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훌륭한 객관적 진리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하자. 또는 철학의 체계를 세웠다 하자. 그러나 그것이 어쨌단 말인가. 내가 그 속에서 살고 있지 않는 것이 아닌가. 남의 구경거리를 제시하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닌가. 객관적인 것은 그 때그 때마다 결코 본래적인 내 것이 아니다.
나의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와 서로 얽히어 있는 것, 말하자면 그것을 통하여 내가 신적인 것에 들러붙을 수 있는 것, 그리하여 전 세계가 무너져 버리더라도 내가 그것을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것, 그런 것을 나는 갈망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추구하리라.(주)'
키에르케고르가 청년시절에 적은 일기의 한 부분이다.
아직 철학적인 지성이 부족한 나여서 키에르케고르는 읽다 쉬다 읽다 쉬다 하며... 찬찬히... 한참을 읽어내려갔다. 책을 읽으며 성현을 내 안으로 들이는 작업은 고귀하면서도 고되다. 내 것으로 충분히 영글어있지 않으니(아니, 어쩌면 내 것만으로 영글어져서인지도)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내 안의 것과 섞이는 과정,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의 새로운 사상이 내게 한줄로 세워지는 과정이 허술한 지성에겐 버거운 일인 것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의 일기에서 말했듯이 객관적인 것은 내 것이 아니다. 브런치에 글을 매일 쓰기 시작한지 25개월. 내 글은 거의 대부분 나 자신의 토로와 한탄, 전진과 진화에 대한 것인데 이러한 글들이 도배될 때마다 나는 '이렇게까지 나를 다 까발려도 되나?'싶은 걱정도 앞선다.
내 하루의 소소한 일상과
내 정신속 이성과
내가 추구하는 이상의 민낯을 온전히 글로 다 드러내는 내 문체는
늘 걱정과 우려, 민망의 방해를 받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가 내 글에 없다면' 이것은 내 글인가, 남의 글인가를 자문하며 내 글을 쓰기 위해 나를 글에 들였고 내 서사를 표현하기 위해 나의 민낯에 활자를 입히고 있다. 나 스스로에 대한 고백과 비판과 검열과 정화과정을 내게 오는 감각에 의존하여 그대로 활자로 표현하는 것이 내 글이고 내 삶이고 내 창조라는 그 하나를 붙잡고 나는 나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키에르케고르처럼 자기성찰적인 인간인가?라고 자문해보면 분명 자유롭기는 하나 '그렇다'라고 답하기에 '성찰'이라는 단어의 속내는 너무 깊다. 아직도 난 가야할 길이 너무나 멀고 내 글이 뿜어내는 뉘앙스는 토로와 한탄을 수단삼아 여전히 부족한 내 확신으로 나를 내딛게 하기 위한 다짐과 의지가 짙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자기의심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진 내 정신을 의미한다기보다 마땅히, 기어이 가고야 말겠다는 더 큰 의지를 향해 본성적인 나를 맡기려는 나만의 의지인 것만은 확실하다.
글을 쓰는 것과 글답게 사는 것은 다르다.
글에 옷을 입히는 것과 입은 옷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글이 보편을 독특하게 주장하는 것과 보편이 글로서 독특으로 재탄생되는 것은 다르다.
객관과 보편이 내게로 당도하여 내 주관과 독특이 하나의 실체로서 표현되는 것.
탑위에 돌하나 더 얹어 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탑의 바닥부터 나의 체액을 묻혀가며 전혀 새로운 탑으로 완성지어 가는 것...
이것이 이론과 서사의 차이며
이것이 내가 글을 쓰는 방향이다.
나는 학자로 이론을 개발하고 이론의 탑을 쌓아왔지만 이 역시 나의 서사중 한갈래일뿐 남의 것에 돌 하나 얹은 논문은 지금껏 쓰지 않았다. 2019년 2월 18일부터 시작된 6여년간의 지독했던 새벽독서. 2022년 9월부터 시작한 25개월의 매일 브런치글쓰기... 그리고 이 곳, 시골로 온지 3개월. 이제서야 조금씩... 나만의 사상이 '기어이...', 그리고 '기꺼이' 싹을 내는 것을 느낀다.
지난 수년간 지나온 하루 몇시간들이 쌓이면서 기존의 나는 없어지거나 변화된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내가, 그러니까 나만의 사상이 내게 아주 민감하게...아주 조용히... 꿈틀거린다.
아직 '나는 감량이 안되지'라며 자꾸만 뒤로 미루는 것이 나태인지 겸손인지도 모르지만
나만의 것이 조금씩 싹을 내고 그 싹이 시간과 더불어
줄기가, 가지가, 잎이, 그렇게 열매까지 영글게 할 것 같아 나는
시간에, 감각에... 고.요.히... 따르는 중이다.
글은 주체적이고 실존적인 정신에서 쓰여져야 한다.
'글은 글이고 나는 나다.'는 내 머리속에 없다. 읽은 책이 내 일상으로 스며들지 못하여 머리만 커진 가분수가 되는 것은 바보짓이다. 글이 나를 담지 못하여 재주만, 남들도 다 이야기하는 것들만 가득한 글이라면 이는 위선이다. 내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다. 내 글은 철저하게 나를 검토, 검열하여 얻어낸 나만의 이야기여야 유일한 글이라 여긴다.
나는 나를 해체시킨다며 나를 실험삼아 인간을 공부한 [이기론],
나의 자녀에게 꼭 주고 싶은 정신을 담은 [엄마의 유산],
내가 공부한 성공에 대한 개념과 주장을 담은 [성공],
찬찬히 내 속으로 들어가 내 감정과 이면의 모순을 파헤치는 [감정의 반전],
시골에서의 일상을 리얼하게 기록하는 [나는 시골로 갑니다],
그리고 나의 독서와 글, 사유를 그대로 토로하는 [책, 글, 사유]
내가 쓰는 모든 글에 '내'가 있다.
[엄마의 유산]을 출간한 뒤 나의 검열은 더 지독해져서 '글에 어울리는' 어른으로, 엄마로, 교육자로, 글을 쓰는 이로 하루를 만들어가고 있다. 많은 독자들이 책을 읽고 피드백을 주시는데....
매일이 가시밭이다.
'나는 과연 이 글에 어울리는 사람인가?'라는 물음표가 내 심장을 둘러싸고 있어서 난 지금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이러한 구속이야말로 활자를 만드는 이에게 필요하지,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정신, 그리고 [엄마의 유산]에 담긴 정신.
오늘도 이 정신들을 바라보며 글에 어울리는 글쓰는 내가 되고 싶어 또 글을 쓴다....
내 심장을 옭죄는 물음표가 언젠가는 느낌표로 변화되길 바라며....
주> 키에르케고르선집, 집문당.
2년여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엄마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