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자 4천명.
물론, 이 숫자가 뭐라고...
숫자에 현혹되지는 않지만 숫자 이면에 담긴 의미에 가슴이 조용하지는 않다.
분명 이들 가운데 내 글을 진심으로 읽는 독자가 1/10, 1/100, 아니, 1/1000일지라도 누군가 읽는 확률은 높아진다. 지금... 내 글은 누군가의 정신으로 흡수되고 있다. 혼(魂)을 담아 쓴 글은 읽는 이의 혼으로 접속된다. 이 숫자에 비례하여 커질 수밖에 없는 영향력에 대한 의무감, 책임감, 부담감,
그리고...
욕.구...
적당한 삶에 길들여진 나, 그리고 그대들....
적당한 중산층의, 적당한 가정에서, 적당한 학벌로, 적당한 통장잔고와 적당한 서울근교, 적당한 보금자리에서, 적당한 행복을, 적당히 즐기며, 적당히 도전하고, 적당히 포기하며, 적당히 하루를 보내는...
적당히의 모순에서
결코 적당하지 않은 마음의 무게로,
결코 적당하지 않은 인생의 책임앞에서,
결코 적당하지 않은 자기실현을 위해,
결코 적당하지 않은 꿈을 꾸며,
결코 적당하지 않은 모험을 해볼까 하는...
실체없는 '적당하지 않은 것'들을 찾아,
적당한 삶을 뒤로 하고
적당하지 않은, 아니, 적당히를 넘어서볼까 자기를 한계까지 끌고가려는 시도앞에서
적당히 넘어가면 안될 것 같아
그간의 '적당히'를 깨뜨리고 넘어서려는,
어쩌면 그런 욕구...
왠만큼 가졌는데 왠만큼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딱히 불행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삶이 주는 답답함과 한결같음에 지루한건지 익숙한건지 괴로운건지 스스로의 상태도 모르는, 말 그대로 '적당히'에 쩔어있는 자신을 더 이상 내버려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빠진 누군가에게 내 글이 '적당히' 대신 '굳이'를 담아주는 글이면 좋겠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굳이. 하겠다고 선언하고선
굳이. 꾸역꾸역 해내며
굳이. 나를 검증하고 증명해내고 싶은 '자아'의 강렬한 욕망 부여잡고
굳이. 내가 '적당히'에 머무르는 것이 얼마나 큰 낭비인지를
굳이. 알려하지 않았는데 저절로 알게 되어
굳이. 남들이 백만번 '괜찮다.'고 해도 결코 스스로 괜찮지 않아서
굳이. 내 능력껏, 내 재주껏, 내 한계껏 얻어낸 것들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욕구까지 보태어
나는 매일 글을 쓴다...
꼴같잖다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매일 발행하는
내 글은 '적당히'에 등을 돌리고 '굳이'앞에 날 세워두고 어렵게 내딛은 한발한발이기에
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글의 단어, 행간 사이사이에서 숨쉬는 '적당히' 대신 '굳이'를 느끼고 얻어가길 바란다.
그래서,
내 글을 읽는 누군가가...
한번 뿐인 인생에서 선택앞에 망설이는 우유부단한 자신이 아니라고.
적당히에 만족해 더 나아가지 못하는 나태한 자가 아니라고.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는 이성의 절름발이가 아니라고.
못난 지금을 감춘 채 잘난 미래를 쫒는 자기허영도 모르는 무지한 자가 아니라고.
포장된 자기 명함에 취해 부족한 자기지성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아니라고.
주변 평판에 벌벌 떨며 어리석은 자의 조언에 수긍하는 설익은 귀의 소유자가 아니라고.
뭐든지 다 해낼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손발은 너무 편한 떠버리가 아니라고.
어떤 현상 앞에서 더 이상 깨지지 않고 고착된 이성이 하품이나 하며 조는, 자는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이도저도 아닌 인간은 아니라고.
모루에 내리치는 망치의 강도로 스스로를 가격하길 바란다.
나의 야망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 한권에서 말하는 것을 열문장으로 말하는 것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이 책 한권으로도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략) 나는 곧 그들에게 가장 독자적인 책을 줄 것이다(주).
나도 니체와 같은 포부를 가져본다.
'적당히'에서 '굳이'까지 날 옮겨놓으니
'굳이'는 '마땅히'로 날 이끌고
'마땅히'는 '기어이'로 날 세워주어
'기어이'는 '기꺼이' 내가 그리던 '아마도'로 날 당도케할 것이다.
호라티우스의 송가가 시종일관 내게 주었던 예술적 황홀함을 나는 다른 어떤 시인에게서도 느끼지 못하였다. 여기서 성취된 것은 어떤 언어들에서는 결코 바랄 수조차 없는 것이다. 소리로서, 장소로서, 개념으로서 개개의 단어들의 모자이크는 좌우로 그리고 전체를 향하여 자신의 힘을 방출한다. (중략) 이에 비한다면 나머지 시들은 대중적인 것이 되어버리며, 단지 감정의 수다에 불과한 것이 된다(주).
니체가 호라티우스의 언어에 황홀했듯 나 역시 호라티우스의 글에 황홀했고 또한 니체의 글에 달뜸뜸했다.
'아마도'에 내가 당도할 때
'감히' 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자기만의 에피파니를 만나
자기가 그리던 '아마도'에 당도하길 바란다.
구독자 4천이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는 '신호'가 되었다.
정량화된 숫자가 다시 비정량적인 가치로 깊어졌다.
가치의 옷을 입은 모든 것은 그것이 품은 조각들을 연결시켜 전혀 새로운 하나의 질료를 탄생시킨다.
보여주는 숫자를 따르지는 않지만 그 이면이 내게 던지는 신호를 알아채고
신호를 조짐으로, 징조로, 메세지로 받아들인 지금.
나는 다시 흐트러진 정신을 주워담으며 이렇게 또 오늘, 발행을 누른다.
2년여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