이성속의 인식을 차단, 배제, 밀쳐두고 감각에 따라보는 것이다.

감각이 이끄는 길은 안가본 길, 미지의 길, 미래의 길, 의식의 이다.


의식은 인식으로 굳어져 나를 움직이는 무의식을 깨는 유일한 정체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위, 습관이 행위에 중독되는 것은 의식하고 전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의식은 하지 말라 명하지만 무의식은 하는 것, 의식은 가지 말라 명하지만 무의식은 가고 있다. 김유신이 자기가 사랑하는 애마의 목을 베었을까?


무의식은 의식을 이기려 한다. 

왜냐면, 의식은 안가본 길이기에 모르고 뿌옇고 희미하기 때문에 길을 잃기도 하고 머뭇거리기도 하고 자로 재기도 하고 뒷걸음질치게도 만든다. 그래서 두렵고 불안하고 가기 싫고 외롭고 고통스럽다. 각성된 의식으로 매번 무의식을 이겨내는 것이 습관을 만드는 기본이 아닌가? 안읽던 책을 읽으려면 얼마나 읽기 싫고 읽어서 뭐하나 싶고 읽을 때마다 불안하고 외롭고.. 그런 것처럼 습관, 중독된다는 것은 깨어있는 의식이 무의식을 변화시킨 훈련의 결과다. 


결국, 의식이 무의식보다 지배우위에 있다. 

자, 감각이 자아를 안내하는 길은 의식의 이다.

인식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유한성을 지닌다면 의식은 현재부터 미래까지 무한성의 이다.

그러니

무한을 향해 유한에는 등을 돌려야 한다.

그리고는 결코 뒤돌아보지 말고 무한으로 달려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자리에 멈춰 미래로 나아가지도 못하고 과거에 갇혀 상태로 평생 부패되지도 않으면서 살아야 하는 소금기둥(주1 / [하루에도 수십번 소금기둥이])이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감각이 나의 주인이니

과거기억덩어리인 인식의 방, 이성을 정지시키고

무한의 세계, 의식의 문을 향해야 한다.


의식의 문을 열고

그리로 들어가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하기로 한 것을 하면 된다.

너무 쉽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 그건가?' 하며 심장이 떨리면서 감정에 순간 환한 기운이 돌면서 이성에 전달, '그렇게 해볼까?'하며 정신이 행동에 명령한 그것을 그냥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계속 될때까지 하는 것이다.

양이 쌓여야 질적인 승화가 일어나니 일단 양을 쌓는 것이다.

그저 해야 할 행동에 집중하여 행하는 것이다.

집중하는 곳은 반드시 강하고 커지게 되어 있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너무 어려운 일을 너무 쉽게 해낸 경험들이 이미 DNA에 꽉 차 있다. 자전거를 배울 때 많이 타면 안 넘어졌고 구구단을 외울 때 많이 외우면 금방 기억에 남았고 영어공부를 처음 할 때 영어단어를 많이 외운 아이가 영어실력이 좋았고 수학도 많이 풀었을 때, 어떤 훈련을 하더라도 훈련의 양이 많을수록 분명이 더 좋은 결과를 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숱한 경험이 무의식에 꽉 차있다. 일단 양이 쌓이면 반드시 어떤 경지에 오른다. 양이 가는 길엔 항상 질이 마중을 나온다.


감각이 나의 주인이니

과거기억덩어리인 인식의 방, 이성을 정지시키고

무한의 세계 의식의 문을 향해

그저 해야할 행동에 집중하면 된다. 


자, 여기까지 누구나 이해가 되었을 것인데

무조건 행동만 하면 되느냐?

그것은 아니다.


섬광처럼 느껴지는 느낌과 그저 번뜩이는 것은 분명 다르다.

내맘대로와 마음가는대로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완벽히 다른 차원이다.

한끗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자유와 방종, 비행과 일탈의 차이처럼

고생끝에 낙(樂, 즐거울락)이 아닌, 고생끝에 낙(落, 떨어질 낙)에 자신을 세워둘 수도 있다.


직관과 번뜩임은 지식의 정도에 따라 차이를 둔다.

직관은 명시적, 암묵적 지식이 충분히 쌓여 갖게 된 초월적 지식이라면

번뜩임은 그저 감각적인 쾌락만을 쫒은 무지한 발광일 수 있다.


지혜의 근원은 기본지식이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철학자와 학자들의 검증에 근거한다([Liew의 지식에서 지혜]). 영혼의 자극이 거름망없이 감정을 동요시키더라도 이를 필터링하는 곳이 정신이다. 이 정신이 무엇으로 쌓여 있느냐에 따라 초월적인 메타지식인 직관이 될 수도, 그저 **발광하는 난동일수도 있다.


전자는 위대한 창조를, 후자는 난동의 흔적을 남길 것이다.

전자는 기본에 충실하여 기준을 높일 것이고

후자는 기교에 발광하며 기회만 노릴 것이다.

전자는 낙(樂)으로 후자는 낙(落)으로 나를 세워두겠지.

그러니, 아는 것(명시지식)을 해야할 행동(경험지식->암묵지식),즉 앎을 삶으로 차곡차곡 이동시켜 쌓으면서 진짜지식의 양이 축적된 자에게 주어지는 직관을 우리는 경외하는 것이다.


지혜로움의 발현인 직관은 창조를, 창발을 이뤄내며 무한한 정신의 향유를 누릴 곳으로 나를 안내하지만

명시지식만 쌓이거나 경험지식만 쌓인 부조화된 인식에 근거한 감각적 발현은 그저 번뜩번뜩하고 화려한 감정만 불꽃처럼 뿜어대다 난동을 피우는 향락이라는 종착지에 나를 데려다놓는다.


그러니, 프루스트(주2)가 내(川)가 있는 길과 들판의 길, 공간적으로 분리된 전혀 다른 실체의 두 길에 통일과 일관성을 부여해 정신적 거리감을 없앴듯이 감각과 이성, 이상과 현실이라는 분리된 실체의 두 길을 연결지어 일체화시킬 정신의 힘이 우리에겐 필요한 것이다. 통일된 지점에서 보내는 신호에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해체하고 얻는 인생의 맥 2가지, '감각이 나의 주인이니 인식의 문을 닫고 의식을 향해 해야할 행동을 반복한다'는 나를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줄 내겐 너무나 가치있는 명제이다.


주1>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할 때 롯의 아내는 도망하다가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창 19:26).

주2>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 민음사


[건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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