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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담 Dec 06. 2022

누구냐? 내 정신에 이런 질서를 잡아놓은 사람은?

'성향'에 대한 소고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니? 누가 너에게 이런 한계를 만들었어? 네 부모? 선생? 세상? 누가?

말해주면 내가 가서 왜 그랬냐고 따지고 올께"

"...."

"누구지? 네 머리 속을 그렇게 정리해 놓은 사람이?"

"저...요...그게 효도인 것 같아서요. 저는 늘 그렇게 수동적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착하게..."


얼마전 강의시간에 학생들과 나눈 대화 중 일부인데 앞뒤 맥락 삭제하고 저렇게만 써놓으니 마치 내가 호통치고 따진 것 같지만 천만에! 아주 부드럽고(?) 하지만, (학생표현대로) 뼈때리는 질문으로 지금 이 학생은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 엄청난 변화로 성장중이다.


과연 그럴까?

그다지 거부하지 않고 부모님이, 세상이 하라는대로 해서 지금 이 자리,

그리고 지금도 세상이 흘러가는대로 그냥 적당한 곳에 취직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정말 그녀는 그녀의 말대로 수동적인 사람일까?

그리고 말 잘 듣는 수동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일까?

'수동적'과 '착한'은 전혀 다른 얘기다.

둘을 연결짓지 말자.


여하튼!

결코 아니다!

"넌 상당히 능동적인 사람이다. 수동적인 것을 적극적으로 선택해 온 능동적인 사람이다. 수동적이라는 한쪽 패만 썼을 뿐, 그 한쪽 패만으로도 잘 살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을 적극적으로 따른,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그림

늘 그렇듯 그.저. 이.해.를. 도.울.뿐.인. 그림 등장,

그림을 잠깐 보자.


분명 선택에 앞서 자극이 온다.

A는 지극히 평범한 '적당한 연봉에 맞춰 취직해라'와 같은 일반적으로 아는 자극이다.

분명한 것은 모든 현상은 보이지 않는 이면에 상반된 현상을 잠재하고 등장하니

A는 상반된 B를 담고 내게로 왔다.

예를 들어, B는 취직말고 창업해라! 일 수도, 네가 원하는 공부를 해라 일수도, 또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모른다고 없는 게 아니라 분명 다른 자극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현상이든 사물이든 모든 것에는 항상 대립된 이면이 존재하며,

에너지는 결코 진공상태로 머물지 않기에

드러난 현상에 감춰진 이면은 내가 모를 뿐, 무언가로 채워진 채 나에게 온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안에 감춰진 상반된 것을 그대로 비추는 것이 원리다.


위의 학생은 그저 평범한 일상에서 주어지는 A만 선택했을 뿐, B는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니까. 또는 관심없으니까, 또는 안전하지 않으니까, 또는 남들과 다른 것이 불안하니까. 또는 용기가 없으니까.

그래서, 이 학생은 늘 '수동을 선택하는 능동'을 택하면서

주어진 다른 이면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 판단에 따르는 주체적인 선택들을 해왔던 것이며 이것이 습관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학생은 스스로 선택한 습관화된 패턴에 의해

스스로를 '수동적'이라 제한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그 안에 맡기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교수님 MBTI가 뭐세요?"

"INFJ"

이렇게 말해주면 마치 나를 꿰뚫고 있다는 듯이 나에 대해 줄줄줄줄 얘기하며 나보다 더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죠?"

나는 그냥 웃고 만다.


MBTI에 따르면 나는 지극히 내성적이다. 실제 상당히 내성적인 면이 많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고 대립은 피하고 모든 것에서 되도록 침묵을 택하는, 극도의 내성파다.

그런데 삶이, 일상이

늘 내성적일 수 있을까? 늘 외향적일 수 있을까?

그냥 편한 쪽을 꺼내 썼을 뿐

한쪽으로만 살아지지 않는다.


강의할 때나 새벽 독서모임할 때

나는 지나치게 열정이 넘쳐 늘 혼자 흥분하곤 하니까.


우리는 내성적/외향적, 수동적/능동적, 그리고 다양한 관점에서 양극을 구분해

너는 이쪽, 그는 저쪽, 그녀는 요쪽, 나는 그쪽. 이렇게 나눠버리고는 행동의 타당성을 만들어 버린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쪽인 사람은 이렇게 할 것이니 이 방법을, 저쪽인 사람은 저렇게 할 것이니 저 방법을 사용하라는 이상한 이론들도 생성시켰다.

그런데 그게 먹혔나? 글쎄...(물론, 참고는 되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주장이지만

결코 삶이 그렇게 노선대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론적으로 확립된 성향대로 사람을 대하고

성향대로 인생이 그리그리 흘러간다면

힘들 게 하나도 없겠네?

곤란하고 곤경에 빠질 일도 없겠네?

해결안되는 갈등도 없겠네?

성향에 따른 맞춤식 해결방법이 세팅되어 있으니까.


수동적이다 능동적이다

외향적이다 내성적이다

어떻다 저떻다와 같은

성향은 없다.


그저 편한쪽만 택해서 습관이 되었을 뿐.

습관이 되니 더 이상 고민없이 계속 그 쪽만 택해서 더 강화되었을 뿐.

더 강화되다 보니 반대편에 있는 것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아 퇴색되어 가고 있을 뿐.

그렇게 스스로 '나는 00적'이라는 프레임을 씌워둔 채 사고와 행동에 제약을 주고 있었을 뿐.

그리고 그런 제약을 주는 것 자체가 더 관성화되어 오히려 편한 선택으로 고착되었을 뿐.


성향말고 습관으로 관점을 바꾸면

나의 성향으로 인해 내 행동을 탓하거나 성향을 바꾸려는 어리석은 에너지 낭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래된 인디언 우화처럼

내 뱃속에 늑대와 양이 함께 사는데 누가 이기겠느냐는 질문에

정답은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인 것처럼


나에게 굳어진 '성향'이라는 녀석도 (타고난 성향의 유무를 떠나, 적어도 내가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에서.) 내가 먹이를 많이 준 쪽이 우세해진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발견하고 그것에 대한 탐구를 통해 해답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시작은 기존전제부터 의심해보는 것일텐데

기존전제가 '나는 수동적이다'라고 되어 있으면 이부터 의심하고 제거해내야

나는 애초의 순수한 나로서 다시 탑을 쌓을 수 있다.


매 순간, 아니, 인생전체에서 내 정신을 구속하고 구속된 정신으로 행동반경까지 지배해오던 녀석이

성향이라면

이는 내가 그 쪽 성향에 지속적으로 먹이를 줄 수 있는, 줘도 되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었고 그런 삶을 선택할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성향은

나의 부족한 지성의 신호로

제대로 먹이줘야 할 쪽을 선택하지 못한 결과, 그리고

이성보다는 감정에 의해 선택한 결과로 고착된 패턴이라 감히 정의내려본다.


자, 나는 인간이다.

1.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발적, 주체적 존재이다.

2. 성향이란 없다.

는 전제하에

나는 무엇을 자발적이며 주체적으로 선택할 것인가?

이렇게 기존에 관성화된 나의 사고부터 깨버리고 시작해야

내가 원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시작할 수 있다.


'성향'이라는 합당해 보이는 포장지에 눌려

내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스스로 만들고

그 안에 갇혀 행동하게 하면서

심지어 그 한계에 근사한 변명까지 정립시켜주는

모순된 이론과 손잡지 말자.


내가 손잡아야 할 것은

나는 주체적이며 자발적인 인간이라는

인간본성을 일깨워야 하는 정신이다.


방법은 단 하나다.

불편한 쪽으로,

어려운 쪽으로,

모르는 쪽으로,

먹이를 주면 된다!


자,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누가 널 이렇게 만들었니?

누가 너에게 이런 한계를 만들었어?

누가 너는 그런 사람이래?

네 부모? 선생? 세상? 누가?"


누구냐?

내 정신에 지금의 질서를 잡아놓은 사람은?


그리고 '수동적'과 '착한'은 전혀 다른 얘기라고 언급했다.

자기가 편한 쪽으로만 선택해 한쪽을 강화시킨 것과

착한 것은 과연 어떤 연관성이 있다는 말인가?

늘 상대의 의견을 따르는 선택을 한 사람이 어떤 선택 앞에서 '난 수동적이라서 어쩌구저쩌구'한다면

착한 사람인가? 도대체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이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기까지만 질문을 던지고 말아야겠다.

더 직설적으로 얘기했다가는 또 욕 한바가지가 날아올 듯해서.



#김주원교수 #새벽독서 #인디언우화 #성향 #수동적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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