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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쓴다.
끝이 궁금해서.

by 지담

마을을 휘감은 산들엔 밤송이가 주렁주렁이고

마을에 펼쳐진 들판엔 벼가 누렇게 변해가고

마을을 지르는 길들엔 대추가 송송 열리고 있다.


나도 대추나무 가지고 싶다.

마당 어디에 대추나무를 심을까.

몇주전부터 내 머리 한켠에 대추나무대추나무대추나무... 가 가득이다.


평소 잘 먹지도 않으면서 나무에서 똑! 따서 그 자리에서 먹는 그 느낌때문에 그냥 심고 싶다.

마을에 대추나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기후에 적합하다는 것이고

집집마다 많이 키운다는 것은 그만큼 손이 많이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추나무를 사러 5일장에 나가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이지만

집필의 막바지에 다다른 지금 잠시의 틈도 허용치 않는 날들이 연일 계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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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책상과 마당만 오간다.

다리가 저리면 마당을 가로질러 옆길로 올라 비탈을 한번 타고 현관쪽 숲으로 쑥 들어갔다가 다시 마당을 가로질러 집으로 들어온다. 그러면 내 주머니는 또 뚱뚱해진다. 여기저기 떨어진 밤알들을 주워모아서다. 하루에 수시로 이렇게 책상과 마당만 여러차례 순환하는 게 내 하루의 몽땅이지만 그래도 난 행복하고 즐겁고 신나고 신비롭고 이 과정에서 난 정체는 커녕 매일 어디론가 나아감을 느낀다.


희한하고 신비로운 감정이다.

그래서 더 글을 잘 쓰고 싶다.

이런 내 심정을 아주 세밀하게 단어로 표현하고 싶어서.

어떤 어휘여야 이 신비로운 심정을 표현할 수 있을지,

어떤 어휘가 이 넉넉한 자유를 표현해줄 수 있을지 난 여지껏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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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세이 출간 막바지에서 난 다시 진통을 겪는다.

글을 쓰는 것과

쓴글을 고치는 것과

고친 글을 다듬어 완결하는 것은 모두 다른 숙련됨이 필요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내 가슴의 추상을 머리에 그림으로 담아 눈을 감고 지면에 옮기면 된다.

'쓴 글을 고치는 행위'는 글이 담고자 하는 의미에 더 근접한 단어를 찾아 고치고

그러기 위해 담아낸 어휘들의 맥락을 잡아, 버릴 것들을 과감히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친 글을 다듬는 행위'는 단어, 접속사, 조사, 서술어처리, 주체변경 등으로 글의 컬러와 템포와 리듬을 다시 재구성, 조정하며 글이 글다워지게 마무리하는 작업이다. 나는 '고친 글을 다듬는 과정'이 가장 어렵다.


브런치에 글을 쓰는 것은 그저 글을 쓰는 행위에 불과하지만

책으로 출간하기 위해 쓴글을 고치고 고친 글을 다시 다듬는 과정은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긴 여정에 오른 것과 같다. 끝을 모르니 멈춰야 할 지점도 모르고 그러니 어디까지 고쳐내야만 글이 글다운지도 잘 모른다. 무조건 감으로만 이를 판단해야 하는지라 '추상'이 판단의 근거가 되는 위험한 경계위에 늘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길인 줄 알면서도 걷기를 시작했다.

지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흥겹지도 않다.

편안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불안한 것도 아니다.


KakaoTalk_20250930_164226805.jpg 거의 하루 10시간을 보내는 내 공간


늘 습관처럼 매일 이리 사는 것에 익숙하다 못해 능숙하다.

지겨워도 걷고 아파도 걷고 어려워도 걷고 낯설어도 걷고

그러다가 온몸이 지쳤지만 발이 멈추지 않고 몸뚱이를 옮기듯이 손가락이 머리를 이끌 때도 있다.


쾌감은 거기서 찾아온다.

걷는다는 생각조차 다 쏟아내져 걷는 것조차 망각된 그 지점.

눈을 감고 손가락만 움직이는, 머리속의 그림을 활자로 재현하는 그 지점에 이르면 결코 내가 쓰는 것 같지 않은 그런 어휘들이 내 속 어디선가에서 느닷없이 돌출하기도 한다. 순간 놀랍고 뿌듯하고 신나는 그 지점. 쾌락은 결코 대가없이 오지 않는다. 지루한 구간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극도의 에피파니를 내가 내게 선사한 것이다. 자뻑이라 해도 좋고 궁상맞다고 놀려도 좋다. 어쩌면 이 쾌감들이 내가 머무르지 않고 1만시간을 나아가게 한 순간순간들이었을테니까.


영혼을 맑게 하는 음악, Madredeus(주)를 듣는다.

그리고 또 자판을 두드린다.

머리 속에 있는 날 것 그대로를 활자로 만들어 하얀 백지를 채운다.

그렇게 머리에서 끄집어낸 언어는 그 아래 가슴 속 정작 쓰고자 한 그것이 나오도록 글을 이끌고 그렇게 나오는 것들을 활자로 옮겨가며 글은 점점 모양새를 갖춰간다. 늘 이쁜 것만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끄집어낸다. 머리속 사유는 결국 심장 깊은 곳의 은밀한 현을 울리고야 마니까.


오늘도 난 쓴다.

쓰는 행위로 탄생되며 여물어가는 무한한 부산물들을 즐기며

여전히 난 쓴다.


이 길의 끝에 무엇이 날 기다릴지 너무 궁금해서 쓰고

이 과정의 굴곡에서 내가 무엇으로 버텨내는지 알고 싶어 쓰고

이 글이 나를 통해 결국, 증명해내고야 말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어

오늘도 난 또 쓴다.


주> Madredeus : 포르투칼 혼성그룹 (내가 독서나 글쓸 때 늘 틀어놓는 음악가운데 하나)

https://www.youtube.com/watch?v=VXF06lobATY

# 지담의 책과 글, 사유의 놀이터에 초대합니다.

https://cafe.naver.com/joowonw

[지담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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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5:00a.m. [삶, 사유, 새벽, 그리고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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